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17화 (117/305)

117화. 데뷔전?(4)

불과 몇 분 전.

“헤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나는 에이스로 이 팀에 온 게 아니었나? 그런데 1사 1, 3루에서 5.1이닝을 완벽하게 막아내던 에이스를 내린다고?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짓인가?”

마운드 위에 그를 교체하기 위해 올라왔단 투수 코치에게 강력하게 어필했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는 1실점.

이닝이 끝나는 것까지 지켜 본 딜튼은 이대로 덕아웃에 있으면 좋지 않은 짓을 할 것 같은 예감에 화장실로 들어와 아이스팩을 감지 않은 한쪽 팔로 거칠게 얼굴을 씻어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차가운 물로 몇 차례나 연거푸 얼굴을 씻어냈지만 그럼에도 딜튼 도일리의 벌겋게 상기된 얼굴은 쉽게 돌아오지 못했다.

“!#@$%!#$%!”

한바탕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제서야 가슴에 치밀었던 울화가 조금은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래, 마린스는 승리가 간절한 팀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아직 딜튼 자신은 보여준 것이 적었고, 오늘 비록 무실점이기는 했지만 도미넌트한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게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뇌며 자신을 달랜 딜튼이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덕아웃으로 향했다. 팀의 승리 투수로 덕아웃에 앉아 남은 경기를 지켜보는 것 역시 에이스가 가져야 할 미덕이다.

그리고 그가 복도를 지나 다시 덕아웃의 문을 통과하는 바로 그 순간.

“shit pal?”

딜튼은 자신도 모르게 최근 배운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마린스의 유격수 강라온은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매우 강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매우 이상했다.

아니, 프로 선수를 지망한다면 승부욕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승리를 향한 집념. 그것만큼 프로다운 것이 또 어딨겠는가.

처음 드래프트에서 마린스에 뽑혔을 때 강라온이 가졌던 목표는 ‘영웅’이 되자는 것이었다. 그래, 28년째 우승을 못 하는 구단을 우승시키는 것도 나름 로망이 있는 일이겠지.

그리고 7년.

지금 강라온의 목표는 마린스 탈출이었다.

물론 그 두 가지 모두 강라온이 해야하는 일은 다르지 않았다.

마린스가 우승하기 위해서는 그는 좋은 선수가 돼야 한다.

마찬가지로 마린스를 탈출하기 위해서도 그는 좋은 선수가 돼야 한다.

FA까지는 이제 2년.

그가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세 번째 타순에서 마침내 터진 강라온의 안타.

내야를 훌쩍 넘기는 타구에 강라온이 빠르게 달렸다. 1루까지는 이제 몇 걸음 남지 않은 상황. 2루도 가능할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1루 주루 코치가 그를 멈춰 세웠다.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살짝 아쉬운 지시.

강라온은 항상 이런 것이 아쉬웠다. 20%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돌아오는 것은 없다. 그리고 마린스는 항상 그 20%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그게 공격이건, 수비건.

타석에 이정훈이 들어왔다.

그에게 종종 술을 마시자고 권하는 선배다. 뭐 이야기는 제법 잘 통한다. 그 역시 마린스를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해가 안 됐던 부분은 그런데 왜 마린스에 남았냐 하는 부분이었다. 서울에서 제시한 금액이 총액으로 5억 정도 적었다고는 하지만 강라온 자신이라면 10억이 적어도 무조건 마린스를 탈출했을 텐데 말이다.

“수원아. 이번에는 1타점으로 만족 해야 할 것 같다.”

“설마 병살타 치시려고요?”

“홈런. 인마, 홈런. 지금 타이밍에 이런 멘트면 당연히 홈런 치고 돌아온다는 소리지.”

“아······.”

“이 새끼······. 너 갔다 와서 보자.”

초구 빠른 공.

이정훈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투심이었다.

-딱!!!

완벽하게 먹힌 타구.

그것으로 마치 교과서에 나올 것처럼 전형적인 형태의 6-4-3병살이 완성됐다.

“······.”

자신이 내던졌던 방망이를 조용히 주워든 이정훈이 최수원의 눈을 피한 채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둥둥둥둥둥

응원석은 아니었다.

누군가 팬이 가져온 거대한 북소리가 분위기를 고양시켰다.

개막전이자 데뷔전.

첫 타석부터 전년도 최동원상 투수에게서 2연타석 홈런으로 3타점을 뽑아낸 신인. 심지어 그 투수는 지금까지 딱 4개의 출루만을 허용했을 뿐이다.

서서히 고조되는 긴장감.

그 분위기 속에서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강하게 공을 뿌렸다.

정확하게 최수원의 몸을 향해서.

-뻐억!!!

***

150으로 날아오는 야구공에 맞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진짜 뒤지게 아프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이 아프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행운이다. 어디 엄한 곳에 맞으면 진짜 한순간 정신이 나간다. 가끔 머리나 얼굴만 안 맞으면 괜찮지 않냐는 놈들이 있는데 몸통, 특히 갈비뼈 쪽을 잘못 맞으면 그대로 늑골이 나가고 폐에 좌상을 입거나 피가 차기도 한다.

150km/h가 넘는 야구공에 맞는다는 건 그런 뜻이다.

나도 모르게 악소리가 올라왔다.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어마어마한 통증. 그 와중에 드는 생각은 그래도 꼰꼰한 인간이라 그런지 빈볼도 매너가 있긴 하네. 라는 생각이었다.

혹시 실투 아니냐고?

그럴 리가.

제이크 보어는 한계까지 쥐어짜내 공을 뿌릴 때도 스트라이크 존 안에 공을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괜찮은 커맨드를 자랑하는 투수다. 정확하게 내 허벅지를 때린 이 공은 분명 노린 공이다.

배트를 뒤로 살짝 던져놓고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를 한 번 강하게 노려봤다.

혹시나 우리 덕아웃에서 선수들이 뛰어나오면 적당히 말려줘야지 생각했는데 이 새끼들. 아무도 안 뛰어나온다. 살짝 소란이 있긴 한데 아무튼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 뭐 허리 위로 맞은 것도 아니고 허벅지 정도인데 그럴 수 있다. 물론 내가 지금 데뷔전이자 개막전에서 2타석 연속 홈런 중인 신인 타자였지만 그에 관한 비난이야 오늘 경기가 끝나면 각종 뉴스들과 인터넷의 네티즌들이 알아서 해줄 터.

1루를 향해 가볍게 달렸다.

허벅지를 타고 욱씬한 통증이 올라왔다. 경험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거 최소 6주는 가는 피멍이다. 그나마도 젊은 몸이라 회복이 빠르니 6주다. 30대에 맞았으면 8주짜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뚝거리지는 않았다.

남자의 자존심이다. 네깟놈이 던진 빈볼따위 나를 절뚝거리게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재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첫 번째 타석이랑 두 번째 타석에서 내가 살짝 했던 세리머니가 마음에 안 드셨다 뭐 그런 소리겠지.

이규만이 콧김을 내뿜으며 타석에 들어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그리고 다리 아픈 후배가 혹시라도 뛰면 아픈 다리가 더 아파질까 봐 삼진으로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 지어주었다.

“스완!! 저 새끼 저거 표정 봤어? 저거 100% 일부러 맞힌 거라고. 내가 세수하고 나오면서 똑똑히 봤어.”

“진정해요 딜튼.”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게다가 내가 당장 나가서 죽탱이를 갈기려고 했는데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나를 잡았다고.”

“그냥 허벅지잖아요. 허리 위쪽이었다면 아마 선배들도 안 잡았을 거에요.”

아까 덕아웃이 조금 시끄러웠다 했더니 아무래도 딜튼이 달려 나올 생각이었던 것 같다. 순수하게 빈볼에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무실점인데 주자 1, 3루라고 강판당한 거 화풀이도 좀 하고 싶었던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이 정도로 벤치 클리어링까지는 좀 오버다.

“젠장. 내가 아직 마운드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바로 한 방 때려 박아줬을텐데. 망할 새끼들. 스완, 내가 우리 투수에게 이야기할게. 저쪽 아까 적시타 쳤던 타자에게 한 방 제대로 꽂아달라고.”

“워워, 괜찮아요. 괜찮아. 우리가 이기고 있잖아요. 분위기 좋은데 괜히 저쪽 단합하게 해주지 말고 그냥 깔끔하게 승리만 챙겨 오자고요. 오케이?”

“하······. 스완. 저런 놈들에게는 나이스하게 해주면 안 돼. 그러다 괜히 만만하게 본다고.”

“알았어. 근데 나중에. 일단 오늘은 이기고 보자. 응? 나 수비하러 나가야 하니까 이따 끝나고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오케이?”

나의 이야기에 딜튼이 뚱한 얼굴로 돌아앉았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얘가 왜 한국에서 실패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성격이 불같다.

3:1.

경기가 계속됐다.

6회 초, 원아웃에 올라온 한명훈이 7회 초까지 던졌다. 4.11에 6승 11패짜리 선발은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별 건 맞다. 특히나 그가 던진 팀이 마린스라면 더더욱 그렇다.

기본적으로 투수는 잘던지는 순으로 5선발까지 짜르고 나머지가 불펜을 뛴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에 사실상 3선발로 뛰었던 한명훈이 불펜으로 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물론 더 말이 안 되는 건 6승 11패 짜리가 3선발이었다는 점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한명훈은 7회를 무실점으로 잘 막아냈다.

그리고 8회와 9회. 마린스는 평소처럼 팬들에게 경기가 끝날 때까지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볼 수 있는 쫄깃함을 선물해줬다. 물론 보통이라면 거기에다가 보너스로 폭음을 할 수 있는 변명거리인 ‘역전패’라는 것을 덤으로 얹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늘은 조금 달랐다.

통상적인 마린스의 패턴이 9회에 동점을 허용하고 연장에서 역전패를 당하는 것이었다면 오늘 마린스는 무려 8회 말에 2점이나 더 추가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마린스 개막전 5:2 승리!!]

[10할 타자!! 괴물 신인의 탄생!! 최수원 데뷔전 4타석 2타수 2안타 2홈런 1사구 1희생플라이 4타점!!]

[개막전 4타수 무안타 미스터 마린스의 안타까운 성적표]

경기가 끝난 직후.

예상했던 것처럼 당연히 언론부터 내 주변까지 모두 난리가 났다. 다만 내 예상과 조금 달랐던 점은 제이크 보어의 빈볼은 크게 화제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내 데뷔가 워낙에 센세이셔널했던 탓이었다.

아,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 딜튼과 밥을 먹으러 가지는 못했다. 구단에서 병원에서 제대로 검진을 받아보기를 권유한 탓이었다. 나도 마지막 타석에서 좀 불편한 느낌이 있었기에 기꺼이 그 권유에 응했다.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심한 타박상은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찜질 해주면서 며칠 냅두면 낫는 부상이었다. 뭐, 야구를 하다보면 이 정도 부상이야 일상 다반사다. 심각할 때는 뼈에 금이 간 상태로 시즌 남은 경기들을 소화한 적도 있었으니 그에 비하면 이건 부상도 아닌 수준이긴 했다.

-딱!!

[쳤습니다!! 최수원!! 최수원 선수가 오늘도 식지않는 불방망이를 휘두릅니다.]

다만 확실히 약간의 불편함이 있긴 한 탓인지 타격에 힘이 좀 덜 실렸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주말에 타격폼을 계속 체크해봐야할 것 같았다. 원래 이런식으로 몸이 불편하면 나도 모르게 폼이 조금씩 망가지기 마련인데 이런 건 조기에 잡아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엘리츠, 마린스와의 2차전 7:3 승리!!]

[마린스와 엘리츠의 3차전. 선발은 괴물 신인 최수원?]

[최수원 타자로서는 이미 역대급!! 과연 투수로는?]

그리고 마침내 3차전.

내가 기대하던 순간이 찾아왔다.

[자, 마린스와 엘리츠. 엘리츠와 마린스의 시리즈 3차전. 오늘 마운드에는 최수원 선수가 올라와있습니다.]

[최수원 선수가 최근 두 경기에서 타격으로 워낙 화제를 불러오고 있습니다만 사실 원래 최수원 선수가 유명해진 최초의 계기는 150의 강속구였거든요.]

[맞습니다. 이 선수 1학년 때 이미 150km/h를 던졌었어요. 자, 과연 오늘 투수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오늘 1번 타자로는 지난 두 경기에서 상당한 타격감을 보여줬던 강소구 선수가 올라옵니다.]

어제까지 2번을 치던 강소구가 선두타자라니 타순도 딱 좋았다.

와인드업.

그야말로 전신의 모든 힘을 응축하듯 극한까지 몸을 잡아당겼다.

기선제압.

그렇기에 로케이션보다 위력.

그리하여 지금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으로.

그리하여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가 풀려나는 것처럼.

나의 초구가 정확하게 내가 노리던 곳을 명중했다.

-뻐억!!

투수 최수원 프로 경기 첫 피칭.

158.7km/h

그리고 보복성 빈볼.

강소구가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허벅지를 움켜쥔 채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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