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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09화 (109/305)

109화. 봄린스(2)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기 전의 나는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야구 선수였다.

보통 사람의 경우 이런 말을 스스로 입 밖에 내는 것은 민망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객관적, 아니 최대한 부정적으로 봐도 한국 역사에서 나보다 대단한 커리어를 가진 선수는 없었으니까. 솔직히 오타니 쇼헤이라는 선수가 가진 위상만 아니었다면 아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야구 선수라고 해도 괜찮았을 텐데 그 형은 통산 성적을 떠나서 임팩트 자체가 너무 압도적이라 어쩔 수 없다.

아무튼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야구 선수였던 나는 당연히 국가대표 팀에도 꽤 많이 출장했다. 심지어 메이저리거가 된 다음에도 WBC에 출장했다. 당시 야구의 세계화인지 뭔지 물 건너가고 전체적으로 탑급 선수들은 WBC에 참가하는 것을 꺼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대단한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한국 팬들 대부분은 국가대표 경기가 리그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뭐 축구를 예로 들면 틀린 말도 아니다. 축구 같은 경우 결국 커리어의 정점은 국가대표 경기다. 괜히 클럽 커리어가 압도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메시가 마라도나를 넘었네, 못 넘었네 하는 말이 꾸준히 나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야구는 달랐다.

야구에 있어 국제대회란 무엇일까? 뭐, KBO나 NPB 등등 팬들의 생각은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뛰던 당시 MLB 쪽 팬들이 생각하는 국제대회는 ‘MLB에 진출할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쇼케이스.’에 가까웠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수준 낮은 대회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주장’을 단 적이 없었다. 국제 대회의 경우 짬밥 좀 되는 선수가 실력과 커리어까지 가장 좋으면 주장 완장은 보통 무조건 찬다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심지어 나 같은 경우는 MLB에서 리그 생활 시작한 것도 아니고 KBO를 거쳐 갔음에도 그러했다.

덕분에 언론에서도 몇 번이나 그 부분을 꼬집었었다. 뭐 인맥이니, 학맥이니 어쩌니 하는 말들도 많았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유는 심플했다.

나는 성격이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성격이 그나마 제법 긴 시간 사회생활을 하며 많이 좋아진 성격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라고 변명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고등학교 때 150 던지는 유망주라고 주변에서 엄청나게 띄워줬는데 대회 뛰다가 팔을 갈아서 인생을 조질뻔했다. 다행히 빠따에도 재능이 있어 부활은 했지만 말이 쉽지. 진짜 인간관계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빠따에만 열중한 결과물이었다. 보통 악과 깡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KBO 3년 차에 화려하게 피어오르며 뭔가 좀 누려볼 만했는데 내가 또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포스팅으로 미국을 갔네? 물론 거기서도 난 야구를 잘했다. 그것도 진짜 기가 막히게 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클럽하우스 리더는 될 수 없었다. 애당초 말도 서툰데 외국인에게 뭘 바라겠는가. 난 그냥 공 좀 잘 치는 용병? 딱 그 느낌이었다.

뭐, 막판에 입이 좀 풀린 다음에는 리더까지는 아니더라도 스타워즈의 요다와 같은 포지션. 그러니까 주인공은 아닌데 주인공에게 깨달음을 주는 현자 포지션 정도로 가기는 했다. 원래 미국에서 동양인 포지션은 그쪽이니까.

아무튼 지금 이 장황한 이야기의 결론은 나는 실력으로 남들 입 닥치게 하는 데는 재능이 있어도, 뭔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조율하는 것은 해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내가 갑자기 팀 내 정치의 중심에 선다?

하지만 이 와중에 다행인 점은 내 주변에는 그런 거 굉장히 잘하는 녀석이 하나는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쪼유, 상황이 이런데 내가 어떻게 해야겠냐?”

“······.”

2군 훈련을 끝내고 숙소로 막 돌아온 조유진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잠깐만······. 근데 지금 이런 말을 왜 나한테 하고 있는 거냐? 아직 1군 물은커녕 프로 물 자체를 못 먹어본 나한테.”

“그야 프로 물 못 먹어본 건 나도 마찬가지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이런 쪽으로는 네가 제일 유능하니까?”

예전에 안병영이랑 나의 관계를 알면서도 그냥 적당히 현상 유지에 최선을 다했던 건 그냥 쪼유가 원래 그런 놈이라고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작년 한 해. 중앙고의 주장직을 수행하면서 녀석이 보여줬던 활약은 실로 눈부셨다. 물론 경기에서 공받이 했던 거 말고 팀을 조율했던 활약 이야기다.

작년 중앙고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다.

2학년 후배들과 3학년 동기들은 의욕은 높았지만, 재능이 부족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딱 역대 중앙고 수준의 재능이었다.

문제는 새로 들어온 1학년들이었다. 재작년 나의 활약으로 중앙고는 전국 단위에 이름을 떨쳤고 덕분에 새롭게 들어온 1학년들의 재능과 수준은 상당했다.

자, 이제 2학년과 3학년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얘들은 자기들이 딱히 작년 3학년들에 비해서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이제 막 들어온 1학년들이 재능은 있다고 해도 현재 실력이 자기들이랑 비슷한 수준이면 짬밥 생각해서 자기들이 중용돼야 하는데, 1학년들 가운데 몇몇이 주전으로 치고 올라오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그렇다면 1학년 들이라고 불만이 없었을까? 그럴 리가. 1학년들은 1학년들 나름대로 실전 경험 쌓으면서 실력이 쑥쑥 올라가는 자신들 대신, 기껏해야 대학 진학을 위한 실적 쌓기로밖에 안보이는 2, 3학년들이 스타팅을 차지한 것에 불만이 많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야구에 진지한 놈들은 진지한 놈들대로 재능이라는 것에 고민했고, 그렇지 않은 놈들은 않은 놈들대로 또 물을 흐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조유진은 그 모든 놈들을 1년 동안 어르고 달래며 큰 잡음 없이 팀을 끌어냈다.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난 거기서 이 녀석이 어떻게 그딴 실력으로 10년 넘게 프로에서 붙어먹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도 나름대로 1군까지 제법 들락날락하면서 말이다.

유능이라는 나의 말에 쪼유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피식 웃는 걸 보면 제법 기분 좋은 말인 듯싶다.

“유능은 무슨······. 아무튼 그러니까 지금 팀에서 차기 프랜차이즈. 그러니까 제2의 이규만 선배님처럼 만들고 싶다 그런 거네. 그리고 넌 그럴 생각이 전혀 없고.”

“대충?”

“그거면 고민할 것도 없는 거 아니야? 그냥 적당히 주는 거 받아먹으면서 팀 생활하다가 그대로 미국으로 뜨면 되는 거잖아. 너 아무리 팀에서 잘해줘도 어차피 여기 뼈 묻을 생각 없잖아.”

“그야 그렇지. 원래는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원래 그럴 생각이었으면 그러면 되지. 대체 뭐가 문제야?”

다시 말하지만 내가 잘하는 건 실력으로 사람들 입을 닥치게 만드는 일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기 전에 무려 데뷔 3년 차부터 16년 차까지 그렇게 선수 생활을 했으니 그쪽 방면으로는 확실히 프로다.

“그게 그러니까······. 가을 야구, 아니 이왕이면 우승 하고 싶어서.”

“엉?”

조유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실력으로 사람들 입을 닥치게 만든다고 우승을 할 수 있을까?

고백하자면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나는 우승을 해본 적이 없었다.

KBO에 있던 시절, 적어도 내가 첫 MVP를 차지한 이후 우리 팀은 항상 우승 후보였다. 물론 절반 이상이 나의 힘이긴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정작 우승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야구는 본래 그런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커트 실링이 빨간 양말의 전설을 휘갈겼던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는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당대 최고의 팀이었던 양키스에게만 3번의 패배를 내줬을 뿐, 디비전과 월드 시리즈에서 단 1패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강력한 팀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뒤, 매드범이 ‘엄청난’이라는 단어를 뛰어넘었던 2014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버스터 포지와 헌터 펜스를 필두로 한 타선 전원이 OPS+에서 100 이상을 기록했었다.

이렇듯 한 사람의 힘으로는 팀을 우승 시킬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두 번의 MVP라는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만약 팀이 제대로 굴러간다면?

그러니까 이정훈을 필두로 한 파벌이 음주 가무와 유흥을 끊고 경기에 전념한다면?

그러니까 이규만과 서경준이 쓸데없는 야식 모임으로 자기 세력을 공고히 하는 대신 그 힘을 훈련에 쏟는다면?

그러니까 노형욱을 비롯한 제 3의 파벌이 겉도는 대신 팀에 융화되어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리하여 세 개의 파벌로 따로 돌아가는,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팀 분위기를 쇄신할 수 있다면?

“야, 꿈은 잠잘 때나 꾸고. 인간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그게 되겠냐?”

“작년에는 해냈잖아. 솔직히 작년에 우리가 전국대회 우승 휩쓴 건 말이 되는 이야기였냐?”

“그거야 아마추어였으니까. 그리고 그게 무슨 내가 팀을 단합시킨 덕분이냐? 네가 거의 무슨 전성기 배리 본즈급 포스를 뿜뿜했던 덕분이지. 그게 되니까 걔들한테도 말이 다 통했던 거잖아. 심지어 그렇게 하고도 나머지 애들은 그냥 평균치 간신히 넘긴 수준이었고.”

“그러니까 그건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잖아. 내가 필요한 건 그 나머지라고.”

“어?”

쪼유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물음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 마침내 쪼유가 내 말뜻을 완전하게 이해했다. 아니, 어쩌면 못 알아들은 척했던 것뿐, 처음부터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 그러니까 지금 프로판에서도 배리 본즈급 포스를 뿜뿜하겠다고?”

***

[메이저리그의 어느 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사람들이 나에게 야구가 없는 겨울에 무엇을 하느냐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창문 밖을 바라보며 봄을 기다린다고.’ 자!! 마침내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2027년의 봄이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사직, 사직 구장입니다.]

[오늘 마린스가 홈에서 맞이하는 상대는 지난 스프링캠프 연습경기들에서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었죠? 프로 야구 최고의 인기 구단인 광주 호크스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확실히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호크스가 보여준 모습은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특히 오늘 선발 투수로 나서는 신인 한민준 선수가 작년 하반기에 보여줬던 모습 그대로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었습니다.]

[이에 맞서는 오늘 마린스의 선발 투수는 최수원 선수입니다. 마린스 같은 경우 스프링캠프를 자체 홍백전 위주로 풀어나가며 타팀과의 연습 경기를 거의 치르지 않았는데요. 막판에 놀랍게도 메이저리그 팀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연습 경기를 치를 때 등판했던 선수입니다.]

[아쉽게도 연습 경기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만, 최수원 선수는 KBO 역사상 최고의 신인 계약금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최고 154km/h의 공을 던지며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3월에 열리는 시범 경기는 말 그대로 시범 경기다. 여기서 무패 우승을 하건 뭐건 정규 시즌 성적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실제로 프로 야구 출범 이후 시범 경기에서 가장 많이 1위를 한 팀은 마린스였다. 그것도 무려 13회다.

참고로 말하자면 시범 경기에서 두 번째로 많이 1위를 한 광주 호크스가 고작 7회에 불과하다.

아무튼 그런 시범 경기의 개막전.

김대철 감독은 선발로 나를 낙점했다.

어차피 용병 투수들이야 대충 견적이 나오는 상황에서 내가 KBO 타자들을 상대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는 의미다.

“자자, 긴장할 필요 없어. 그냥 지난번에 애슬레틱스랑 연습 경기에서 했던 것처럼만 던져.”

“그 경기에서 0.2이닝 동안 3실점이나 했는데요.”

“그건 그냥 걔들이 워낙 빠따가 좋은 애들이었고. 네 공 자체는 충분히 좋았어. 내가 장담하는데 오늘도 그날처럼 던지잖아? 오늘 네가 던지기로 한 4이닝. 깔끔하게 무실점으로 막는다. 그러니까 나만 믿고 던지라고. 알겠어?”

팀의 주전 포수인 최진웅이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홈플레이트 너머에서 미트를 내밀었다.

초구.

살짝 빠진 속구가 방망이를 스치고 땅바닥으로 내리 꽂혔다.

-뻐억!!!

심상치 않은 타격음.

블로킹이 어설픈 마린스의 주전 포수 최진웅이 입에 거품을 문 채 국부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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