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데뷔전?(2)
[제이크 보어가 마린스의 타자들을 아주 능숙하게 처리합니다. 순식간에 투아웃. 타석에는 이번 시범 경기 가장 뜨겁게 방망이를 휘둘렀던 신인이죠? 최수원 선수가 들어옵니다. 사실 오늘 경기, 마린스의 라인업을 보면 참 대담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거든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가 무려 둘이나 스타팅으로 포함이 됐습니다. 이게 참 흔치 않은 일이죠? 박동식 위원님, 안 그렇습니까>]
[네, 맞습니다. 최근 프로와 아마의 수준차이를 생각하면. 게다가 개막전이라는 경기가 주는 중압감을 생각하면 참 쉽지 않은 선택일 텐데, 마린스 김대철 감독이 상당히 과감한 선택을 했어요. 게다가 3번 타자라니. 물론 최수원 선수가 시범 경기에서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게 프로 데뷔전이라는 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거든요.]
[조금은 섣부른 선택이 아니었나. 뭐 그런 말씀이시군요.]
[하하, 글쎄요. 뭐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만. 아무튼, 이 야구라는 것이 결국 멘탈리티가 굉장히 중요해서. 개막전, 그리고 데뷔전이 겹치는 중압감을 과연 저 열아홉 어린 선수가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그게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 마운드에 선 투수는 작년 KBO에서 가장 도미넌트한 활약을 보여줬던 에이스 제이크 보어 선수니까요.]
사직구장에 사람이 가득했다.
솔직히 내가 KBO에서 뛰던 시절 그리 좋아하던 구장은 아니었다. 낡고 더럽고 시끄럽다.
마운드에 제이크 보어가 공을 준비했다.
빅리그에서 1라운드 27번에 지명돼서 2시즌 정도 뛰었던 선수다. 물론 빅리그에 지명됐을 12년 전 당시에는 최고 103마일짜리 공을 던졌었고 지금은 최고 93마일짜리 공을 던진다는 차이는 있었지만 그래도 선수로의 완성도를 따지자면 지금이 더 높지 않을까?
두 가지 속구를 구사한다.
최고 93마일짜리 포심이야 그렇다 치고 문제는 두 번째 속구다.
구속 차이는 1km/h 내외.
본인 입으로는 투심이라고 하니까 일단은 투심이라고 해야겠지만 내가 보기에 메이저를 기준으로 하면 싱커로 찍힐 확률이 높다.
사실 이름이 뭐 중요할까. 중요한 점은 그 공이 바깥쪽으로 휘어지면서 좀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괜찮은 커브와 슬라이더. 그리고 우타자를 상대로 리그에서 가장 높은 삼진율을 보여주는 체인지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공들이 피칭폼만으로는 구분하기 힘들다.
그야말로 완성형 투수 그 자체다.
[자, 제이크 보어. 초구 와인드업!!]
타석에 서서 자세를 잡자마자 들어오는 초구.
제법 빠른 타이밍이었다.
손끝을 타고 튀어나오는 공.
속구였다.
대기 타석에서 맞춰본 타이밍은 이미 완벽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싱커인가, 포심인가를 구분하는 일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매우 쉬운 일이었다.
바깥 코스.
이건 더 바깥으로 달아나는 공이다.
칠까?
아니, 내가 설정한 존에서 살짝 빠지는 공이다. 그리고 카운트는 어차피 0-0이다.
방망이를 멈춰 세운다.
-뻐엉!!
싱커.
내 예상이 옳았다.
볼카운트 1-0.
두 번째.
속구 타이밍에 맞춰 타격을 준비했다.
투수의 손에서 공이 날았다.
체인지업.
이번에도 방망이는 나가지 않았다.
-뻐엉!!
볼카운트 2-0.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볼!! 최수원 선수, 또 한 번 참아냅니다. 제이크 보어 선수, 아무래도 최수원 선수의 파워를 조금 경계하는 것 같죠?]
[사실 그럴 수밖에요. 시범경기 8경기에 출장해서 홈런만 10개를 쳤어요. 아무리 시범경기성적이 정규 시즌 성적과는 별개라고 해도 그 파워는 경계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하, 이거 박동식 위원님이 신인 선수 칭찬하는 건 정말 오래간만인데요?]
[저 파워는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 약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죠.]
[약점이요?]
[네, 누누이 이야기 했던 것처럼 저 선수 공을 좀 막 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욕심이 많다고 해야 할까요? 보면 워닝 트랙에서 잡히는 공이 상당히 많았어요. 저런 공들은 사실 그냥 보내면 되거든요. 투수라고 항상 좋은 공만 던질 수는 없는 거고 결국 실투는 나옵니다. 홈런은 그런 공을 치면 되는 거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잘 참아내는 것 같은데요.]
[네, 그러니까 약점이 있었다고 이야기 한 겁니다. 물론 이게 약점을 극복한 것인지, 단순히 개막전, 정규시즌 첫 데뷔전이라 그런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이크 보어 선수는 시범 경기에서 보여준 최수원 선수의 약점을 잘 공략하는 중이고, 최수원 선수는 그걸 잘 참아내는 중인 셈이죠.]
[말씀드리는 순간 제이크 보어 선수 세 번째 공을 준비합니다.]
빠른 공.
조금 애매한 코스였다.
실투일까?
아니면 공을 두 개나 버렸으니 일단 하나 과감하게 질러본 공일까?
사실 상관없었다.
제이크 보어가 던지는 공이 싱커인지, 아니면 투심인지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딱!!
몸쪽 애매하게 높은 코스.
겨드랑이를 단단하게 조이고 휘두른 방망이가 제이크 보어의 속구를 저 먼 곳으로 날려보냈다.
그래, 제이크 보어는 분명 KBO를 기준으로 완벽에 가까운 투수였다.
하지만 그 완벽에 가까운 투수는 3년째 KBO에서 공을 던지고 있다. 설마 MLB에 갈 수 있는데 안 가는 걸까? 그럴 리가.
KBO를 기준으로 그가 던지는 모든 공은 평균 이상. 투심과 포심은 플러스 피치. 체인지업은 플러스플러스 피치쯤 될 것이다.
하지만 메이저를 기준으로 봤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의 모든 공은 평균 이하. 기껏해야 체인지업 정도나 평균 수준에 간신히 걸친다.
그리고 현재, 내 타격은 명백히 탈 KBO급이었다.
가볍게 방망이를 내던지고 일루를 향해 달렸다.
-와아아아아아아!!!!
시끄러운 사직구장을 한층 더 시끄럽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환호성.
응원석에서 울려퍼지는 앰프음이 귀를 찔러댔다. 일루를 밟고 그 열광적인 관중을 향해 살짝 손을 흔들었다.
“이 새끼가 진짜 뒤질라고?”
2루와 3루 사이.
강소구가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여간.
오래된 종목이라 그런가? 야구는 이상할 정도로 꼰대들이 많다. 이건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나를 강하게 노려봤다.
그래, 미국놈들이 더하다.
내가 미국 건너갔을 때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긴 했었는데 그래도 2010년대에 뛰었던 선수들은 좀 여전했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그래도 라틴 쪽 애들은 차라리 좀 괜찮은데 미국 남부랑 동부 쪽 애들은 한국보다 훨씬 더 꼰꼰한 느낌이다.
물론 나야 제이크 보일 리가 나를 노려보거나 말거나 가볍게 2루와 3루를 밟고 홈플레이트까지 야무지게 밟았다.
1:0
고등학교 시절처럼 홈플레이트까지 달려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덕아웃으로 돌아온 나에게 몇몇 선수들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밀었다. 몇 번의 하이파이브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오늘 개막전임에도 불구하고 어제 서면에서 발견됐다는 유흥왕 이정훈이 나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겼다.
“새끼, 진짜 잘 치네. 오늘 제이크 쟤 공 진짜 좋던데. 대체 비결이 뭐냐?”
“그냥 끝까지 잘 보고 훈련한 대로 휘둘렀습니다.”
“그래그래, 공부는 국영수 위주로. 예습, 복습 철저히 하고. 중요하지.”
“네, 저는 예습을 좀 철저히 하는 편이니까요.”
“아야, 야, 방금 나 네 말에 심겨있던 뼈에 찔렸는데? 이거 이거 쪽팔려서라도 나 정도 짬밥되면 예습 좀 덜 해도 괜찮다는 걸 증명해줘야겠네.”
라고 내야뜬공으로 물러난 2번 타자 이정훈이 말했다.
“그런 말 하기에는 앞선 타석에서 너무 허무하게 초구 내야 뜬공 아니었냐?”
“하하, 경준 선배. 아니, 그게 그러니까 투심인 줄 알고 그 각도로 휘둘렀는데 포심이지 뭡니까. 덕분에 좀 공 밑둥을 쳤는데. 두고 보십쇼. 결국 투심 던질거고 뭐 홈런까진 모르겠지만 저 멀리 외야로 공 쭉쭉 날아갈 거니까.”
“쯧, 말이나 못 하면.”
-부웅!!
“스트라잌!!”
“어이코, 규만 선배님 방망이에 힘이 아주 좋네요. 바람 가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요.”
“뭐?”
“하하, 왜 화를 내려고 그러십니까. 그냥 역시 규만 선배 힘 좋다. 뭐 그런 이야기인데요.”
“하, 이 새끼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워워, 선배. 애들 보잖습니까. 경기도 1:0으로 이기고 있는데 경기 집중하시죠. 규만 선배님 올해로 은퇴인데 그래도 가을 야구 맛은 보고 가셔야죠. 안 그렇습니까?”
-딱!!!
그 순간 터진 거대한 타구.
타구가 날았다.
내가 홈런을 쳤을 때처럼 사직 구장이 또 한 번 끓어올랐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건 끓어오른다는 표현보다는 폭발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이것은 사직구장에서만 200개가 넘는 홈런을 쳐낸 프랜차이즈 타자에 대한 존중이었다.
우중간.
엘리츠의 중견수가 매우 빠르게 달렸다.
86년생.
얼마 전 41번째 생일이 지난 만 41세의 타자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1루를 향해 달렸다. 그리 빠르지 않았다. 아니, 명백히 느렸다.
요란한 비명성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줄어든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아쉬움 가득한 탄성이었다. 20년 전 처음 사직구장을 찾았던 팬들은 저 늙어가는 타자의 전성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그 시절 그때, 젊은 타자가 지금 저 코스로 저렇게 방망이를 휘두르고 그 방망이에서 저런 소리가 냈을 때 야구공은 어김없이 담장을 넘어갔었다.
하지만 지금.
워닝트랙에 가까운, 하지만 워닝트랙에 닿지 않은 위치에서 엘리츠의 중견수가 그리 어렵지 않게 타구를 잡아냈다.
점수는 아직 1:0
마린스의 늙어가는 4번 타자는 담장을 넘기지 못했다.
경기는 계속됐다.
지난 3년.
KBO에 군림했던 제이크 보어는 대단한 투수였다. 그는 이제 슬슬 투수로써 전성기를 넘어가는 나이였지만 1회 말에 나에게 얻어맞은 홈런이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이제 4월 초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최고 구속인 150km/h에 가까운 148km/h의 공을 뿌려댔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딜튼 도일리는 자신의 공이 안타를 허용할 때마다 이상한 악을 질러가며 꾸역꾸역 무실점으로 엘리츠의 타선을 막아냈다.
그리하여 4회 말.
조금 전 수비 이닝에서 좌중간으로 빠져나가던 공을 파인플레이로 잡아낸 이정훈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망이를 뽑아 들었다.
“어휴, 빡세다. 빡세. 하여간 이래서 외야수가 영 별로라니까. 덕아웃까지 거리가 멀잖아. 걸어오는 데 한 세월, 또 걸어가는 데 한 세월. 선두타자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또 바로 나가야 하고. 수원아, 너는 절대 외야수 하지 마라. 투수도 힘든데, 그냥 일루수랑 지명타자만 한다고 해. 알겠지?”
“선배님 자리 뺏길까봐요?”
“어흠······. 하여간 어린놈이 눈치는 빨라서. 넌 진짜, 생일만 딱 지나면 기대해라. 아 맞다. 그리고 나 지금 엄청 힘드니까 어지간하면 좀 걸어오게 해줘 봐.”
“출루하시게요?”
“당연히 해야지, 이왕이면 홈런 치고 싶은데 방금 너무 세게 달려서 하체 근력이 좀 빠진 관계로 그건 무리일 것 같고, 대신 네 타점이나 하나 더 올려주마. 2홈런에 2타점이면 좀 씁쓸하잖냐. 무슨 규만 선배 혼자 야구 하던 시절 마린스도 아니고. 안 그러냐?”
이정훈이 되게 멋진 척하면서 타석에 들어갔다.
솔직히 내가 진짜 열아홉이었으면 저 선배 좀 멋진데? 라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보다는 쟤 진짜 후달리겠는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냐하면 나도 ‘선배’의 입장에 섰을 때 저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타점 하나 채워주마.’가 아니라, ‘일단 나가기만 해라. 나머지는 내가 다 해결할 테니까.’이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 결은 같다.
성공하면 진짜 멋진 선배인데, 실패하면 개쪽도 그런 개쪽이 없다.
-딱!!
파울.
-뻐엉!!
볼.
-부웅!!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볼카운트 1-2.
이정훈의 얼굴에 슬슬 간절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콤팩트한 폼.
그리고 반 박자 느리게 시작되는 간결한 스윙.
그야말로 작정하고 공을 걷어내겠다는 자세다.
6개, 7개, 8개.
그리고 9개.
이제 슬슬 삼진으로 물러나도 손해가 아니라고 판단되는 투구 수까지 승부가 길어졌다.
-딱!!
10개.
여전히 콤팩트한 폼에, 반 박자 느리게 시작되는 간결한 스윙.
그리고 타구는 3루 파울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내야 안타.
1루에 선 이정훈이 벌게진 얼굴을 한 채, 되게 멋진 척을 하며 나를 바라봤다. 뭐, 본인의 생각만큼 멋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무사에 주자 1루.
내 차례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