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08화 (108/305)

108화. 봄린스(1)

KBO의 겨울 트레이드 시장.

철저하게 자본주의 시장 논리로 돌아가는 MLB와 달리 KBO의 구단들은 조금은 거기에서 한 발자국 비껴나 있다. 그렇기에 단장들이 트레이드에 성공했을 때 리턴보다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압도적으로 크다.

게다가 MLB의 경우 양대 리그 여섯 개 지구로 이뤄진 만큼 다른 리그, 다른 지구와 트레이드를 하면 위험이 상당히 적어지는데 KBO의 경우 단일리그라 그게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결국 KBO의 트레이드가 매우 보수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배종혁을 한명훈에 김훈을 얹어달라고? 하, 미친 새끼.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뭐라고 대꾸라도 하지.”

“그러면 피닉스쪽 제안은 어떻습니까?”

“피닉스?”

마린스와 함께 리그 꼴찌를 다투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 피닉스.

그들 역시 이번 겨울 제법 대단한 제안을 내놨다. 팀의 현재라고 할 수 있는 자원 가운데 가장 값진 자원을 제시 한 것이다.

작년에 커리어 세번째 골든글러브를 받은 중견수 이용승.

재작년 데뷔전에서 7이닝 8삼진 무실점이라는 센세이셔널한 성적을 기록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71.2이닝 평자책 3.47을 기록하며 토종 에이스로 우뚝 선 최으뜸.

그야말로 팬들이 1인 시위라도 이어갈 만큼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피닉스 투타의 핵심을 모조리 내놓겠다는 그 통 큰 결정에도 불구하고 마린스 전상익 단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최수원은 안되지. 차라리 돌핀스 제안에 협상해보면 해봤지, 최수원은 절대 판매 불가 매물이야.”

사실 어떤 시점으로 보면 나쁘지는 않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최수원에게 걸린 이면계약. MVP 2회. 혹은 우승 시 포스팅에 적극 협력이라는 조건 때문이다. 물론 피닉스라면 마린스와 마찬가지로 후자의 조건이 달성될 확률은 극히 낮긴 했지만, 애당초 이런 조건이 외부에 발설되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하다.

“후······. 주혁이만 좀 어떻게 제대로 터져줬어도······.”

마린스의 영원한 유망주 이주혁.

본래는 MVP급 포텐을 가진 툴 덩어리 평가를 듣던 그 녀석이 입단한 지도 벌써 6년이다. 이것저것 시도도 해봤고 상무로 군대도 다녀왔고 중간중간 2군도 터트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유망주 소리밖에 듣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잊을만 하면 나오는 그 전매 특허와도 같은 갈지(之)자 수비. 사실 이쯤 되면 코너 외야수로 포지션 변경을 고려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또 그러기에는 그 발과 순발력이 너무 아쉽다.

“그러니까요. 솔직히 강호창이 서울 팀으로 올라갈 건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자리를 이주혁이 무사히 채울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아무튼 돌핀스랑 이야기 조금만 더 진행을 해보자고.”

이번 윈터 시즌.

마린스는 두 명의 선수가 FA로 타 팀에 유출됐다. 반면 신규 FA는 단 하나도 잡지 못했는데 그 가운데 5억이나 더 큰 금액을 지르고도 붙잡지 못한 선수까지 있어 수도권 프리미엄이 얼마나 큰지를 단단히 실감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마린스는 작년에서 주전급 선수 둘이 빠지고 최민혁이 부상에서 돌아왔으며 최수원이라는 괴물 신인 하나가 추가된 상황.

가능할까?

전상익 단장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면 사실 아예 불가능은 아니다. 작년에도 하반기에 힘이 빠지면서 쭉 미끄러져서 그렇지 선수들 체력관리만 조금 더 제대로 됐다면 5위 경쟁은 충분했다.

“차명환이랑 김성준이는 좀 어때?”

“일단 2군 구장에서최정식 코치가 집중적으로 관리 중이라고 합니다.”

“귀국하는 선수들 차편은 미리 준비해뒀지?”

“네, 공항에 인터뷰 장소 섭외까지 다 끝내놨습니다.”

“그래, 며칠 후면 시범 경기 시작이니까 시차 적응 애먹는 사람 없도록 선수들 컨디션 관리 특히 신경 쓰고.”

“알겠습니다.”

***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이번에도 역시 나는 비즈니스에 탔다.

미국에 올 때만 하더라도 내가 비즈니스를 타는 걸로 이러쿵 저러쿵 뒷이야기가 어마어마하게 나왔었다. 하지만 이번 귀국하는 비행기 편에서는?

“확실히 수원이 넌 다리가 길어서 이코노미석이 더 불편하긴 하겠구나.”

“그러게, 한국 비행기는 좌석 간격이 넓은 편인데도 너 정도면 무릎이 거의 앞 좌석에 닿을 수밖에 없겠네.”

그냥 못 본 척하는 것을 넘어 그럴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이해해준다. 조금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본래 어느 업계건 ‘뜨면 열외’인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신인에게 이 정도까지 대우해주기는 쉽지 않다.

아마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기 전.

만 18세의 나였더라면 그냥 야구 좀 잘하니까 형들이 잘해주긴 하는구나. 하고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프로 판에서 무려 16년을 뛴 34세의 노장 눈에는 지금 상황이 조금 다르게 읽혔다.

마린스는 현재 크게 세 가지 계파로 나뉜 상태다.

첫 번째는 아주 오래 전.

부산, 경남지역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이 모인 파벌인 일명 ‘성골’. 팀의 주장인 이규만이나 서경준, 곽재영까지. 사실상 전체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계파다. 선수 뿐만이 아니다. 마린스 자체가 부산 지역을 연고로 하는 팀인 만큼 프런트, 감독, 코치 등등도 절반 이상이 이쪽 계파라고 봐야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정훈을 필두로 한 유흥파.

이쪽은 좀 애매한데, 그래도 그 주축은 부산, 경남 외 지역의 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이다. 아무래도 최초에는 유흥이나 음주가무를 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저기 ‘성골’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렸던 모임인 듯 싶은데 하필 그렇게 모인 선수들 가운데 두각을 드러낸 선수들이 유흥을 좋아했던 탓에 그쪽으로 좀 기울어진 듯 싶다.

그리고 마지막은 저 두 쪽 모두에 포함되지 않는.

그러니까 성골도 아닌데, 유흥도 그리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일종의 회색지대. 사실 여긴 파벌이라기보다는 그냥 다 따로 노는 아웃사이더에 가깝다.

누군가와 친해지기 보다는 그냥 내 야구나 열심히 하자는 느낌인데, 보통 FA 자격을 얻으면 주저없이 마린스를 탈출하는 멤버다. 이번에 FA로 서울에 올라간 중견수 강호창이나 투수 오영훈도 그런 케이스였다.

현재 이 파벌을 대표하는 인물은 마린스의 삼루수인 노형욱. 이 선배는 조금 특이하게 지난 FA때 마린스와 계약을 했는데 사실 특이하다고 말하기도 좀 그런 것이 4년 110억이라는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을 제시받긴 했다. 물론 내가 돌아오기 전 역사에서는 이 선배도 후년에 두 번째 FA로 마린스를 바로 탈출하는데, 아마 마린스에서 총액 10억인가 더 불렀는데도 주저 없이 탈마린스를 선택해서 마린스 팬들에게 욕 꽤나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본인 말로는 자기도 은퇴하기 전에 우승 반지 하나 정도는 껴보고 싶었는데 마린스에서는 도저히 답이 안 보여서 어쩔 수 없다고 했었다.

아무튼 이렇게 세 개로 나뉜 마린스의 파벌은 최근에 조금 커다란 지각변동을 맞고 있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2022년 가을부터 시작된 전면 드래프트 때문이다.

그러니까 2022년 이전. 아직 1차 드래프트가 남아 있던 시절. 전체 1번은 무조건 부산에서 뽑아야 했었다. 이 말인즉 그래도 부산에서 야구 제일 잘할 것 같은 인간은 무조건 마린스에 왔다는 뜻이었고 실제로 1차 드래프트 우선 지명권으로 온 선수들은 그래도 1군은 곧잘 밟는 편이었다. 만약 마린스가 정상적인 팀이었다면 딱히 나쁠 것까지는 없는 제도였으리라.

하지만 마린스는 하위권이었다. 그것도 꾸준히 매우 오랫동안 하위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제도 덕분에 전국에서 가장 좋은 선수를 가져올 수는 없었다. 그런 선수는 일단 1차 지명 우선 지명권으로 싹 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2년 가을, 마침내 1차 우선 지명이 사라지고 전국 단위 전면 드래프트가 시작됐다. 부산에서 가장 좋은 자원을 가져올 수 있는 제도 대신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수급할 수 있게 된 마린스는 2022년 가을에 있었던 2023 신인 드래프트부터 가장 최근 2027 드래프트까지 무려 5년 연속 1라운드로 서울, 수도권 쪽 선수를 뽑아왔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크게 논쟁이 됐던 것은 바로 작년이었는데 바로 작년이 경하고 역사상 최고의 황금세대라고 불렸던 103기 멤버들이 드래프트로 나왔던 해이기 때문이었다.

부산 마린스의 골수 팬들 가운데는 그래도 같은 값이면 경하고 선수지. 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놀랍게도 마린스는 경하고의 좌완 에이스 조규찬이나 포수 홈런왕 정병철 대신 서울 지역의 하민이 형을 뽑았다.

사실 걔들이랑 같은 시기를 뛰었던 내가 생각할 때는 아예 말이 안 되는 선택은 아니었다. 조규찬과 하민이 형. 그러니까 하민이 형이 건강하다는 전제하에 누가 더 좋은 투수가 될 것인지를 묻는다면 나는 무조건 하민이 형을 뽑는다. 물론 정병철과 하민이 형을 비교하면 으음······.

뭐, 마린스 1라운드는 원래 망하는 게 정석이니까.

아무튼 덕분에 마린스 내부의 이 파벌이라는 것도 상당히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성골이 어째서 성골인가.

단순히 부산 경남 출신 선수가 많아서? 은퇴한 레전드 선배들이 코치니, 감독이니, 프런트니 자리에 알을 박고 있어서? 그런 선수들끼리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고 해서?

그래, 물론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의 근간에는 결국 ‘실력’이라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실력의 정점에 바로 저 남자 이규만이 있었다. 그는 KBO의 역사를 통틀었을 때 첫 번째를 다투는 타자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정작 이규만 본인은 우선 지명이 아닌 2차 1라운드라는 점이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마린스 1라운드는 실패한다는 명제의 증명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규만은 부산 출신으로 매우 큰 돈을 받고 해외 진출이 가능했음에도 끝끝내 마린스에 남았던 원클럽맨이다. 사실 저만한 실력이면 무조건 외국에 나가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시기가 영 좋지 못했다.

첫 번째 FA 때는 팀에 대한 의리, 일루수라는 포지션의 한계. 그리고 4년 160억이라는 압도적인 금액으로 팀에 남았다. 그리고 두 번째 FA 때는 세계적인 역병으로 계약이 빠그라졌다. 그리고 마지막 FA 때는 이미 만 37세 시즌에 들어가는 때였던지라 도전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덕분에 그는 KBO에 그 누구도 깨트리지 못할 불멸의 기록을 쌓아 올렸다.

통산 성적.

21시즌 2517경기, 10311타석, 8812타수, 2772안타(2루타 407개, 3루타 8개), 451홈런, 1812타점, 12도루 14도루 실패.

슬래시라인 0.315/0.409/0.516

그야말로 KBO에 각종 타격 관련 누적 기록은 도루랑 삼루타 빼고 혼자 다 가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최고의 타자가 올해를 끝으로 은퇴한다. 게다가 새롭게 유입되는 선수들 가운데 최고는 이미 부산 지역을 연고로 둔 선수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골들은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인맥이라는 것은 그냥 위에서 끌어주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래에서 밀어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수원이 너 집은 구했어?”

“아뇨, 아직. 일단 에이전트한테 이야기는 해뒀어요.”

“집 구하기 힘들면 나, 방 좀 남는데 들어 올래? 경기장에서 엄청 가까운데.”

“야, 야. 경준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너라면 선배랑 둘이 같이 살고 싶겠냐?”

“왜요, 전 신인 때 형님이 재워줘서 엄청 좋았는데.”

“그거야 넌 계약금 1억 받고 왔었으니까 돈이 없어서 그랬던 거고. 수원이는 경우가 다르지. 그러지 말고 수원아 집 구할꺼면 우리 아파트 근처로 구해. 내가 근처에 맛집 잘 알려줄테니까.”

“수원이 진짜 좋겠네. 규만 형님이 다른 건 몰라도 근처 맛집 하나는 완전히 다 꿰고 있거든. 저 형이 그냥 보기엔 아무거나 다 먹을 것 같은데 은근 미식가야. 저 살이 다 맛있는 거만 먹어서 찐 살이라니까.”

이건 시그널이 너무 확실했다.

마린스 내부 최대 파벌인 성골 그룹을 대표하는 실력자.

본래라면 작년 경하고 출신의 MVP급 포수 정병철이 승계했어야 하는 그 자리에 내가 고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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