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데뷔전?(6)
첫 번째 이닝을 진행하면서 나는 투수 놈들이 왜 그렇게 또라이처럼 구는지를 알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사회는 규칙에 의해서 돌아간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 서로가 그 규칙이라는 것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서 돌아간다.
그리고 그 규칙이라는 것은 법전에 글자로 적힌 것들도 있지만 그것 말고 믿음으로 가는 것들도 참 많다. 예컨대 탕수육 소스는 물어보고 부어야 한다든지, 절친의 전 여친은 결혼할 각오가 아니면 꼬시면 안 된다든지, 한국의 수도는 서울이라든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들 가운데는 야구에서 '투수는 공을 던지고 타자는 공을 친다.'라는 아주 심플한 믿음도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없다면 사실 타격은 말이 안 되는 짓이다.
저 멀리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투척 무기를 든 녀석이 있는 그 녀석이 그걸 그냥 옆에 가죽장갑 안에 던져 넣을 거라고 확신하고 방망이를 휘두른다? 그 말이 안 되는 짓이 성립되는 것은 바로 믿음. 서로가 그것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 만약 이런 생각이 든다면?
‘만약 저 새끼가 저걸로 내 대가리를 박살낼 수 있는 충분히 미친 놈이라면?’
과감하게 홈플레이트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슬쩍 위축된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용감한 놈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고 있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각인된 이상 그런 일은 어지간해선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도 몸이 알아서 긴장한다.
그리하여 단 0.01초의 망설임. 혹은 긴장감.
고작 0.35초 안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타격에서 그것은 매우 치명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긴장을 아주 적절하게 활용하여 두 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투아웃에 주자 1루.
타석에 엘리츠의 4번 타자 라찬명이 들어왔다. 올해 나이 35세.
마린스에 이규만이 있다면 엘리츠에는 라찬명이 있다. 그는 엘리츠를 대표하는 타자로 몇 년 전에는 메이저리그에도 3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성적은 조금 처참했다. 한국에서 9년 동안 평균 wRC+가 131에 진출 직전 해에는 무려 149를 기록했던 타자가 미국에서 3년 동안 평균 wRC+평균 87에 불과했었으니까.
하지만 엘리츠로 복귀 이후에는 내가 바로 라찬명이다 라는 것을 증명하듯 매년 120후반에서 130초반을 오가는 wRC+를 기록했으며 특히 FA로이드를 빨았던 작년에는 34세의 나이로 153이라는 커리어하이를 기록하며 4년 90억에 재계약 도장을 찍었다.
조금은 무성의해 보이는 타격 자세.
사실 라찬명은 수비도 그렇고 타격폼도 그렇고 뭔가 귀찮은 듯 설렁설렁한 자세이기는 하다. 젊었을 적에는 저것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다고 들었다. 뭐 16년이나 저런 자세로 플레이를 해온 탓에 이제는 그냥 특징 정도로 여겨지고 있긴 했지만.
그의 눈이 날카롭게 나를 살폈다.
뭐 팀의 리더로써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해야겠다 그런 마음이겠지.
하지만······.
-딱!!!
높게 솟은 파울볼이 일루 쪽 내야 관중석을 때렸다.
확실히 힘 있는 타구. 그러나 조금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라찬명은 저 성의없는 타격폼과 수비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다 유명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가 극단적인 배드볼 히터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MLB 생활을 제외한 커리어 평균 타율은 3할 2푼에 가까운데 출루율이 3할 7푼이 채 되지 않는다. 거의 뭐 대충 존 근처만 와도 다 후려 갈긴다는 뜻인데 워낙에 손목 힘이 좋아서 그게 또 안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방금도 제법 많이 빠지는 공이었는데 그걸 꾸역꾸역 두들겨 내야 관중석 깊숙한 곳까지 찔러 넣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두 번째.
커맨드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많이 빠지면 어쩔 수 없지라는 느낌으로 빠르게, 더 빠르게 공을 뿌렸다.
156.9km/h
아까 강소구에게 던진 빈볼 이후로 가장 빠른 공이었다.
하지만 좀 많이 빠졌다. 이건 아무리 라찬명이라도 거르겠지 싶은 그 순간.
-딱!!!
라찬명이 멋지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다만 여기서 또 놀라웠던 점은 그렇게 빠지는 공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3루 파울라인에 근접하게 날아가다 원정팀 불펜 끄트머리에 공이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이건 만약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면 안타가 될지도 모르는 공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 번째.
라찬명의 눈동자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의지가 가득했다. 앞선 2번 타자가 슬로우 커브로 물러나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라면 쳐낼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사실 저건 절대 자신감 과다가 아니다.
저 인간 실제로 원바운드된 공을 두들겨 가끔 내야를 넘기는 인간이다.
똑똑히 기억난다. 지금으로부터 1년 후, 그러니까 저 인간 나이 서른 여섯에 그걸로 결승타를 쳐서 엘리츠를 결국 10년 연속 가을 야구 진출에 성공시켰었다. 그때 결승타 맞은 상대가 우리 팀이었는데 투수가 나중에 술 먹고 울더라. 무슨 크리켓도 아니고 원바운드 공을 쳐서 내야를 넘기는 게 어딨냐고.
아무튼 120km/h남짓한 슬로우 커브 따위는 얼마든지 보고 쳐낼 수 있다는 그 강렬한 자신감 앞에서 내가 커브를 준비했다. 아, 물론 상대방이 원하는 공을 던져 좌절시키는 것으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완벽하게 짓밟아주려는 의도였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솔직히 내가 방망이를 들고 서 있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았겠다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방망이를 든 내가 메이저 명전 직행급 타자라면 마운드에 선 나는 아직 더블A 레벨에 불과하다.
뭐, 열아홉에 신인에 하위 싱글A부터 싱글A까지 다 건너뛰고 더블A 레벨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사기급인 건 맞는데. 솔직히 서른다섯 살 노장이 17년이나 회귀해서 이 정도 수준이면 이건 그냥 나쁘지 않은 수준이라고 봐야겠지.
아무튼 세 번째.
커브.
나의 손끝에서 야구공이 빠져나갔다.
앞선 슬로우 커브들과는 조금 다른 궤적으로.
***
라찬명이 공을 노려봤다.
솔직히 그는 공을 구분하는 데 그리 크게 소질이 없었다. 스윙에 제대로 힘을 싣지 못했고 어떻게든 공을 방망이로 두들기기 위해 어깨도 조금 일찍 열리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런 스타일로 프로에서 살아남았다. 그것도 프로 최정상급의 타자로 말이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날아드는 공을 노려봤다. 볼카운트 0-2.
지금까지 패턴을 봤을 때는 커브다. 하지만 뭐 커브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어쨌거나 홈플레이트를 지나기만 하면 된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날아온다.
궤적이 다른가? 모르겠다.
속도는? 글쎄? 뭐 좀 빠르다.
그러면 커브는 아닐 거다. 그러니 방망이를 휘두른다.
‘어?’
그리고 그렇게 이미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 그 순간.
묘했다. 조금 전 두 개의 속구보다 공이 오는 속도가 늦다. 그리고······. 공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스플리터? 포크볼? 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떨어지는 공이다.
방망이를 완전 멈추는 건 늦었다.
그의 몸이 뒤틀렸다.
하지만 익숙했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배드볼 히터. 어떻게든 공에 방망이를 가져다 대는 능력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깊었다.
낙폭이 너무 깊었다.
몸이 휘청인다. 궤도가 틀어진다. 아직이다. 포기는 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공을 향해 방망이를 휘두른다.
-부웅!!!
“스트라잌!!”
휘청하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방망이는 허무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헛스윙 삼진.
투아웃 주자 1루 상황에서 헛스윙 삼진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이닝이 끝나야 하는 상황. 1루 주자인 강소구가 달리기 시작했다. 또한, 마스크를 벗은 한교철이 서둘러 뒤로 빠진 공을 향해 달려 나갔다.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
라찬명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1루를 향해 뛰었다.
몇 년 전 수술을 했던 무릎이 조금 시큰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1루까지 도착해야 한다. 그리고 그사이 뒤로 달려나간 한교철이 마침내 빠진 공을 주웠다.
강소구는 본래 빠른 주자였다. 아마 그의 허벅지가 정상이었다면 진즉에 3루에 도착했을 터. 하지만 앞서 158.7km/h짜리 공에 허벅지를 맞은 영향일까? 그의 몸이 조금 느렸다. 발이 느린 라찬명이 1루에 도달했지만 그는 아직 3루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것을 본 한교철이 3루를 향해 빠르게 공을 뿌렸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뻐엉!!
심판의 손이 올라왔다.
“세이프!!”
투 아웃 주자 1루 상황에서 헛스윙 삼진을 잡았더니 투 아웃 주자 1, 3루가 된 마법과도 같은 상황.
당연히 사직은 끓어올랐다.
“마!!!!”
“한교철이 니 도랐나.”
“포수 점마 저거, 불법토토한 거 아이가? 수비가 와, 마 완전 또라이네.”
[아······.]
아직도 경기는 1회 초.
초구 158km/h짜리 몸에 맞는 공부터 선수들이 휙휙 날아다니는 아메리카식 벤치 클리어링. 그리고 투수가 삼진만 세 개를 잡았음에도 투아웃에 주자 1, 3루가 되는 상황까지.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의 총집합에 캐스터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직에서의 개막전 시리즈 3차전. 이것 참······. 보기 힘든 광경들이 연속으로 펼쳐지는군요.]
[방금 저건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인거죠?]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투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타자가 헛스윙을 했지만 포수가 정규포구를 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일인데요. 1루가 비어 있거나, 혹은 지금처럼 1루가 채워져 있어도 투아웃 상황에서는 가능한 규칙입니다. 이 경우 타자는 1루로 진루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는데 지금처럼 공이 멀리 튕겨 나가면 저렇게 살아나는 경우가 나옵니다.]
[오늘 최수원 선수. 투수 데뷔전에서 참 많은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교철 포수도 상당히 미안하겠네요. 이거 두 선수 모두 정신을 단단히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최수원 선수. 초구로 사구를 던졌습니다만 이후로 배짱 두둑하게 좋은 피칭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거 참 곤란하게 됐습니다. 득점권에 주자도 나갔고 사실 포수가 공만 제대로 잡았으면 이닝이 끝난다는 상황에서 이렇게 되면 멘탈이 흔들릴 수밖에 없거든요.]
마운드의 최수원이 가볍게 호흡했다.
포수마스크 아래 얼굴이 벌게진 한교철이 마운드를 향해 걸어오는 찰나, 그가 손바닥을 내밀어 그를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게임 빠르게 진행하시죠.”
허리를 숙여 로진백을 두 차례 툭툭 매만졌다.
포수가 새로 받은 공을 바로 투수에게 건네려는 그 순간 최수원이 3루를 향해 손짓했다. 비록 아웃카운트는 잡지 못했어도 삼진이었다. 3루에서 유격수로 유격수에서 2루수로 그리고 일루수인 이규만을 거쳐 다시 최수원에게.
평소 삼진을 잡았을 때와 똑같은 루틴으로 그에게 공이 돌아왔다.
[그래도 현재 아웃카운트는 두 개. 희생플라이 같은 걸로 점수를 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최수원 선수 침착하게 잘 막아내면 됩니다.]
오늘 경기의 캐스터 이주형도 자기가 하는 말이 참 공허하다고 느꼈다. 10년 차 베테랑이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를 터인데, 이틀 전에 빈볼 맞았다고 선두타자한테 대뜸 빈볼을 꽂아버리는 다혈질 신인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진정을 할 수 있을까.
마운드의 최수원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짜증? 분노?
당연히 아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리고 최수원은 분노를 그득 담아 한교철의 손바닥을 터트려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공을 뿌렸다.
-뻐엉!!
“스트라잌!!!”
2027년 현재, KBO에서 강속구의 기준은 여전히 150km/h였다.
MLB에는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를 넘어 시즌 평속이 100마일을 넘어가는 괴물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KBO에서 공인된 토종 투수 역대 최고 구속은 브레이브스의 마무리 손영진이 기록한 159.6km/h다.
그리고 지금.
전혀 뜬금없는 이 타이밍에 그 기록이 깨졌다.
160.1km/h.
분명 스트라이크 존의 한복판 살짝 높은 코스로 지나갔음에도 타자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전광판에 갑작스래 찍힌 그 숫자에 사람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최수원은 고등학교 시절 157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던 투수 유망주다. 하지만 4월 초에 실전에서 갑자기 대뜸 160을 던지는 건 이야기가 좀 다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하거나 말거나 최수원은 분노의 피칭을 이어갔다.
-부웅!!!
“스트라잌!!!”
존에서 상당히 벗어나는 159.4km/h의 속구.
볼카운트 0-2.
여기서 지금까지 패턴은 커브로 공을 하나 빼는 것이었다. 엘리츠의 5번 타자가 마음 속으로 그것을 기대하며 타석에 섰다.
그리고 세 번째.
-뻐엉!!!
“스트라잌!! 아웃!!!”
159.3km/h.
이번에도 존의 복판을 통과하는 강속구.
최수원이 1회 초 네 번째 삼진을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괴물!! 그저 괴물!! 데뷔전 2홈런 타자 최수원, 투수 데뷔전에서는 구속 160km/h 돌파!! 5.2이닝 11삼진 무실점!!]
[라찬명 MoM 인터뷰 ‘실로 무서운 신인의 탄생. 이번 시즌 마린스는 쉽게 볼 수 없을 듯.’]
[마린스 3차전 5:3 석패. 아쉬운 루징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