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22화 (122/305)

122화. 여섯 번째 툴을 가진 투수(3)

김대철 감독은 마지막까지 정말 맹렬하게 고민을 했었다.

포텐셜만 따지자면 최민혁쪽이 훨씬 컸다. 물론 최고 구속만 따지면 비슷하다. 하지만 결국 투수에게 사이즈란 구속이나 제구만큼이나 중요한 재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너무 작아······.’

물론 백하민 역시 179cm로 평균을 훌쩍 넘는 키다. 그러나 MLB처럼 평균이 192cm를 넘는 것은 아니지만 KBO 역시 투수 평균 키가 이미 185cm를 넘어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몸무게가 징하게 붙지 않는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증량성애자 최정식의 노력으로 81kg까지 찌우는데 성공을 했다는 점 정도다. 허나 그럼에도 백하민의 사이즈는 여전히 작았다.

같은 키와 무게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도 백하민의 사이즈는 작아 보인다. 근육이 지방보다 무겁다는 것을 감안해도 그렇다. 팔다리가 길고 흉통이 좁은 탓이다. 같은 두께의 근육이 붙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많은 근섬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대철 감독은 두 번째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네 번째 선발로 백하민을 낙점했다. 시범 경기에서 백하민의 성적이 더 안 좋았기 때문이다.

마운드의 백하민이 가볍게 호흡했다.

잠실 구장이다.

백하민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났다.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장 먼저 야구를 보러 왔던 구장도 바로 이 잠실이었으며 그가 기억하는 KBO 최강의 팀은 바로 오늘 그가 상대할 팀인 재규어스였다.

호크스, 유니콘스, 드래곤스, 그리핀즈. 그리고 재규어스.

물론 이 중에 진짜 왕조는 호크스와 그리핀즈 뿐이라 말하는 이들도 많기는 했지만, 아무튼 적어도 몇 년 이상 꾸준히 리그를 지배했던 팀들 가운데 마지막.

크게 심호흡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크게 두방망이질 쳤다.

“하민이 형 파이팅!!”

덕아웃 쪽에서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덕아웃 펜스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손을 흔드는 최수원이었다.

문득 어제 녀석과 나눴던 대화가 백하민의 머릿속을 스쳤다.

“거봐, 형. 내가 뭐라고 했어. 원래 감독들은 그런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러게······.”

신기한 녀석이었다.

분명 백하민 자신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었음에도 야구에 관해서는 종종 프로 생활을 십 년쯤 한 베테랑 같아 보일 때가 있었다.

“감독쯤 되면 기본적으로 선수들 실력은 대충 다 알고 있어요. 뭐, 아예 1군 2군 경계에 있는 선수라면 시범 경기에서 진짜 목숨 걸고 최대치 기량을 보여주는 게 맞지만, 선발 경쟁하는 거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요.”

평소 사람들과 생활하는 걸 보면 서투르기 짝이 없는 것이 영락없는 열아홉 애송이지만 이럴 때면 정말 ‘인생 2회차인가?’ 싶다.

아무튼 녀석의 이야기처럼 감독님은 가진 바 기량을 다하여 최선의 피칭을 보여줬던 민혁 선배가 아닌 백하민 자신을 선택했다.

이제 2년 차, 첫 풀타임에 들어가는 애송이 주제에 두둑한 배짱이 마음에 든다며 투수는 본래 그래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마운드는 그라운드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그렇기에 외롭고 또 두려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미 고교 야구에서 에이스였으며 프로에서 불펜이지만 41.1이닝에 4.14의 평자책을 기록했던 투수에게 하는 이야기 치고는 너무 쓸데없는 잔소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프로 무대의 선발 투수는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

어린 시절 하민의 손을 잡고 경기장을 찾았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 경기장 어딘가에서 하민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늘 그래오셨던 것처럼.

백하민이 덕아웃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최수원은 여전히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틀 전 등판을 한 덕분에 오늘 경기 아예 쉬어가기로 한 탓이다. 그래, 저 녀석 데뷔 첫 타석에서 연타석 홈런을 친 주제에 바로 그저께 첫 등판에서는 5.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심지어 타석에서는 안타만 두 개를 쳐서 자기 손으로 승리 투수 요건까지 채우고 내려왔었다.

“KBO가 MLB처럼 포시 못 나간 선수한테 MVP주는 거 엄청 짜게 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린스에서 신인왕에 MVP따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빌어먹을 놈.

갑자기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백하민의 목표는 원대했다.

KBO에서 3년 연속 MVP를 수상하고 메이저로 진출하여 사이 영. 그리고 명예의 전당까지.

하지만 그가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목표를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게 분하여 매일매일 싸우고 울고 또 싸우고 우는 그에게 그의 은사는 그런 말을 했었다.

“소시민은 도전하는 사람을 비웃는 법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사람 대부분이 비웃는 삶은 그게 아무리 대단한 삶이더라도 너무 괴롭잖니. 그러니까 하민아. 일단 눈에 보이는 것부터. 소시민들도 비웃기보다는 ‘우와 대단하다.’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의 일부터 차근차근 보여주자.”

그 이후로 백하민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원대한 목표를 말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저 최수원이 자신의 목표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백하민 자신도 최수원에게 자신의 포부를 말했더라면 최수원은 그를 비웃었을까?

백하민이 고개를 저었다.

타석에 재규어스의 1번 타자 정창수가 올라왔다. 올해 스물 아홉. 한참 절정기의 타자로 작년 성적은 0.257/0.367/0.346다.

눈이 좋다.

장타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1년에 홈런 5개 정도는 쳐낼 파워를 갖추고 있으니까.

초구.

144km/h의 고속 슬라이더.

-뻐엉!!!

“스트라잌!!!”

공을 지켜본 정창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타석 밖으로 물러났다.

심판에 대한 어필인지 아닌지 모호한 경계점의 제스쳐.

마운드의 백하민이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와인드업 직후 빠르게 날아가는 공.

직전과 비슷한 코스. 하지만 조금 전의 제스쳐가 효과를 본 탓일까? 살짝 안쪽으로 더 몰렸다.

정창수가 빠르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하지만 빗맞았다.

높게 뜬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웃!!”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기타석에 있던 동료에게 말했다.

“커터인지 슬라이더인지 엄청 빨라. 근데 각은 보이는 것보다 덜 예리한 것 같아. 그리고 오늘 심판이 바깥쪽 코너를 좀 후하게 주는 것 같던데? 살짝 애매한 코스인데 스트라이크 콜을 주더라고.”

“그래?”

이어지는 두 번째 타석.

타자가 공을 지켜봤다.

-뻐엉!!

“스트라잌!!!”

정창수의 말처럼 살짝 애매한 코스에 스트라이크 콜이 나왔다. 슬라이더를 적극적으로 쓰는 투수인데 이렇게 되면 오른손 타자들은 상당히 힘들어지는 셈이다.

그가 홈플레이트에 조금 더 바짝 섰다.

두 번째.

홈플레이트에 바짝 선 타자를 바라보던 백하민이 이를 악물었다.

조금 위험하지만 그래도 이건 배짱 싸움이다. 왜, 5.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최수원도 초구는 몸에 맞는 공으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맞으면 어쩔 수 없지라는 마음으로 안쪽 코스 꽉차게.

-뻐엉!!

아슬아슬한 몸쪽 높은 코스.

타자의 방망이가 이번에도 나오지 못했다.

“스트라잌!!!”

심판의 손이 올라왔다.

오늘 바깥쪽만 넓은 게 아니다. 안쪽으로도 넓다. 아무래도 심판이 좌우폭을 모두 넓게 줄 모양이었다.

백하민이 빠르게 세 번째 공을 던졌다.

타자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딱!!

먹힌 타구.

오늘 일루를 보는 이규만이 빠르게 달려가 공을 주워 백하민에게 던졌다.

“아웃!!”

공 다섯 개로 아웃카운트 두 개.

백하민의 시선이 최수원에게 향했다.

최수원의 얼굴에 뿌듯함과 기쁨이 엿보였다.

국제대회에서 친해진 이후, 자신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준 동생이다. 성향도 제법 잘 맞는다. 그리 자주 본 동생은 아니지만 지난 1년 팀에서 동고동락했던 동료들보다 오히려 더 친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저 뿌듯함과 기쁨이 그저 달갑지만은 않았다.

백하민이 가볍게 호흡을 들이키며 모자를 고쳐 썼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곱슬머리가 흩날렸다. 경기를 지켜보던 여자 팬들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 나왔다. 뭔가 화면에 특수효과로 꽃잎이라도 흩날려야 할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재규어스의 세 번째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조금 전 화면에 잡혔던 백하민과는 사뭇 대조되는 비주얼의 남자였다.

재규어스의 주장인 박동석. 재규어스 역사상 최강의 우타자로 3년 차에 처음 풀시즌을 치른 이후 부상으로 날렸던 세 시즌을 제외한다면 무려 13년째 3할 타율 4할 출루욜 5할 장타율을 지키고 있는 괴물이었다.

‘진짜 그대로네.’

어린 시절 백하민의 우상.

아마 지금도 집에 가면 오래된 재규어스 유니폼에는 박동석이 마킹되어 있을 것이다. 도무지 알아보기 힘든 괴발개발의 사인과 함께.

백하민이 초구를 준비했다.

이제 서른넷의 나이. 타자로써 절정기를 지나고 있는 정상급 타자다. 방심따윈 없었다.

초구,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지나는 슬라이더.

-딱!!

앞선 두 타자와 달리 박동석의 배트가 그 공을 두들겼다. 멀리 뻗어나간 공이 1루 내야석 깊숙한 곳에 떨어졌다.

박동석이 쓰게 웃었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가 운이 좋은 거라면 참 좋겠다.

그냥 이전과 똑같게 던졌을 뿐인데 약간 더 빠진거라면 괜찮다. 하지만 노리고 조금 더 뺀 거라면? 145km/h짜리 슬라이더가 공 반개 단위로 움직인다면 그보다 무서운 일은 없을 것이다.

박동석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운과 실력 두 가지 모두가 혼재된 결과였다. 더 빼려고 한 것은 사실. 그리고 그게 반개 차이로 빠진 것은 약간의 행운이다. 박동석만한 타자를 상대로 앞선 타석의 타자들을 상대했던 것과 똑같은 공을 던질 수는 없었다.

두 번째.

백하민이 두 번 고개를 젓고 사인을 보냈다.

한교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공.

박동석이 방망이를 멈췄다.

-뻐엉!!

“스트라잌!!”

응?

그가 고개를 돌려 심판을 바라봤다. 이게 진짜 스트라이크냐는 강력한 어필. 박동석 정도 되는 커리어의 타자이기에 무시할 수만은 없는 어필이었다. 그러나 심판의 표정은 단호했다.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장갑을 조이고 헬멧을 툭툭 두들겼다.

그리고 세 번째.

이번에도 비슷한 코스.

집요할 정도로 바깥쪽 승부를 노리는 투수다. 뭐, 괜찮다. 적당히 커트를 하다보면 언젠가 실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아무리 대단한 투수라도 모든 공을 이렇게 던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한 대여섯개 던지면 하나 정도는 실투가 나오기 마련이다.

-딱!!

박동석의 방망이가 날아오는 공을 두들겼다.

‘응?’

손에 전해지는 느낌이 이상했다.

타이밍, 방향, 모든 것이 미세하게, 하지만 확연하게 달랐다.

타구가 솟구쳤다.

그라운드.

남들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선 투수가 세 걸음을 움직여 그 타구를 받아냈다.

“아웃!!”

쓰리 아웃 체인지.

박동석이 웃었다.

“얘 좀 재밌네.”

커터인지, 아니면 슬라이더인지. 사실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저 녀석이 시범경기에서 보여줬던 공 외에 하나 더. 바깥으로 빠지는 공을 더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거의 같은 폼으로.

***

1차전. 하민이 형이 벌써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마린스의 거지 같은 내야진이 당연히 처리해야 할 공을 처리하지 못해서 안타가 하나 생긴 건 좀 아쉽지만 그래도 참 훌륭한 피칭이었다.

많은 사람이 시범 경기에서 하민이 형이 고속 슬라이더만 주야장천으로 던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범 경기에서 하민이 형이 주야장천으로 던졌던 공은 고속 슬라이더가 아닌 커터였다.

사실 고속 슬라이더와 커터는 던지는 투수가 '내가 던지는 공은 커터야.', '내가 던지는 공은 고속 슬라이더야.'라는 말로 구분이 되는 공이지 공 자체의 변화만 보면 거의 비슷하다.

타자들 입장에서는 그냥 둘 다 속구에 버금가게 빠른데 같은 팔 투수가 던지면 바깥쪽으로 빠지고, 다른 팔 투수가 던지면 안쪽으로 들어오는 공일뿐이다.

하지만 던지는 입장에서는 그립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하민이 형이 원래 던지던 고속 슬라이더는 기본적으로 슬라이더 그립인데 공을 좀 꽉 잡고 던지는 형태였었다. 이 형 손가락이 워낙 길어서 그렇게만 해도 일반적인 슬라이더보다 훨씬 변화는 적은데 구속은 속구랑 크게 차이 안 나는 마치 커터와 같은 공이 나왔다.

그래서 커터를 좀 연습해봤더니 구속이 아주 조금 빠른 대신 각이 밋밋한 공이 나와 버렸다.

뭐, 속구랑 섞어 쓴다고 해도 차라리 고속 슬라이더를 던지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은 공이 나온 셈이다. 근데 나는 이게 의외로 앞선 고속 슬라이더랑 섞이면 진짜 타자로서는 짜증이 나는 공이 될 것 같다는 '작은 조언'을 했다.

하민이 형은 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그 결과 지금 재규어스의 타선은 크게 엿을 먹었다.

근데 그렇게 재규어스 타선에 엿을 먹인 하민이 형의 표정은 웬일인지 썩 좋지 못했다. 선발로 출장한 투수는 좀 예민해지는 탓일까? 경기 전까지만 해도 헤실거리며 웃던 하민 형이 투수용 점퍼를 걸친 채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딱!!!

아, 그냥 저 점퍼는 굳이 걸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표정이 안 좋았던 거구나.

3회 말.

점수는 여전히 0:0

마린스 타선이 깔끔하게 삼자범퇴로 물러났다.

‘이거 역시 대타 어필이라도 해야······.’

경기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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