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18화 (118/305)

118화. 데뷔전?(5)

경기장이 순간 고요해졌다.

[어······. 네······. 그러니까 최수원 선수. 초구, 몸에 맞는 공입니다.]

[······.]

바로 며칠 전.

지금 강소구가 자신의 허벅지를 붙잡고 쓰러진 저곳에서 최수원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당시 사직 구장은 그야말로 온갖 욕설과 야유로 가득 찼었다.

그나마 쓰레기가 구장에 투척 되지 않은 것은 그동안 조금은 성숙해진 시민의식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재작년 꼴찌 확정되고 패트병 던진 팬이 구장 내 설치된 카메라에 잡혀 영구 출입금지 처분을 받은 영향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데뷔 타석에서 2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던 이 대단한 타자가 그렇게 뜬금없는 사구를 맞았을 당시 아무도 오늘과 같은 광경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데뷔전 첫 타석. 그것도 개막전에서 작년 최동원상 수상 투수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때려낸 신인이다. 그런 충격적인 데뷔전에서 사구를 맞았는데, ‘아 쟤 사실 투수고 모레 선발로 나올 거임.’이라는 것까지 생각이 미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경기가 끝난 이후에야 커뮤니티 등에서 알음알음 이야기가 퍼지기는 했다.

─84층사람있어요: 근데 오늘 사구 그거 완전 고의 아님? 제이크 보어 걔 제구 졸라 잘하잖아. 어디 인터뷰에서인가? 걔가 몸에 맞추는 공은 거의 100% 작정하고 던진 공이라고 그러던데.

─롤렉스좀가져가: 고의면 뭐 어때서. 최수원이 좀 까불었잖아. 신인이 그렇게 굴면 한 방 맞는 거지 뭐.

─사직아재: 쌉소리 ㄴㄴ함. 무슨 씹선비도 아니고. 요즘 야구 하는데 배트 플립이나 세리머니 조금 한다고 빈볼 맞추는 게 정상임?

─푸른피의에이스: 제이크 보어가 좀 씹선비 기질이 있긴 하지.

─84층사람있어요: 아니, 근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니라 최수원 쟤 투수잖아.

─롤렉스좀가져가: 투수인데 뭐? 보직이 투수면 까불면 맞추면 안 됨? 투수 맞추면 안 되는 불문율은 그 투수가 오늘 경기에 던지니까 그런거고. 걘 오늘 투수로 나온 것도 아니잖아.

─84층사람있어요: 아니, 맞추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최수원 걔 157까지 던지는 투수라니까?

─롤렉스좀가져가: 아······.

***

야구에 있는 몇 가지 불문율 가운데 투수 타자에게는 빈볼을 던지지 않는 것이 있다. 몇몇 사람들은 이것에 대하여 공을 던지는 투수의 몸을 생각해서 투수에게는 빈볼을 던지지 않는다. 혹은 보복구를 던지지 않는다. 라고 오해한다.

절대 아니다.

메이저리그의 긴 역사를 통틀어 빈볼의 숫자가 한순간 크게 증가했던 일이 두 번 있다.

첫 번째는 아메리칸 리그에서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하여 투수가 타석에 들어가지 않게 된 이후. 그리고 두 번째는 투수가 고의로 타자를 맞히려고 공을 던졌을 경우 ‘양팀’에게 경고를 주고, 그 직후 ‘어느 팀’이건 투수가 타자를 고의로 맞히면 ‘그 팀’의 투수와 감독을 퇴장시킨다는 보복구 금지 규칙이 생긴 직후였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투수는 자기가 타석에 서지 않아 공에 맞을 위협이 사라지면 빈볼을 더 쉽게 던진다는 것이며, 이것을 반대로 해석하자면 자기가 타석에 서서 공에 먼저 맞은 투수는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엘리츠와 마린스의 3차전.

엘리츠의 선두타자인 강소구는 아득한 통증 속에서 며칠 전에 1루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괜히 까불다가 그게 무슨 꼴이냐.”

“아······. 그러게요. 사람이 조심을 좀 해야 할 텐데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주어 서술어 모두 이상한 느낌이기는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 바닥은 국어 시간에 잠자느라 수업 안 들은 부작용으로 한국말 똑바로 못하는 한국인이 한, 둘이 아니다. 그냥 최수원도 그런 놈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건 강소구 자신을 향한 경고였다. 괜히 되지도 않는 협박 하지 말고 강소구 자신이나 조심하라는. 즉, 이건 명백히 고의적인 사구다.

화가 끓어올랐다.

다리에 통증을 생각하니 그 화는 더 커졌다.

그리고 마운드의 최수원을 바라봤다.

보통 한국에서 실수로 사구를 던지면 둘 중 하나다.

타자보다 짬밥이 되는 투수라면 미안하다는 눈짓 정도 해주는 거고, 타자보다 짬밥이 안되는 투수라면 모자를 벗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최수원은 둘 다 아니었다.

삐딱한 자세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자세가 절대 아니다. 굳이 저 자세를 말로 표현하자면 ‘덤빌 테면 덤벼봐라.’에 더 가깝다.

‘저 어린 노무 새끼가.’

강소구가 엘리츠의 덕아웃을 힐끔 바라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하긴, 짬밥도 안되는 놈이 사구를 던져놓고 저딴 태도라면 자신이라도 부글부글 끓어오를 것이 분명하다.

강소구가 결정했다.

실력 좀 믿고 나대는 저 어린 노무 새끼를 이번 기회에 한번 꾹 눌러주기로 말이다.

강소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헬멧을 옆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마운드를 향해 절뚝절뚝 달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그런지 속도가 붙지 않았다.

마운드에 선 채 그것을 빤히 바라보는 최수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새끼가 웃어?’

본래 한국의 벤치클리어링이란 얼굴을 맞대고 핏대를 좀 올려주면서 큰 소리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국룰이다. 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면 주먹질을 해도 무죄다.

강소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그의 키는 178센티에 불과했고 마운드 위의 최수원은 190이 넘어갔기에 주먹을 휘두르려면 조금 높은 지점으로 휘둘러야겠지만. 그리고 진짜로 1:1로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이 바닥 선배의 권위와 허벅지의 통증. 그리고 그를 따라올 엘리츠 선수들의 든든한 지원이 그에게서 두려움을 앗아갔다.

야수의 심장으로.

절뚝이며 달려간 강소구가 움켜쥔 주먹을 치켜드는 바로 그 순간.

-쾅!!!!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수염투성이의 거한.

미국에서 건너온 194cm에 110kg의 거체가 마치 덤프트럭처럼 달려와 강소구의 몸에 충돌했다.

그리고 강소구의 몸이 부웅 날았다.

그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E$^%@#$%!!!!”

여유로운 자세로 카운터를 준비하던 최수원의 얼굴에도 당황이 떠올랐다.

이게 맞나? 하는 마음으로 강소구를 따라 마운드로 향하던 엘리츠의 선수들 역시 주춤주춤 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예의와 범절이 함께하는 KBO의 벤치클리어링이었다.

기본적으로 엘리츠와 마린스는 엘꼴라시코 동맹으로 뭉쳐진 나쁘지 않은 관계의 형제팀이었다. 분명 적당하게 '신인이 너무 까불었다. 앞으로 그러지 말자.' 하는 식으로 대화를 나누면 충분했을 터였다. 그러니까 그제 빈볼을 맞고도 별 대응 없이 넘어간 것이었을 테고.

하지만 현실은 생각과는 달랐다.

194cm의 덤프트럭이 가장 앞에서 달려 나오던 엘리츠 선수 둘을 습격했다.

기본적으로 야구 선수는 일반인에 비해서 크다. 단순히 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야구를 레저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바로 옆에서 선수를 보면 그 몸집의 크기에 놀라며 뼈대 자체가 다르다고 느낀다. 그리고 지금 그 뼈대 자체가 다른 선수들이 힘없이 끌려왔다.

사직의 봄.

그렇게 엘리츠 선수들은 벚꽃잎처럼 흩날렸다.

***

[아, 네. 시청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잠시 경기장에 소란이 있었습니다.]

[이게 참······. 분명 벤치클리어링은 야구의 한 요소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런 식의 폭력적인 사태는 프로야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영 좋지 못하거든요. 어린이 팬들도 참 많이 보러 왔는데요. 선수들 자중해야합니다.]

[지금 경기장이 정리되고 있습니다. 심판들이 이번 벤치 클리어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네요.]

“빌어먹을 새끼들. 아주 더 조져버렸어야해.”

“워워, 딜튼 진정해. 네가 이미 충분히 조져놨어. 저기서 더 조지면 그건 살인이라고.”

“망할 놈들 같으니. 그래, 1차전의 빈볼이야 그렇다고 치자고. 하지만 정당한 보복구에 벤치 클리어링이라니. 대체 어떻게 배워먹었길래 쯧······.”

솔직히 놀랐다.

물론 딜튼이 투수답게 좀 크고 두툼하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잘 싸울 줄은 몰랐다. 무슨 사람을 잡고 그대로 내동댕이치는데 엘리츠 애들은 겁 먹고 슬금슬금 물러나고, 오히려 우리쪽 선수들이 딜튼에게 붙어 진정을 시켜야 할 정도였다.

“중학교까진 레슬링도 야구랑 같이했었어. 그땐 주 대표로 전국대회까지 나갔었지. 1차전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뭐, 어쨌거나 덕분에 내 재능의 한계를 일찌감치 깨닫고 야구에 전념할 수 있었어. 게다가 레슬링이 올림픽에서 퇴출당하기도 했었고. 근데 나중에 나한테 그 벽을 느끼게 했던 놈이 파리에서 금메달을 따더라고. 미리 알았으면 그냥 레슬링이나 계속 할 걸 그랬는데 말이야.”

“글쎄, 하는 거 보니까 지금이라도 UFC로 전향하는 건 늦지 않은 선택인 것 같은데?”

[아, 다행입니다. 양팀 모두 일단 퇴장은 없습니다.]

[아마 경기 이후에 징계가 나오기는 할 것 같습니다만 일단 오늘 경기에 퇴장은 없네요.]

강소구가 주먹질을 했다면, 그리고 내가 거기에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면 동반 퇴장이 될 수도 있었지만 딜튼이 태클로 녀석을 날려버린 탓에 퇴장은 없었다. 만약 퇴장을 당했다면 데뷔전 첫 공으로 빈볼 하나 던지고 그대로 퇴장당한 투수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세울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아무튼 딜튼, 고마워.”

“고맙기는. 팀원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끝나고 밥이나 한 끼 같이 하자.”

“좋지. 하민이랑 유진도 같이?”

“응, 그러자. 내가 승리 기념으로 한턱 쏠게.”

“공 하나 던지고, 그것도 타자한테 맞춰서 1루에 내보내놓고 벌써 승리 기념이라고? 그건 너무 이른 거 아니야?”

“글쎄? 그럴까?”

“쯧, 하여간 루키라면서 귀여운 맛이 없다니까. 난 그래도 프로 첫 마운드는 감회가 달랐는데 말이야. 아······, 하긴. 이미 타자로 경기를 소화했으니 꼭 그렇지도 않으려나?”

“프로 첫 마운드?”

글러브를 챙겨 다시 마운드로 향했다.

경기가 시작됐던 2시쯤만 하더라도 구름이 낀 날씨였는데 고작 몇 분 사이에 구름 사이로 슬쩍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마치 마운드 위로 햇볕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뭐, 제법 멋은 있었다.

솔직히 조금 전까지는 빈볼을 던져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머릿속이 가득했던 탓에 프로 첫 마운드라는 감정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떠냐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쏟아지는 환호성 속에서 마운드 위의 로진백을 두어 차례 매만졌다. 그리고 오늘 포수마스크를 쓴 한교철이 나에게 공을 건넸다.

딜튼의 말처럼 물끄러미 공을 바라보며 프로 첫 마운드라는 감정을 좀 느껴보려고 했는데 글쎄?

이미 빈볼 하나를 던진 탓일까? 아니면 알맹이가 프로에서 15년을 뛴 서른넷의 노장이라서일까? 아무리 감상에 젖어보려고 해도 솔직히 아무런 감정이 올라오지 않는다.

몇 개의 연습구.

1회 초.

노아웃에 주자 1루.

경기가 재개됐다.

엘리츠 타자의 표정과 자세를 읽었다.

보통 이런 식의 제대로 된 벤치 클리어링을 하고나면 선수들이 보이는 반응은 둘 중 하나다. 투지로 이글이글 불타던지, 아니면 겁에 질려 위축되던지.

그리고 지금 타석에 들어온 타자는 후자였다.

그렇다면 정답은 몸쪽 깊숙한 코스.

딱 붙었다가 맞으면 나도 어쩔 수 없다. 맞고 뒤져라 볼이다.

-뻐엉!!!

타자가 흠칫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스트라잌!!!”

전광판에 156.1이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와, 이거 타자들 진짜 무섭겠는데요? 최수원 선수. 초구로 빈볼을 날린 효과를 확실히 보고 있습니다. 솔직히 아무리 겁이 없는 타자라도 자기 몸으로 158짜리 공이 날아오면 움찔 할 수밖에 없거든요. 이렇게 되면 타자는 홈플레이트에 붙어 설 수가 없어요.]

-뻐엉!!!

“스트라잌!!!”

[자, 말씀드리는 순간!! 154.4km/h의 빠른 공!! 스트라이크입니다!!]

[보세요. 말씀드린 것처럼 저렇게 홈플레이트에서 떨어지면 바깥 코스 공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하지만 정말 대단하네요. 최수원. 진짜 괴물입니다. 사실 안쪽이니 바깥쪽이니 그걸 구분해서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흔치 않거든요. 근데 이걸 오늘 데뷔하는 투수가 해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155 전후의 강속구를 뿌려가면서요.]

[자, 볼카운트 0-2 최수원. 세 번째!!]

삼진까지 이제 하나.

타자의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그렇다면 답은 뻔하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121km/h의 슬로우커브.

데뷔 첫 번째 아웃카운트는 삼구삼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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