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VS MLB?(3)
10,000석 규모의 호호캄 스타디움이 이렇게 썰렁한 건 처음이었다.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당시 스프링캠프에서 몇 차례 오클랜드를 상대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이곳 호호캄 스타디움은 정말 관중으로 가득 찼었다. 하지만 지금은 좌석의 거의 2/3가량이 텅 빈 상태였다. 그나마도 대부분 관중이 포수 뒤편에 앉아있는 관계로 외야 쪽은 거의 무관중 경기가 아닌가 싶을 만큼 휑했다.
마운드에 조쉬 앤더슨이 올라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하던 투수다. 당시 3천 삼진에 250승 하고 은퇴하겠다고 아득바득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새로운 팀을 찾아다녔었다. 기록에 조금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좋은 투수다.
대충 따져보자면 명예의 전당 10수 커트라인에 걸치는 정도? 뭐, 어쩌면 그래서 더 기록에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올스타전에서 같은 팀으로 뛸 때, 나 때문에 승리랑 평자책, 삼진에서 몇 개를 손해 본 줄 아냐고 항상 투덜댈 때는 영 꼴보기 싫었는데 그래도 오래간만에 보니까 괜히 반갑다. 어쩌면 자외선과 세월을 직격으로 맞아 주름지고 거친 모습만 보다가 뽀송뽀송한 얼굴이라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뻐엉!!!
스프링트레이닝용 구장임에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달려 있는 거대한 전광판에 조쉬 앤더슨이 던진 공의 구속이 찍혔다.
PITCH SPEED 97 MPH
최신형은 구종까지 표기해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구형이라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지원하지 않는 듯싶다.
97마일. 그러니까 156킬로 정도인가? 며칠 전에 내가 최고 155까지 던졌으니 실로 무시무시한 속도다. 이제 고작 2월 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하지만 애당초 저 인간 시즌 중에 최고 구속은 108마일까지 찍는 인간이다. 나이 마흔이 다 돼서도 100마일을 찍었으니 한참 쌩쌩한 이십 대 중반에 97마일 찍는 건 아무리 2월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도 없다.
1회 초.
우리팀은 정말 최선의 라인업을 제출했다. 어차피 잘 되지도 않는 수비 따윈 개나 줘버린 그야말로 빠따에 몰빵한 참으로 마린스 다운 라인업이었다.
선두타자에 강라온. 그나마 수비가 사람의 커트 라인에는 간신히 들어오는 유격수라 합격점을 준 선수다. 빠따는 팀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정도.
-부웅!!
“스트라잌!! 아웃!!”
어림없는 하이패스트볼에 헛스윙 삼진.
그래도 볼 하나를 골라내며 조쉬 앤더슨이 공 네 개를 던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타자.
이정훈.
음주가무를 즐기고, 유흥을 사랑하는 팀의 주전 외야수. 보통 여기 애들 동양인은 성적 대상으로 잘 여기지 않는 편인데 이 인간은 요 한 달 동안 신기할 정도로 여자를 잘 만나고 다녔다. 그것도 매번 다른 여자들을.
-딱!!
깔끔한 초구 타격.
하지만 여자들을 짧게 만나는 것처럼 타구 역시 짧았다. 만약 이 경기가 자체 청백전이었다면 아슬아슬한 단타. 하지만 오늘 저쪽 필드에 서 있는 애들은 그래도 메이저를 한 번 정도는 밟아본 녀석들이었다.
마린스에서 극히 보기 힘든 쉬운 수비.
놀랍게도 내야 땅볼이 긴장감 하나 없이 아웃으로 연결됐다.
그리고 세 번째 타자.
노형욱.
오늘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타자다. 현재 KBO 전체를 통틀었을 때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삼루수로 작년에 0.299/0.357/0.526에 29홈런을 기록했다. 수비 역시 흠잡을 곳이 없다. 진짜 청백전 할 때 강라온, 노형욱이랑 같은 팀 하는 것과 저 암 덩어리 같은 놈들이랑 같은 팀 하는 거 느낌이 완전 다르다.
-딱!!!
타구가 포수 뒤편 관중석 2층 최상단으로 날아갔다.
큼지막한 파울.
마운드의 조쉬 앤더슨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공.
타석의 노형욱이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우드득
쫙 갈라진 배트.
그리고 높게 떠오른 타구. 결과는 내야 뜬공 아웃.
손바닥에 퍼진 통증 때문일까? 아니면 영 좋지 않은 결과 때문일까?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노형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광판에 쓰인 숫자는 97 MPH.
구속은 같았다. 하지만 구종은 달랐을 것이다. 노형욱이 대기 타석에 서 있던 나에게 말했다.
“커터였어. 속구랑 타이밍이 완전히 같은데 안쪽으로 반 개, 밑으로 반 개. 더 들어와. 미리 생각하고 치지 않으면 구분하기 쉽지 않겠어.”
“네.”
덕아웃으로 돌아와 미트를 챙겼다.
최근 외야 수비 연습을 꽤 자주 하긴 했는데 솔직히 어려웠다. 이 타구 판단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부분도 아니고 애당초 투타겸업을 하려고 하는데 첫해부터 체력부담이 큰 외야 수비는 좀 무리가 있다.
사실 오늘 아예 투수로 데뷔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마린스 타자들을 상대로는 딜튼이나 디에고랑 비교했을 때 내가 특별히 뒤떨어지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물론 그건 마린스 타자들 대부분이 워낙에 함량 미달이라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변별력이 매우 떨어지는 시험문제인 셈이다.
하지만 감독님의 선택은 딜튼 도일리.
어쨌거나 메이저 경험이 있는 외국인 투수였다.
마운드의 딜튼이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공을 매만졌다.
당연했다. 그는 KBO를 기준으로야 100만 달러를 받고 온 에이스급 투수지만 사실 MLB를 기준으로 하면 선발은커녕 필승조, 아니 패전처리조 수준의 선수다.
그리고 타석에 선 타자들은 26인. 그게 아니더라도 넉넉하게 40인에 포함되는 선수들.
딜튼 도일리의 공이 그의 손을 떠났다.
-딱!!
초구 타격.
우익수인 서경준이 달렸다.
서른네 살.
야식을 즐겨 먹어 복부에 지방이 제법 있음에도 불구하고 꽤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타구가 워낙에 좋았다. 서경준이 몸을 날리는 도박수 대신, 안전하게 한 번 튄 공을 낚아챘다. 좋은 판단이었다. 만약 거기서 몸을 날렸고, 공을 놓쳤더라면 마린스의 평균적인 수비를 생각해봤을 때,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구경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노아웃에 주자 1루.
주자가 두 걸음 반을 걸어 나갔다. 도루의 의사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에휴, 이게 무슨 의미 없는 경기인지. 하여간 오지랖 넓은 단장 때문에 수당 없는 잔업을 뛰게 생겼네.”
“글쎄, 너한테는 의미 없는 경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라도 감독 눈에 들어야 빅리그 경기 뛸 가능성이 1%라도 생기는 거 아니겠어?”
“응? 뭐야. 너 에스파뇰 할 줄 알아? 혹시 하프?”
“아니, 순수 한국인. 스페인어는 교양.”
“신기하네. 이거 애들한테 미리 이야기 해둬야겠네. 1루에서는 함부로 욕하지 말라고 말이야. 아, 그리고 내 말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난 엔리코라고 해.”
“난 최수원. 스완이라고 불러줘. 그리고 기분 나쁘지는 않아. 솔직히 아직 몸도 덜 풀렸는데 갑자기 마이너 팀이랑 붙이면 좀 짜증 날 수도 있지. 근데 이 경기 네 생각보다 높은 분들이 많이 지켜보고 있는 경기야. 열심히 뛰는 게 좋을 거야. 좋은 활약을 보이면 눈도장 찍힐 수도 있다고.”
“높은 분들? 걔들이 이런 경기를 왜?”
“왜긴 왜야. 나 때문이지.”
“뭐라고? 하하하하하.”
녀석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스페인어가 교양이라는 말 이제 이해했어. 너 전공은 농담이구나.”
“아니, 전공은 야구.”
-딱!!!
타석의 타자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큭큭, 아무튼 대화 즐거웠어. 그러면 조금 이따가 또 보자고.”
그리고 녀석이 나에게 손을 흔들고 2루로 가볍게 뛰어갔다.
2점 홈런.
마운드의 딜튼 도일리가 모자를 고쳐 썼다.
아직 우리는 하나의 아웃카운트도 잡지 못했다.
***
[헛스윙!! 아웃!! 잔루는 1, 3루. 1회 말 딜튼 도일리 선수가 간신히 삼진을 잡아내며 마침내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참 긴 이닝이었습니다. 딜튼 도일리 선수 같은 경우 작년에 밀워키 소속으로 AAA에서는 2.78을 기록했지만 메이저에서는 37.1이닝 동안 6.03을 기록하며 메이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작년에 이미 증명된 선수거든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물론 마린스에서는 1선발 감으로 100만 달러나 주고 데려온 선수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차라리 디에고 로드리게스 선수를 선발로 내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마이너 성적은 딜튼 도일리 선수가 더 좋았습니다만 디에고 로드리게스 선수는 작년에 KBO에서 던지면서 더 발전을 했거든요.]
[1회가 끝난 상황에서 점수는 6:0. 확실히 메이저리그의 벽이 아직은 높다는 것이 조금은 실감이 되고 있습니다.]
[마린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릅니다. 기회는 아직 여덟 번이나 남았습니다. 게다가 야구는 본래 수준 차이가 조금 나도 열 번 싸우면 세 번은 승리할 수 있거든요. 실제로 미일 올스타 전적을 보면 승률이 3할 정도 되거든요. 경기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습니다.]
“아쉽네. 이번 이닝에 한 번 더 보나 싶었는데 말이야.”
“자리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봐. 지금처럼 오래 이야기 나누기는 힘들겠지만 지나가면서 말은 걸어줄 테니까.”
“뭐라고?”
공수교대 직전.
1루에서 자기 덕아웃으로 돌아가던 녀석이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스완이라고 했던가? 역시 네 전공은 농담이 맞는 것 같아.”
“거참. 전공은 야구라니까 그러네.”
“그래, 뭐 어디 한 번 열심히 해봐. 네가 앤더슨을 상대로 2루타를 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말이야.”
[2회 초. 마운드에는 여전히 조쉬 앤더슨. 그리고 타석에는 마린스의 4번 타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마린스가 참 대담한 선택을 했습니다. 최수원 선수라면 이번 드래프트 1라운더로 20억 신인으로 떠들썩한 선수이기는 하지만, 아마추어랑 프로의 수준 차라는 건 상당하거든요. 물론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번 스프링캠프 동안 최수원 선수가 매우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고는 하니, 일단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최수원 선수에게 조금 다행인 부분이라면 조금 전 마린스의 수비 이닝이 아주 길었다는 점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통상적으로 수비 이닝이 너무 길어지면 투수가 감을 좀 잃어버릴 수 있거든요. 어깨도 좀 식어버리고요.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8분 정도가 딱 적절하고 10분을 넘어가는 건 좀 어렵지 않나. 뭐 그렇게 생각합니다.]
-뻐엉!!!
몇 개의 연습구.
직전 수비 이닝이 조금 길었던 탓인지 조쉬 앤더슨이 여덟 개 가량의 연습구를 던졌다. 최근 메이저 경기의 경우 경기촉진룰로 평균 다섯 개 가량의 연습구를 던질 수 있지만 아무래도 연습 경기였던 만큼 그런 부분에서는 자유로웠다.
나와 1루에서 대화를 나눴던 엔리케 녀석이 1루와 2루 사이를 지키고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석에 들어서서 왼손으로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배트를 두 번 강하게 꾹 쥐고 홈플레이트를 한번 톡 두들긴 뒤 자세를 바로 잡았다.
마운드의 조쉬 앤더슨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커터?
포심?
솔직히 이건 눈으로 보고 구분할 수 없었다.
그냥 감이다.
그리고 대체로 이럴 때 내 감은 잘 맞아들어가는 편이다.
-딱!!!
깔끔한 타격음.
97마일 커터가 배트의 스윗스팟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내가 전공은 야구라고 그랬잖아.”
엔리케 녀석이 담장 너머로 날아간 타구를 바라보며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