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데뷔전?(3)
제이크 보어가 타석을 노려봤다. 타석에 선 것은 1회 초에 홈런을 기록했던 애송이였다. 상당히 거슬리는 놈이다.
야구는 기본적으로 신사의 스포츠다. 물론 21세기의 새로운 세대라는 놈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바티스타나 하퍼 같은 녀석들이 전통을 부정하기도 하고 이렇게 역사가 짧은 리그에서는 종종 야구의 정신 대신 효율성과 흥행만을 중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야구는 신사의 스포츠였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그렇기에 고작 1년 차의 애송이라면 자신을 뽐내는 것 보다 상대를 존중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법이다.
특히 투수에게는 더더욱. 투수가 던지는 야구공에는 눈이 없는 법이니 말이다.
1:0에 주자 1루.
대기 타석에 서있는 타자는 그 이규만.
그가 KBO에 막 왔던 시절에 이규만은 이미 전성기가 지난 타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무서운 타자였다. 바로 직전 해에 0.301/0.438/0.471을 기록했었으니까.
하지만 1년
그리고 또 1년.
그리고 또다시 1년.
작년 이규만의 성적은 고작 0.222/0.296/0.418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제이크 보어는 이규만이라는 타자가 우습지 않았다. 저렇게 성적이 떨어졌음에도 순장타율은 여전히 0.194로 전성기 시절과 비교해 그리 부족하지 않다. 게다가 이규만이라는 타자가 사실상 2루타와 3루타가 불가능에 가까운 타자임을 생각해볼 때 저 순장타율을 만들어낸 것은 거의 다 홈런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고작 한 번이었다.
신입이 건방진 세러머니를 한번 했다고 대뜸 빈볼을 날린다? 기본적으로 KBO라는 리그는 빈볼에 굉장히 민감하다. 혹시라도 잘못돼서 머리 쪽으로 향하기라도 한다면 개막전 에이스가 4회에 바로 퇴장할 수도 있다. 신입에게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기에 패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력을 다해 삼진, 혹은 더블아웃으로 끝낸다.
제이크 보어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젊다기보다는 어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던 그 시절. 그는 최고 103마일짜리 공을 던졌었다. 그리고 작년 그가 던졌던 가장 빠른 공은 93마일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이 제이크 보어가 전성기의 구속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는 이제 103마일짜리 몰리는 공보다 93마일짜리 꽉찬 포심과 투심의 조합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물론 103마일짜리 공을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젖먹던 힘까지 끌어낸다면?
95마일. 아니 96마일. KBO를 기준으로 한다면 서너 명 남짓. MLB의 평균 조차 뛰어넘는 구속의 공을 던질 수 있다.
KBO를 평정했던 에이스 투수가 몸의 관절과 인대를 극한까지 비틀고 잡아당겨 하나의 공을 떨쳐냈다.
4월 초. 아직 몸이 완전히 올라왔다고 말하기 힘든 쌀쌀한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작년 그의 공식 기록인 150을 넘어서는 151.6km/h의 빠른 공.
심지어 투심이었다. 비록 그 로케이션이나 공의 무브먼트는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연습 때 던져본 공 가운데서도 최고 수준의······.
그리고 그 순간, 최수원의 몸이 아름답게 돌아갔다.
-딱!!!
***
이정훈의 몸이 세 걸음 하고 다시 반의반 걸음 정도를 더 나아갔다. 그의 발을 생각하면 리드폭 자체는 그리 넓지 않았다. 하지만 주루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 반의반 걸음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 상태, 그리고 그 마음에 따르는 몸의 균형이었다.
“정훈이, 오늘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냐? 너답지 않게.”
“이제 2년 남았으니 슬슬 또 열심히 해야죠. 이번에는 저도 대박 한 번 쳐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올, 각오가 아주 야무진데?”
최수원은 부정할 수 없는 장타자였다.
덕아웃에서야 홈런 한 방 더 치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오늘 투수가 누구던가.
제이크 보어.
작년의 최동원상 수상자다. 물론 그가 작년 KBO 최고의 투수였는가를 묻는다면 많은 이견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지난 3년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투수였고 그가 세운 기록들은 최동원상을 받기에 부끄럼이 없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헌데 그런 이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
다만 내야를 넘기는 2루타. 이왕이면 좌중간 깊숙하게 틀어박히는 장타로. 엘리츠의 좌익수는 소녀어깨로 유명하다. 이정훈 자신의 발이라면 2루타에 홈까지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은 아니다.
-딱!!
그가 바란 대로 좌중간으로 향하는 빠르고 큰 타구였다. 타격의 순간 직감했다. 좌익수와 중견수의 위치는 이미 파악했다. 이건 전성기의 케빈 키어마이어 정도 되는 외야수 아니면 절대 못 잡는다.
이정훈의 몸이 폭발적으로 튀어 나갔다.
분명 최수원의 발 역시 느린 발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아직 1루를 밟기도 전, 이정훈은 이미 2루를 지나 3루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경기장이 고요했다.
3루에서 팔을 돌려야 하는 주루 코치도 넋을 잃고 외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정훈은 바보가 아니었다. 빠르게 달려가던 그의 발이 서서히 느려졌다.
삑삑거리는 응원단장의 시끄러운 호루라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앰프 소리는 여전히 빵빵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이 기묘한 정적이 소름끼치게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외야로 향했다.
좌중간.
엘리츠의 좌익수인 조진경이 양손을 허리춤에 댄 채 허탈하게 외야 펜스 너머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잠깐의 정적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터져나오는 폭발적인 함성.
넘어갔다.
“하······, 미쳤네. 진짜.”
이정훈이 자신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었다.
개막전에서 작년 최동원상 수상 투수를 상대로 2연타석 홈런.
심지어 오늘은 녀석의 데뷔전이었다.
“이건 진짜 서면 무조건 나가야 되겠네.”
***
확실히 아직 젊은 투수였다.
가끔 해설자들을 보면 미국 애들이 마초적이라서 정면 승부를 즐긴다느니 뭐 메이저가 힘의 야구니 뭐니 하는 애들이 있는데 그거 다 개소리다. 거기 놈들 진짜 능구렁이다.
특히 나이 먹고도 여전히 에이스급, 혹은 2선발급 위치를 유지하는 투수들. 얘들은 둘 중 하나다. 원래 105마일씩 던지던 놈들이 몸 관리 잘해서 나이 먹고도 여전히 100마일 넘게 공을 던지던가, 아니면 뭔가 진짜 기분 더러운 공만 골라 던지는 야구 도사가 됐던가.
제이크 보어는 그 가운데 후자에 가까웠다.
아마 전체적으로 평균 구속이 한 5~6마일만 더 나왔더라면 솔리드한 메이저 3선발급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의 ‘커맨드’를 유지할 때의 이야기다. 게다가 제이크 보어의 공이 강력한 이유는 두 가지의 속구가 헷갈리게 들어오기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AA급 혹은 AAA급 타자들 정도를 상대로는 그것만으로도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KBO 최상급 타자들에게도 그가 강력한 투수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던지는 ‘체인지업’ 때문이다.
내가 빅리그를 뛸 당시에 가장 싫어했던 투수 가운데······(중략)······해서 만약 그 녀석이었다면 지금 젖먹던 힘을 짜내 94, 95마일짜리 속구를 어설프게 던지는 대신 한층 더 힘을 빼고 70마일짜리 체인지업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저 꼰꼰한 제이크 보어가 내 작은 세러머니에 욱 해서 어설프게 로케이션 된 속구를 던지는 바로 그 순간 이미 승부는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이규만이 홈런을 쳤을 때처럼 잔뜩 달아오른 사직 구장의 팬들을 향해 쭉 팔을 뻗어 주었다. 나의 손끝이 향하는 곳에 사람들이 한층 더 크게 환호성을 내뱉는다. 무려 2년 만에 느껴보는 그 즐거움에 나도 모르게 1루 내야를 가리켰던 손끝을 크게 돌려 외야에 걸쳐 3루 내야까지 한 바퀴를 돌려 버렸다.
욕설이 섞인 감탄사.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
귀청을 울리는 앰프 소리와, 그 사이에서 또렷하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응원단장의 호루라기소리.
그것은 지난 삶에서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던 사직 구장의 시끄러운 맛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은 마운드의 투수가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지 않을까?
제이크 보어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
덕아웃.
엘리츠의 선수들이 참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email protected]#$%!#@$%”
분명 학교 영어 수업에 항상 숙면만 취했었기에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나열이었다. 하지만 저 격렬한 감정만큼은 만국 공통이기 때문일까? 요상하게 그 의미가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저건 욕이다.
그것도 매우 격렬한 욕.
3:0.
그리고 5회 초 엘리츠의 공격 이닝.
평소 조금 꼰대 같은 면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신사에 가깝던 엘리츠의 에이스는 투수용 점퍼를 걸치는 것도 잊은 채 격렬하게 분노를 토하고 있었다.
그것도 방금 세 타자를 연속으로 삼진으로 돌려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이크 보어, 정말 강합니다. 이규만에 노형욱 그리고 권혁주까지. 마린스의 타자 셋을 모조리 삼진으로 잡아냈어요. 구속이 지금 벌써 152.3km/h까지 찍혔습니다.]
[사실 제이크 보어 선수가 대단한 투수이긴 합니다만 강속구 투수라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평균적으로 147에서 148정도? 작년의 경우 7월에 한참 물이 올랐을 때 150.1km/h를 찍은 게 전부였어요. 헌데 4월 초인 지금. 아직 개막전인데도 불구하고 152.3km/h라는 건 겨울 동안 몸을 정말 잘 만들어 왔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오늘 4이닝 동안 허용한 출루는 단 3개. 하지만 문제는 그 3개 가운데 2개가 홈런이었다는 점이겠죠. 그것도 오늘 막 데뷔전을 치르는 신인 선수에게 말이에요.]
[이건 그냥 저 최수원이라는 신인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아니, 데뷔전 첫 타석부터 멀티 홈런이라뇨. 지금까지 KBO에 이런 기록이 있었나요?]
[그럴리가요. 멀티홈런은커녕, KBO에 신인이 데뷔 첫 타석에서 홈런을 기록한 건 고작 20번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다섯이 외국인 타자였고 심지어 고졸 신인이 기록한 건 딱 한 번. 돌핀스의 백강호 선수가 유일합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기록이에요.]
[과연 KBO 역대 최고액답습니다, 이거 정말 대단한 신인의 탄생이네요.]
[제가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저 선수 여유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거 보세요. 홈런을 치고 보이는 저 여유. 사실 개막전에 데뷔전. 게다가 역대 최고액까지. 긴장을 할 수밖에 없거든요. 근데 그런 게 전혀 보이지를 않아요. 괴물, 정말 괴물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네요. 네, KBO에 괴물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일루로 향하는 빗맞은 타구.
최수원이 성큼성큼 달려가 어렵잖게 공을 낚아챘다.
빠르게 1루로 커버를 나온 딜튼 도일리에게 수원이 가볍게 공을 토스했다.
“아웃!!”
딜튼 도일리가 수원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무려 3점이라는 득점 지원을 해준 타자가 수비까지 흠잡을 곳 없이 해주고 있다. 예뻐 보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스완, 오늘 끝나고 내가 살테니까 같이 저녁이나 먹자.”
“저녁을?”
“그래, 첫 승리 기념으로.”
5회 초.
마린스가 또 한 번 엘리츠를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이어지는 5회 말 그리고 6회 초.
-딱!!!
원아웃 상황에서 딜튼 도일리가 두 타자 연속 안타를 허용했다. 원아웃 주자 1, 3루. 마침내 찾아온 득점의 기회.
경기를 지켜보던 엘리츠 팬들이 두 손을 꼭 모았다.
“명훈이 준비됐지?”
“네.”
지난 시즌 마린스의 토종 최다승 투수.
6승 11패에 빛나는 한명훈이 불펜으로 마운드에 올라왔다.
그리고 한명훈은 이미 불펜에서 30개나 공을 던져 완벽하게 풀린 몸으로 원아웃 주자 1, 3루의 위기를 고작 1실점으로 막아냈다.
6회 말 3:1 상황.
지금까지 엘리츠의 에이스인 제이크 보어의 투구 수는 고작 74개.
마운드 위에 선 그가 75번째 공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