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VS MLB?(4)
[초구!! 쳤습니다!! 최수원!! 큽니다!! 큽니다!! 담장!! 담장!! 넘어갔습니다!!]
[2회 초!! 마린스의 최수원 선수. 조쉬 앤더슨의 97마일 커터를 그대로 잡아당겨서 담장을 넘겼습니다!! 올해 나이 열아홉 살. 아니, 아직 생일도 지나지 않았으니 열여덟!! 고작 열여덟 살짜리 선수가 작년 메이저리그에서 사이 영 3위를 한 투수를 상대로 초구, 담장을 훌쩍 넘기는 홈런포를 쏘아 올립니다!!]
[지금 마운드의 조쉬 앤더슨 선수도 지금 자기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입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최수원 선수가 들리는 소문이 대단했다고요. 김대철 감독이 아주 적절한 위치에 4번 타자를 배치해놨습니다. 이런 파워라면 앞에 주자만 출루해준다면 큰 점수를 기대해볼 수 있거든요. 게다가 이어지는 타자가 누구입니까. 이규만이에요 이규만. 이번 시즌 마린스의 타선. 매우 기대가 됩니다.]
해설자와 캐스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6:0에서 6:1.
정말 다행이었다. 솔직히 그들이 받아들이는 오늘 경기는 단순한 구단과 구단의 연습경기라기보다는 국가대항전의 성격,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느낌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KBO와 MLB의 체급 차이는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와 국제 대회에서 한국팀이 거둔 성과들과 몇몇 KBO선수가 MLB에 진출하여 주목할만한 성적 덕분일까? 몇몇 KBO의 팬들은 그 체급의 차이라는 것을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한국 국가대표급, 혹은 KBO 올스타급 선수단 정도 되면 MLB에서도 유의미한 성적을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닐까? 하는 그런 기대감 말이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지.’
하지만 문제는 그런 팬들의 기대감을 산산이 부수는 것도 매우 곤란하다는 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적당히 MLB 팀과 경기가 되는 모습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1회 말 6:0. 타자 일순은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최수원이 가벼운 걸음으로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았다.
1/3가량이 찬 경기장. 그 가운데 절반 가량은 인근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었다. 아마도 한인 커뮤니티에서 단체로 관람이라도 온 모양이다. 최수원의 홈런에 그들이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스완 초이?”
제임스 콜이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퍼펙트나 노히트노런까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대단한 투수라고 해도 모든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낼 수는 없는 법이고 27개의 카운트 가운데 몇 개는 필드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이 안타가 될지 범타가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투수와 야수의 기량, 그리고 ‘운’이다.
하지만 그 ‘운’이라는 요소가 아무리 엉망이라고 해도 제임스 콜은 자신의 애슬레틱스가 고작 마린스에게 점수를 내주는 꼴은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저 담장을 아득하게 넘어가는 홈런을 보라.
저것이 과연 애슬레틱스의 ‘악운’인가? 아니, 아니다. 야구에서 단 두 가지. ‘삼진’과 ‘홈런’은 ‘기량’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지금 저 어린 타자는 메이저 최정상급의 투수를 상대로 홈런을 쳐낼만한 ‘기량’이 있는 것일까?
“알렉산더 맥도웰이 매일 자기 라이벌이라고 떠들고 다닌다는 그 소년입니다.”
“아······.”
전미 최고의 유망주.
작년 18세 120일의 터무니 없이 어린 나이로 메이저에 데뷔한 천재. 비록 메이저에서의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의 성공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메이저 성적이 부진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고작 열일곱 살에 불과하던 애송이가 루키와 싱글A 더블A를 박살내고 열여덟 살을 갓 넘긴 나이에 메이저까지 진출. 빅리그에서 무려 홈런을 기록했다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녀석이 틈만 나면 자기 라이벌이라고 떠들어대는 타자다. 방금의 홈런에 행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저 스완이라는 녀석이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타자라는 점이었다.
“젠장······.”
참으로 안타까웠다.
어째서 3년 전 자신이 마린스에 있을 때 저런 녀석이 없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저런 찬란한 재능이 마린스라는 똥통으로 간 것일까. 아무리 뛰어난 재능도 마린스라는 환경에서는 결코 피어날 수 없거늘······.
타석에 이규만이 올라왔다.
오랜 시간 마린스, 아니 KBO를 대표했던 완성형 타자다. 그가 감독으로 재임하던 당시 이미 30대 후반으로 전성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빅리그에서도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던 타자다.
물론······.
-부웅!!
“스트라잌!! 아웃!!”
그것도 어디까지나 3년 전. 아직 전성기의 끝자락이나마 잡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였지만. 고작 마이너, 그것도 AA 수준의 타자에게 솔로 홈런포를 맞았다는 것이 자존심의 생채기를 낸 것일까? 조쉬 앤더슨이 약간 흥분한 모습으로 이어지는 마린스의 타자 셋을 모조리 잡아냈다.
공수교대.
깔끔한 삼자범퇴 덕분일까? 최수원의 솔로 홈런포로 살짝 달아오를 뻔했던 덕아웃의 분위기는 이미 서리라도 내리고 간 것처럼 차가웠다. 그나마 가장 능글맞은 이정훈이 억지 미소를 띠며 사람들을 독려했다.
“자자, 그래도 1점 따라잡았잖아요. 이번에 깔끔하게 막고 슬슬 따라 가보자고요. 메이저 투수라고 해서 실투 하나 안 던지겠습니까?”
평소였다면 이정훈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줬을 마린스 성골의 리더 이규만이 침묵했다.
조금 전 타석에서 그는 처음으로 ‘격의 차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것은 외국인 용병 투수를 상대할 때도, 국제대회에서 메이저 투수를 상대할 때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100마일.
161km/h짜리 커터라니.
사실 97마일만 하더라도 터무니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60은 또 느낌이 다르다. 하물며 속구조차 아닌 커터다. 전성기였다면 가능했을까? 모르겠다.
선수들이 하나둘씩 자기 글러브를 챙겨 수비 포지션으로 향했다. 오늘 일루를 담당하는 것은 최수원. 이규만은 수비를 보지 않는 지명타자다. 덕분에 머리가 더 복잡했다. 차라리 나가서 수비라도 했다면 잠시라도 이런 생각들을 떨쳐낼 수 있었을 텐데.
2회 말 수비 이닝.
마린스에게 최악이었던 것은 머리가 복잡한 것은 이규만 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딱!!
3번 타자부터 시작하는 애슬레틱스의 타선.
딜튼 도일리의 초구가 공략당했다.
높게 뜬 강한 타구.
중견수인 이주혁이 달리기 시작했다. 100미터를 11초 초반에 주파하는 준족답게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작년까지 주전 중견수를 맡았던 강호창은 스프링캠프가 시작하는 시점까지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고, 결국 2주 전 팀을 떠났다. 그 빈 자리를 훌륭하게 메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였다.
오른쪽.
고개를 힐끔 돌려 공을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타구 판단을 잘못 한건가? 일단 멀리 가는 건 확실했는데······. 그러면 왼쪽으로.
빨랐다. 몇몇 팬들에게서 차라리 야구가 아니라 육상을 했더라면 한국을 빛낼 훌륭한 인재(人材)였을 것을 야구를 하는 바람에 인재(人災)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 발 다운 속도였다.
여전히 타구는 잘 보이지 않았다.
역시 애매할 때는 처음 선택이 맞다. 이렇게 된 이상 다시 오른쪽으로.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려 두 번이나 방향을 바꾸는 놀라운 신체 능력. 심지어 대단했던 점은 그렇게 쓸데없는 움직임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이 거의 타구 근처까지 다가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깔끔한 중전안타.
서둘러 땅에 튕긴 공을 따라 달린 이주혁이 빠르게 공을 주워들었다. 2루는 늦었다. 그렇다면 3루!!
나무랄 곳이 하나뿐인 매우 강력한 송구였다.
삼루수인 노형욱이 뒤로 물러나 점프하며 팔을 번쩍 들었다. 이미 주자는 삼루를 코앞에 둔 상황. 송구가 글러브 끝을 스치고 뒤로 날아갔다.
슬라이딩은 없었다.
그대로 삼루를 밟고 다시 홈으로. 노형욱이 서둘러 공을 줍기 위해 달렸다.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 혹은 3루타에 야수 실책.
이주혁이 상대 타자에게 사실상의 홈런을 하나 선물했다.
하지만 이 수비는 절대 최악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최악인 점은 이주혁의 이러한 수비가 마린스의 평균적인 수비보다 ‘아주 조금’ 부족한 수비였다는 점이었다.
마린스의 2회 수비 이닝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
2회 말.
아웃카운트 하나 잡고 2점을 더 헌납한 딜튼 도일리는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그렇게 올라온 녀석이 올라오자마자 삼진 하나를 잡을 때만 하더라도 아마 경기를 지켜보던 이들은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역시 디에고 로드리게스!! 작년 KBO에서 던지면서 크게 성장했다는 걸 증명해주는 피칭입니다. 사실 KBO에서 뛰다가 메이저로 다시 올라간 케이스가 없는 게 아니거든요. 이제 나이 서른. 아직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나이에요.]
하지만 연달아 안타만 두 개.
그리하여 점수는 10:1. 투 아웃에 1, 3루.
“또 보네?”
“그러게.”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다.
아니, 1.2이닝 동안 타자 이순에 들어가도 그리 썩 유쾌하지 않을 판에, 이순을 아예 끝내고 삼 순이라니. 아웃카운트 다섯 개 잡는 동안 출루만 무려 14번이 있었다는 뜻이다.
슬슬 사람들이 경기장을 뜨는 것이 보였다.
그래, 2회 말에 10:1. 심지어 이런 경기력 차이라면 이건 관중이 경기장을 떠나도 무죄다.
“방망이는 좀 돌리는 것 같던데? 전공이 야구라는 말 완전 농담은 아니었나봐?”
“어디 방망이만 잘 돌릴까. 치고 던지고 달리고 전부 다 잘하지.”
“근데 왜 여기 서서 이러고 있어? 그쪽 팀 지금 방망이도 문제지만 그보다 글러브에 기름 발라둔 게 더 문제 아니야?”
-뻐엉!!
“세이프!!”
“오, 제법인데?”
“이 정도야 뭐. 잡담 좀 한다고 견제사 당하기에는 너희 투수가 너무 허접해서 말이야.”
확실히 녀석의 이야기처럼 로드리게스가 견제구를 던져주는 건 티가 너무 크게 났다. 내가 미트에서 손을 빼서 가볍게 로드리게스를 향해 휘둘렀다.
“어쩔 수 없지. 메이저급 투수가 KBO에서 뛰는 건 무리니까. 대충 26인 언저리 정도 되는 투수만 해도 몸값이 장난 아니라고.”
“얼마나 받는데?”
“하기에 따라 다르지. 저기 로드리게스 정도 되면 얼추 백만 달러?”
“뭐? 백만 달러? 그렇게나 받는다고? 와, 이거 나도 너희 나라 용병 자리 알아봐야 하나?”
“우리 리그는 투수가 부족해서 타자는 그렇게 많이 못 받아.”
배와 가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낸 녀석이 잡담을 이어가며 슬금슬금 다시 세 걸음을 걸어 나갔다.
-툭
“아웃!!”
!?
“뭐야? 공이 왜 네 손에?”
“신경 썼어야지. 내가 말했잖아. 난 야구 전부 다 잘한다고.”
“미친······.”
미트에서 공을 뽑지 않은 채 공을 던지는 척 포즈만 취하는 간단한 트릭이었다. 보통 잘 넘어오지 않는데 녀석이 워낙에 나와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고 주루 코치도 10:1이라는 널널한 상황에 경기를 꼼꼼하게 지켜보지 않은 덕분에 통했다.
[맙소사. 최수원 선수!! 2회 초에 홈런을 쳐냈던 최수원 선수가 놀라운 기지로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아냅니다. 2회 말, 쓰리아웃 체인지!! 경기 계속됩니다!!]
경기가 계속됐다.
마린스는 애슬레틱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심지어 3회에는 선수단이 대거 교체됐음에도 그러했다.
조쉬 앤더슨은 4회까지 거의 언터쳐블의 포스를 뽐냈다. 나한테 홈런 한 방 맞고 화가 많이 났는지 구속이 최고 101마일까지 올라갔다.
101마일짜리 커터를 뻥뻥 던지는 녀석은 나에게도 제법 까다로운 상대였다.
4회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
이번에도 감으로 커터라고 생각했는데 포심이었다. 그대로 치면 내야땅볼각이라서 억지로 몸을 좀 비틀었다. 타이밍이나 배트의 움직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전성기 시절보다 반응이 빨라서 그런지 더 잘 맞았다. 아마 전성기 때 파워였다면 아슬아슬하게 담장을 넘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힘이 부족했다.
좌측 담장 앞 워닝트랙까지 날아가는 타구를 애슬레틱스의 좌익수가 미친듯한 속도로 달려가 그대로 잡아냈다. 앞선 타석에서 내 타구를 보고 후진 수비를 했던 탓에 가능한 수비였다.
아쉬운 뜬공 아웃.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를 외야 플라이로 잡아낸 조쉬 앤더슨 녀석이 이후 미련 없이 마운드를 양보했고 이후로 우리가 추가점을 몇 점 냈다는 점이었다.
최종 스코어 22:4.
그야말로 참사라는 표현이 더없이 적절한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