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올해는 다르다(2)
“최근 시범 경기에서 마린스가 보여주고 있는 활약은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다섯 경기에서 모두 큰 점수 차이로 승리를 거뒀어요.”
“네, 맞습니다. 사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한 것이 마린스랑 피닉스. 꼴찌를 다툰 기간이 너무 길었어요. 이제 슬슬 올라올 때도 됐죠. 사실 프로팀이 35년째 무관이라는 건 분명 문제가 있는 부분이거든요. 물론 메이저리그에도 108년씩 우승 못한 팀이 있긴 합니다만 거긴 30개 팀 가운데 1등이고 여긴 10개 팀이거든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마린스. 창단 45년인데 아직 정규시즌 우승이 한 번도 없어요.”
“그래도 미국과 한국은 분명 사정이 달랐고 마린스에는 마린스만의 사정이 있었으니까요.”
“네, 맞습니다. 특히 2010년대 이후로는 마린스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 있는 것이 마린스가 꼴찌를 다투던 시절에 계속 신규 팀이 생기고, 서울, 수도권과 지방간에 격차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지역 연고가 부활하는 등, 하위권 성적을 거뒀음에도 그 성적에 걸맞은 가장 좋은 자원을 데리고 오질 못했어요. 당시 서울 지역의 1차로 뽑혔던 선수들과 마린스가 1차로 뽑았던 선수들이 지금 어떤지를 살펴보면 그게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겁니다.”
“하긴, 지금 빅리그에 진출한 이호정 선수나 토종 선발 가운데 손에 꼽히는 신유민 등의 선수가 당시에 서울지역 1차로 뽑혔던 선수들이긴 하죠.”
“맞습니다. 반면에 마린스 쪽 선수들은 지금······.”
***
“반갑다.”
거의 100석에 가까운 규모의 제법 커다란 식당이었다.
“어? 정창식 선배님? 저는 올해 입단한 마린스 포수 조유진이라고 합니다. 팬입니다!!”
정창식.
그러니까 은퇴한 지 한 10년 정도 된 선수였다.
“그래, 며칠 전에 경기는 잘 봤어. 근데 내 팬이라니. 이거 좀 머쓱한데?”
마린스 최후의 3할 포수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인물인데 솔직히 타율은 3할이었지만 다른 스탯들이 영 별로였다. 특히 블러킹이랑 도루저지는 규정을 채운 포수 가운데 리그 전체 꼴찌였고.
아, 내가 어떻게 이런 걸 자세히 기억하고 있냐면 마린스 특집 방송 같은 거 하면 항상 언급되는 인물이라서 그렇다. 커리어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못했지만 무려 이규만과 입단 동기로 저 이규만을 2차 1라운드로 밀어내고 1차에 뽑힌 인물이 바로 이 정창식이었다. 덕분에 언론에서 이규만 관련 방송을 할 때면 꼭 한 번 정도는 언급이 된다.
그러니까 마치 전체 1위 가운데 유일하게 메이저리그를 밟지 못했던 어메이징한 뉴욕팀의 스티브 칠콧이 Mr. October 레지 잭슨 덕분에 레지 잭슨 커리어 내내, 심지어 은퇴 이후에도 소환됐던 것처럼 정창식 역시 이규만이 기록을 세울 때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은퇴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소환이 되고 있었다.
“뭐, 덕분에 나는 좋지. 솔직히 그런 게 전부 가게 홍보거든. 뭐, 나는 야구 잘못했지만, 야구 잘하는 동기랑 선배, 후배들 둔 덕분에 그래도 이렇게 먹고 산다.”
“어이고, 이 형님. 또 엄살 부린다. 진짜 먹고 살기 힘든 건 우리지. 나도 이거 코치 때려치우고 가게나 열어야 할까 봐.”
“인마, 코치를 때려치우긴 뭘 때려치워. 거기 잘 붙어 있으면 최 선배가 어련히 알아서 끌어줄까.”
“어휴, 지금 마린스 1군 코치들 김대철 감독 따라 온 사람들이 반인데. 텄어요 텄어.”
“야, 굴러온 돌이 박혀봐야 얼마나 깊숙하게 박히겠냐. 어디 이런 적이 한두 번이야? 조만간 알아서들 빠져나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애들이나 잘 단도리 해.”
정창식만이 아니었다.
약 100석 가까운 식당에 모인 사람의 숫자는 서른 명가량. 그 전부가 마린스 출신의 선수들이었다. 다만 연령대는 제법 높았는데 여기서 나와 쪼유를 제외하고 가장 젊은 현역은 5년 선배인 차경윤이었다.
그는 1차 지명이 사라지기 전의 마지막 1차 지명 선수로 재작년 말에 전역해서 작년 내내 2군에서 뛴 투수다. 2군 성적은 97.2이닝 4.62로 썩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1차임에도 계약금 1.5억밖에 되지 않는 계약금이 말해주듯 애초에 기대치가 높지 않았다. 당시 서울을 제외하면 전국적으로 팜이 워낙에 흉년이었던 탓이다. 심지어 당시 2차 1라운드인 이주혁은 3억2천만을 받았다.
“올해 팀 분위기는 좀 어때?”
“상당히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규만 선배 은퇴하는 해이기도 하고. 다들 각오가 좀 단단하죠.”
“그러고 보니 규만이는 오늘도 안 나온건가?”
“네, 가족 행사가 있어서요.”
“쯧, 가족 행사는 무슨······. 하여간 이래서 창식이가 잘 돼야 했었는데.”
벌써 술을 몇 잔이나 마신 건지 불콰한 얼굴의 사내가 혀를 찼다.
장년보다는 노인에 더 가까운 남자다.
“광식 선배님. 그래도 규만이도 나름 잘합니다. 종종 후배들 데리고 와서 밥도 사 먹이고 아시잖습니까. 규만이가 원래 미국 나가려던 거 그래도 팀 생각해서 남았던 거.”
“흥, 팀 생각은 개뿔. 그냥 팀에서 돈 많이 주니까 남았던 거지. 160억이 어디 개새끼 이름도 아니고 말이야. 그리고 그만큼 받으면 뭐 하나. 우승 한 번 못했는데 말이야.”
그가 멋지게 든 오른손에는 투박한 형태의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1992년. 마린스의 우승 반지였다. 아, 물론 KBO에서 제대로 우승반지를 맞춘 것은 1994년 서울 엘리츠가 처음이다. 저건 그냥 당시 우승 멤버들끼리 자비로 맞춘 반지다. 하지만 구단에서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고 해도 저건 분명 우승의 증거다.
“결국 남는 건 우승이야. 뭐 안타를 몇 개 치고, 홈런을 몇 개 치고. 아무 의미 없다고. 야구는 이기려고 하는 거고, 기록은 그 부산물이야. 안 그래?”
“맞습니다. 선배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와, 근데 선배님. 저 마린스 우승반지 처음 봐서 그런데 잠깐 가까이서 봐도 되겠습니까?”
“응? 넌 누구냐?”
“아, 안녕하십니까!! 전 올해 마린스에 입단한 포수 조유진입니다.”
“조유진? 얘가 이번에 1라운드인가? 1라운드는 다른 애였던 것 같은데? 그 좀 더 길쭉하고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애.”
“안녕하십니까. 말씀하신 길쭉하고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최수원입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얘. 어? 근데 왜 둘이나 온 거냐.”
“아, 제가 낯을 좀 가려서요. 선배님들이 맛있는 거 사주신다고 하길래 데리고 왔습니다.”
“엉?”
영감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하, 같은 학교에서 3년이나 붙어있던 배터리랍니다. 아무래도 투수랑 포수는 특별히 친밀하기 마련이니까요. 자자, 선배님 그러지 마시고 여기 제가 아주 좋은 놈 하나 구해놨으니까 한잔 쭉 하시죠. 산삼주랍니다.”
“산삼주면 정태형이 너 은퇴할 때 선물했던 술 아니냐? 그거 우리 마린스 우승 할 때 마시겠다고 놔둔 거 아니야?”
“어휴, 그건 저기 잘 모셔뒀고 이건 제가 따로 구한 술입니다.”
정창식이 우리 사이에 쑥 끼어들더니 그 영감을 데리고 빠졌다.
“원래는 참 좋은 선배인데 약주가 좀 과하셨네. 너희가 좀 이해해라. 선배 입장에서는 팀이 35년이나 우승을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시겠냐. 심지어 당시 우승 멤버 중에서 벌써 다섯 분이나 소천하셨으니. 쯧······.”
92년 당시 마린스의 평균연령은 26.7세. 35년이 지난 지금은 가장 어렸던 고졸 1년 차 선수도 60을 코앞에 둔 나이가 됐다.
‘야, 저게 네가 말한 그 1차 지명 꼰대인가 보네.’
‘어, 규만 선배도 1차 지명 아니라고 영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그러더라.’
‘하여간, 이러니까 야구를 못 하지.’
쪼유와 잠시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누며 장내를 다시 한번 살폈다. 그러니까 여기 모인 이들이 마린스 약 35년의 역사다.
음, 어째서일까? 쪼유의 이야기처럼 마린스가 왜 35년 동안 우승을 못했는지를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다.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선수가 없다.
아,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나름대로 한가락씩은 했던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커리어에 골든글러브 하나 정도는 받은 선수들이 절반 정도는 된다.
“뭐야? 경준아 신인들이야?”
“네, 이쪽은 올해 1라운드 최수원. 그리고 이쪽은 2라운드 조유진입니다. 얘들아 인사드려. 여기는 어린이 야구 교실 운영하는 박영진 선배. 이 선배 덕분에 백수 면한 애들이 한둘이 아니야.”
“안녕하십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요즘 애들이라 그런가? 확실히 몸이 좋네. 야구 잘하게 생겼다. 그래서 학교는 어디?”
“중앙고 나왔습니다.”
“중앙고? 중앙고면 남구? 근데 거기도 야구부가 있었나?”
고개를 갸웃하는 그에게 서경준이 대신 답했다.
“부산이 아니라 그 서울 쪽입니다. 아시잖습니까. 1차 지명 폐지된 거.”
“아아, 맞다. 그랬지. 내가 요즘 3호점 내는 바람에 사업이 바빠서 그걸 몰랐네. 아무튼 반갑다. 나중에 한 번 사진이나 찍으러 와. 내가 잘 해줄테니까.”
“와, 벌써 3호점까지 내셨어요?”
“벌써라니. 내가 이 일이 지금 몇 년째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아무튼 혹시 힘든 후배 있으면 연락하라고 해. 이번에 3호점 내면서 자리 좀 더 났으니까.”
여기 이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참······.
“비루하네.”
“어? 수원아.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고교 야구에서 프로에 오는 것에 실패하면 인생이 참 암담해진다. 하지만 그건 프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1차 지명으로 들어왔어도 미래가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다.
20대와 30대. 프로 선수에게 가장 황금 같은 그 시기 동안 이런 가게 하나라도 차릴 만큼 자본을 모을 수 있는 선수는 몇이나 될까? 물론 일반적인 회사원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프로에 온 선수들은 일반적인 학생들로 치자면 확률적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성공하는 것은 결국 한줌이다.
“하하, 제가 아직 미성년자라서. 대신 제가 아주 꾹꾹 눌러서 따라드리겠습니다. 선배님!!”
“그래, 포수라고? 장비값 많이 들겠네. 나중에 연락 해 봐. 용품 취급하는 걔랑 내가 잘 아는데. 협찬 이야기 꺼내볼 수 있게 내가 자리 한 번 만들어볼 테니까. 알겠어?”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는 그래도 이 ‘성골’이라는 것에서 하나의 프로팀을 좌우하는 거대한 세력 같은 것을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어마어마한 흑막이 ‘후후후’거리고 있었더라면 마린스가 우승하지 못한 이유가 그런 ‘세력’들이 자기끼리 내부에서 다투느라 힘이 없어서였다면. 뭔가 조금 더 의욕이 생겼을 것 같다.
35년의 오랜 패배가 쌓아 올린 거대한 똥덩어리들.
그 사이에서 웃고 떠들던 쪼유가 어느새 나에게 또 다가왔다.
“최수원.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표정에 너무 잘 보여서 미리 말하는데,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음식 먹으면서 방긋방긋 웃기나 해라.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내 표정이 대체 어땠을까?
거울이 없어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안병영에게 대거리질을 할 때의 그것과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쪼유. 넌 비위도 좋아. 이런 냄새 나는 똥 덩어리 같은 인간들이랑······.”
“야 인마, 아무리 똥이라도 오래 묵히면 그게 다 거름도 되고 그러는 거야. 하여간 혼자 졸라 잘 나셔서 평범한 사람들 마음은 하나도 모른다니까. 아무튼 너 우승하고 싶다며. 내가 적극 협조할 테니까 인상 그만 쓰고 밥이나 잘 먹고 있어라.”
***
-딱!!!
[쳤습니다!! 최수원!!! 시범경기 벌써 다섯 번째 홈런입니다. 아니, 이 선수 대체 뭔가요? 고작 다섯 경기에 출장해서 벌써 홈런이 다섯 개입니다. 매 경기 홈런을 쳐내고 있어요.]
[와, 시범 경기, 마린스의 경기가 고작 여섯 경기 진행된 상황에서 홈런이 다섯 개. 그러니까 아직 네 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역대 시범 경기 최다 홈런까지 고작 하나를 남겨둔 상황이네요. 놀랍습니다.]
[주말동안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오늘 컨디션이 굉장히 좋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