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23화 (123/305)

123화. 여섯 번째 툴을 가진 투수(4)

-뻐엉!!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오늘 좌우로 워낙에 넓게 잡아주고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여기까진 무리인 것 같다. 백하민이 허리를 굽혀 로진백을 잠시 매만졌다.

지난 1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프로와 아마의 높은 벽을 생각해본다면 프로 데뷔 1년 차에 41.1이닝 4.14의 평자책이면 절대 나쁜 성적이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들은 최수원의 플레이를 보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분명 2년 전.

고등학교 시절 한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백하민은 타자 최수원을 자신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는 마지막 순간 최수원에게 제대로 아웃카운트를 뺏었었다. 하물며 투수로서의 최수원? 경쟁 상대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1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1년과 백하민 자신의 1년은 어째서 이토록 큰 차이가 난 것일까? 역시 그때 2군 훈련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미국을 갔어야 했던 걸까?

백하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물론 그 훈련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어린 시절 꿈꾸던 3년 연속 MVP에 메이저로 진출하여 사이 영을 타고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는 꿈을 잃어버린 것은.

프로에 올라와 아등바등 살아남기에 전념하던 작년부터였을까? 아니면 고등학교에 올라온 이후 머리가 조금 굵어지며 현실을 깨닫게 된 이후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게 된 순간부터였을까?

신인왕 MVP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최수원이 부러웠다.

그리고 미웠다.

어쩌면 어린 시절 그의 꿈을 망상 취급했던 누군가는 이와 비슷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런 감정을 갖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덕분에 어젯밤 백하민의 베갯잇은 눈물로 흠뻑 젖었다.

참 오래간만의 울음이었다.

백하민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바깥쪽 낮은 코스.

느린 슬라이더.

벌써 두 번째 타순이었다. 한 바퀴를 지켜본 타자들의 배트가 점점 타이밍에 맞아 나가고 있었다. 커터와 고속 슬라이더. 양자택일의 선택지였으니 둘 중 하나만 노리면 된다는 의미겠지. 게다가 비슷한 궤도와 속도였으니 다른 공을 노리던 중에도 높은 확률로 커트는 가능할테고.

하지만 다 예상했던 부분이다. 레파토리에 슬라이더를 더했다. 고속 슬라이더보다 10km/h 가깝게 느린 공이다. 타자의 타이밍이 완벽하게 흐트러졌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이번 경기 첫 번째 삼진.

타석에 또 한 번 박동석이 올라왔다.

앞선 타석에서 고속 슬라이더와 커터의 차이를 구분하고 덕아웃에 돌아와 동료들에게 이야기해줬지만 아무도 그걸 제대로 공략해내지 못했다. 그나마 좌타자들이 찔끔찔끔 건드리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오늘 재규어스의 타선에 좌타자는 고작 둘. 무엇보다 더 최악인 것은 저 슬라이더다.

기본적으로 배팅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타이밍이다.

저 어린 투수가 던지는 변형 패스트볼, 혹은 빠른 슬라이더는 까다롭지만 강한 힘으로 후려갈기거나 운 좋게 잘 맞아서 떨어지면 얼마든지 멀리 쳐낼 수 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야수가 실수라도 하면 얼마든지 살아나갈 수 있다. 하지만 배팅의 타이밍이 흐트러지는 것은 답이 없다.

하지만 길이 없을 때 길을 만들고 답이 없을 때 답을 찾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박동석이 방망이를 꾹 쥐었다.

재규어스의 박동석.

응원석에서 그의 응원가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평일임에도 경기를 보기 위해 모여든 만삼천여 명의 관중들. 그 응원가가 그에게 힘을 보태 주었다.

3-4-5.

야구에서 3-4-5란 곧 완성형 타자를 의미한다.

KBO의 역사에서 통산 성적으로 3-4-5를 기록한 채 은퇴한 타자는 오직 넷뿐. 올해 은퇴하는 KBO의 대표타자 마린스의 이규만조차도 통산 성적은 3-3-5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박동석이 다섯 번째 통산 3-4-5를 기록하는 타자가 되리라 기대한다.

마운드의 백하민이 공을 던졌다.

바깥쪽.

저 녀석 집요할 정도로 바깥쪽을 사랑한다. 박동석의 머릿속에 궤적이 그려졌다. 움직이던 방망이가 멈춰 선다.

-뻐엉!!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1-0.

두 번째.

이번에도 비슷한 코스.

-뻐엉!!

“스트라잌!!!”

심판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다.

앞선 공은 빠른 슬라이더. 그리고 이번 공은 커터다.

1-1

세 번째.

이번에는 조금 더 몰린 코스였다.

그래, 아무리 투수가 컨디션이 좋아도 항상 그렇게 꽉찬 코스로만 공을 던질 수는 없는 법이다.

-딱!!!

마지막 순간까지 겨드랑이를 조여가며 공을 잡아당기려 애썼다. 하지만 3루 파울라인을 넘어가는 공.

1-2.

어지간한 공은 가볍게 커트하겠노라 마음 먹은 채 방망이를 짧게 잡고 네 번째 공을 기다렸다. 극한의 집중. 마운드에 선 투수의 자세 하나하나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높은 코스.

-뻐엉!!

방망이를 내밀 필요도 없었다. 확실하게 빠지는 공이었다.

2-2. 그대로 다섯 번째 공을 기다린다.

백하민의 손에서 공이 튀어나왔다.

완벽하게 꽉 찬 코스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알 수 없는 예감이 박동석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프로 14년 짬밥쯤 되면 그 예감이라는 것은 수많은 데이터로 학습된 감각에 가깝다. 이건 느린 슬라이더다.

튀어 나가려던 박동석의 방망이가 멈춰 섰다.

-뻐엉!!!

한교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구심을 바라봤다. 구심의 손가락이 1루심에게 향했다. 체크스윙 여부를 묻는 것이다. 하지만 구심에게서는 스윙콜이 나오지 않았다.

3-2 풀카운트.

마운드의 백하민이 모자를 벗어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훔쳤다. 분명 날은 쌀쌀했지만, 갈아입은 언더 셔츠는 어느새 땀범벅이다.

[박동석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서 장갑을 동여맵니다.]

[4회 초, 원아웃. 점수는 0:0. 투스트라이크 원볼의 볼카운트가 어느새 풀카운트로!! 긴장되는 상황입니다.]

[잠실이라 큰 게 나오기 힘들기는 하지만 상대는 박동석입니다. 잠실을 홈으로 20개 이상의 홈런을 치는 타자거든요. 백하민 선수의 신중함. 충분히 이해됩니다.]

팽팽한 긴장감.

박동석이 타석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덕아웃에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최수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자신을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혹은 한참 어린 후배처럼 대하는 건방진 후배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 그를 한 번 바라보면 뭔가 이 팽팽한 긴장감이 조금은 풀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덕아웃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각오를 단단히 했다. 야구공을 꾹 움켜쥐었다. 이전부터 생각했었다. 풀카운트에서 던질 공은 가장 자신 있는 공이라고.

어린 시절.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던 그의 우상을 향하여 백하민이 공을 뿌렸다.

144km/h의 고속 슬라이더.

박동석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우중간. 잠실의 광활한 외야를 향하여 쭉 뻗어나가는 타구. 박동석이 빠르게 1루를 향해 질주했다.

[이주혁!! 이주혁!!]

트레이드 마크는 갈지자 수비.

마린스 관련된 기사에는 항상 거포 이주혁 4홈런 장전 중이라는 댓글로 유명한 마린스의 영원한 유망주 이주혁이 마치 나는 것처럼 움직였다. 누군가는 이주혁이 야구를 선택하는 순간 한국 육상계는 세계대회 메달리스트를 잃었다고 말했다.

물론 야구 선수 이주혁은 그 말을 매우 싫어했다. 달리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선수라는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잠실의 넓은 외야를 겅중겅중 달려가는 이주혁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 한국 육상계는 정말 큰 별을 하나 잃은 게 분명했다.

빠르다.

그것도 매우 빠르다.

외야수 이주혁의 약점은 그저 타구 판단에 치명적인 실수가 종종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모든 능력치는 최상급. 심지어 달리기만 따지자면 역대 KBO의 모든 외야수를 통틀어 가장 뛰어났다.

그야말로 너른 잠실 외야에 최적화된 인재.

그의 슈퍼 캐치가 박동석의 안타를 훔쳐냈다.

“아웃!!”

[맙소사. 이주혁. 정말 놀라운 수비입니다.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드네요.]

[맞습니다. 물론 출발도 나쁘지 않았지만, 가속이 정말 어마어마했어요.]

좋은 수비는 보통 좋은 시너지를 불러온다.

물론 마린스는 보통 팀이 아니었던지라 공격 이닝에서 지지부진은 계속됐지만 적어도 점수를 내주지 않는 데는 성공을 했다.

6이닝 무실점.

김대철 감독이 직접 백하민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성공적인 선발 데뷔전이었다.

***

등판을 끝낸 하민 형의 표정이 상당히 뭐랄까······.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 좀 재수가 없어졌다. 마치 고등학생 때 적으로 만났던 그 시절처럼 말이다.

하지만 뭐 나쁘진 않았다.

사회적으로야 형이라고는 하지만 내 알맹이가 서른다섯, 아니 돌아와서 2년이 흘렀으니 이제는 서른일곱이다. 만약 내게 조카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시험 백 점 맞고 돌아와서 뻐기는 아이를 보는 기분이다.

-딱!!

[아!!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타구. 강라온 잡아서 김훈에게, 김훈 다시 이규만에게!!]

“아웃!!!”

[더블 아웃!! 마린스, 1사 1, 2루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습니다.]

[와, 오늘 양 팀 모두 집중력이 정말 대단한데요? 7회가 끝난 상황에서 점수는 여전히 0:0. 좀처럼 점수를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하민 형이 마운드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경기는 팽팽하게 흘러갔다. 재규어스도 그리고 우리 마린스도 산발적인 안타는 나왔지만, 점수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경기가 흘러갈수록 감독이 나를 한 번씩 바라보는 빈도가 상당히 증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빈볼 맞았던 자리에 피멍은 여전했고 통증이 있으니 당연히 움직임에 약간의 거북함도 있긴 했다. 하지만 야구라는 게 원래 이 정도는 감수하고 뛰는 게 야구다.

나약한 투수 놈들이야 손톱이 조금 갈라졌다느니 목에 담이 걸렸다느니 같은 소리를 하며 닷새에 하루 있는 등판도 거르려고 하지만 진정한 야구 선수인 타자들은 근육이 삐끗해서 염증이 생겼다거나, 심지어 뼈에 금이 가도 참고 뛴다.

가볍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괜히 어깨를 몇 차례 붕붕 돌렸다.

노골적인 어필이었다.

솔직히 조카가 백 점짜리 시험지 들고 오면 삼촌이 어? 변신 로봇이라도 하나 탁 사주는 게, 변신 로봇 사줄 돈이 없으면 바나나 우유라도 하나 사서 빨대 탁!! 꼽아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6이닝 무실점하고 왔는데 승리 투수야 이미 글렀다지만 그래도 경기에 패배해서 그 6이닝 무실점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면 기분이 매우 더러울 것이다. 그 기분 내가 잘 안다. 나도 지난 경기에서 5.2이닝 무실점에 안타 2개나 치고 경기 패배하니까 기분이 매우 더러웠었으니까.

첫 번째 타자는 7번 한교철.

그래, 공도 못 받는 놈이 포수를 하고 있으면 그래도 빠따라도 휘둘러야지. 지금 빠따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못 보이면 1할대 치고 있는 조유진한테 주전 포수 자리 뺏길 상황이다.

한교철 힘내······ -부웅!! “스트라잌!! 아웃!!” ······라.

괜찮다.

아웃카운트는 아직 두 개나 남았다.

두 번째 타자는 오늘 이루수로 출장한 김훈. 그래도 정지운 유격수에 사울 로페즈 이루수보다 사울 로페즈 유격수에 김훈 이루수가 더 좋을 것이라는 감독의 판단을 믿어보자.

-딱!!

그리고 그 믿음이 배신당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0.4초.

깔끔한 초구 뜬공 아웃.

아니, 아니다. 오히려 좋다.

다음 타자인 9번 타자 이주혁은 오늘 그 안타를 막아낸 것으로 자신의 할당량을 끝냈다. 이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이주혁에게도, 그리고 감독 자신에게도 차마 못할 짓일 것이다. 그러니까 감독님 여기선 슬슬 대타를······.

-뻐엉!!

“스트라잌!!”

깔끔한 초구 스트라이크.

사실 재규어스도 단단히 작정했는지 8회에 셋업맨을 올렸다. 최고 154km/h의 속구를 던지는 토종 투수. 구종은 속구와 슬라이더 뿐이지만 커맨드가 나쁘지 않다.

사실 김훈이 뭐를 할 수 있는 투수가 아니다.

하지만 괜찮다.

야구는 본래 9회까지다. 그리고 원래 주인공은 좀 지각을 하는 법이고.

그냥 깔끔하게 다음 이닝을 준비하자.

-딱!!!

어?

우측 외야. 그러니까 일루수의 키를 훌쩍 넘어간 위치. 잠실의 광활한 외야를 야구공이 데구르르 굴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어쩌면 방망이를 휘두른 이주혁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을 행운의 텍사스 안타.

그가 미친 듯한 속도로 질주했다. 빠르다. 정말 빠르다. 진짜 엄청 빠르다. 이건 메이저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속도였다. 1루를 지나 2루까지.

그것은 보통 주자라면 미친 짓이었겠지만 이주혁이기에 가능한 주루였다.

-뻐엉!!!

심판의 손이 올라왔다.

세이프.

2사에 주자 2루.

득점권에 드디어 주자가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감독이 나를 바라봤다.

“수원아.”

“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드디어 주인공이 등장할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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