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VS MLB?(1)
조금 신기한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고려일보 이지연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2년 전에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 하시나요?”
기억 못 할 리가.
지연이는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내가 처음 사귀어 본 연예인급의 여성이었다. 당시 KBO 3년 차로 이제 막 터지기 시작했던 시절에 경기의 수훈선수로 뽑혀 인터뷰하는데,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부끄러워 얼굴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었다.
물론 그때의 지연이는 지금보다 조금 더 예쁘긴 했다. 아무래도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하는 것과 방송국 리포터로 활동하는 것은 외모에 들이는 공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본판은 어디 가지 않는 법이다. 내가 지금 그녀를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이후 있었던 수많은 경험 덕분일 것이다.
“네. 제가 홈런 기록 한창 세워나갈 때. 맞죠?”
“아, 기억하시는군요.”
“당연하죠. 사춘기 청소년은 원래 예쁜 누나를 쉽게 잊지 않는 법이거든요.”
“네? 예쁜 누나요?”
지연이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 최수원 선수 굉장히 재밌으시네요. 아무튼 오늘 저희 고려일보와 인터뷰 응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고려일보와의 인터뷰를 승낙한 것은 단순히 오지 않을 미래에 지연이와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시대의 신문 기사라는 것이 그렇다. 결국 트래픽을 쫓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같은 이슈를 다루더라도 기사에는 방향성이 있고, 논조가 있기 마련이다.
6경기 연속 무안타!! 200억 타자의 침묵하는 방망이.
6경기 연속 볼넷 출루!! 타격에는 컨디션이 있어도 눈에는 컨디션이 없다.
같은 결과이지만 제목만 봐도 그 느낌이 확 다르다.
적어도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온 이후, 나에 관한 고려일보의 기사는 언제나 후자에 가까웠다.
“최근 활발하게 교류전을 진행 중인 다른 팀과 달리 마린스는 자체 청백전 위주로 스프링캠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그 이유로 최수원 선수의 운용법을 들고 있는데요. 사실 최근 알려진 최수원 선수의 활약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긴합니다. 하지만 KBO의 경우는 메이저리그와 달리 아직 오타니 룰이 없지 않습니까? 이에 관해서는 혹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활약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2월밖에 안 됐고, 지금 중요한 건 캠프의 성적이 아니라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거라서, 별 의미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감독님의 의중이야 제가 알 수 없는 부분이고요.”
잠시 물 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리고 오타니룰의 경우는 뭐 MLB가 선진 리그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무조건 다 우리가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리그 상황에 맞춰가면 될 일이죠. 메이저리그도 결국 오타니 선수가 터무니 없는 활약을 보인 이후에 오타니 룰이라는 것을 만들었으니까요.”
“얼핏 듣기에는 겸손한 답변이신 것 같은데······. 제 귀에는 왠지 내후년에는 KBO에 최수원 룰을 만들겠다고 들리는데 혹시 오해일까요?”
지연이의 질문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입이 근질거리기는 했지만, 인터뷰에서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다 말했다가 역풍 불었던 것도 한두 번이다. 이런 이야기는 굳이 입밖에 내뱉지 않더라도 기자들이 알아서 다 올려준다. 그리고 한 7, 8년 정도 지난 다음에 방송 나갈 일 생기면 거기서도 충분히 떠들 수 있다.
“오늘 인터뷰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건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 아, 물론 답변 않으셔도 상관없고요. 이번 스프링캠프. 마린스는 정말 다른 구단과 교류전은 하지 않을 계획일까요?”
“글쎄요······. 스케줄은 전적으로 감독님과 코치님들의 영역이라서요. 다만 선수단 사이에 한 가지 소문이 있긴 합니다. 그 소문은 기자님이 더 잘 아실 것 같네요.”
“답변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다른 구단과 경기를 뛰게 되면 또 인터뷰 요청 넣도록 하겠습니다. 그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2월도 막바지.
마린스 팬들은 정보에 목말라 있었다. 다른 팀들은 그래도 교류전 등을 통해 자신들의 정보를 풀었지만, 내부 청백전만을 진행했던 마린스의 경우는 정말 베일에 꽁꽁 싸였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그 정보의 유출이 적었다.
물론 모든 청백전이 다 비공개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아마 역병이 돌던 시절처럼 국내 스프링캠프였거나, 혹은 그 이전처럼 일본 스프링캠프 정도만 됐더라도 경기를 직관하고 관련된 썰을 푸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은 너무 멀었다.
“그. 래. 서!! 내가 직접 왔다 이 말이지.”
푸짐한 체격. 빈말로도 호감형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얼굴.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 구독자 수 무려 14만에 이르는 너튜버. BJ봉민이었다.
“형님들. 이거 보이지? 와, 진짜. 내가 예전에는 일본 오키나와리그도 몇 번 가봤었거든. 근데 그거랑 또 완전 달라. 물론 오키나와도 부산에 비하면 꽤 따듯하긴 했어. 근데 그래도 경량 패딩 입거나 최소한 긴 팔은 입어야 했단 말이지. 근데 지금 이거 보이지? 반 팔. 여기 오늘 온도가 그러니까 24도. 크, 완전한 여름 날씨까진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솔직히 늦봄, 초여름 날씨지. 게다가 저기 저거 보여? 필드만 열 개야. 열 개. 진짜 이번에 마린스도 아주 제대로 마음먹었네.”
─마린스해체기원: 훈련장만 좋으면 뭐하누. 선수단은 개판인데.
─9개구단가즈아: 안 봐도 뻔하지. 얼마나 엉망이면 교류전 한 번을 안 하겠음.
─최동수원: 드디어 수원이 보는 건가?
─꽃하민: 봉민이 못생긴 얼굴 치우고 우리 하민이 얼굴 클로즈업하자.
─가을마린스: 쯧쯧, 소식 참 더럽게 늦네. 내일 마린스 교류전 하는 거 모름?
─사직야가다: 누구랑? 지금 애리조나쪽 간 다른 구단들은 다 자기들끼리 경기 잡혀 있지 않나?
─안경에이스: 미국팀이라고 하던데?
“크, 역시 우리 형님들. 정보가 보통이 아니야. 아직 기사로도 제대로 안 났을 텐데. 맞아. 지금까지 내부 청백전만 하던 우리 마린스가 드디어 교류전을 할거야. 그것도 무려 미국팀이랑!!”
[사직야가다 님이 2,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미국팀이면 설마 메이저?
[느그가프로가 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메이저겠음? 기껏해야 NCAA. 아니면 AAA팀 정도 되겠지.
[마린스역배몰빵 님이 3,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AAA만 되도 마린스보다 2단계는 높은 팀임. KBO가 AA~AAA 사이 리그라는데 마린스는 그런 리그에서 2할대 승률이잖아.
“어휴, 형님들. 후원 고맙고. 사실 어느 팀이랑 교류전이 잡혔는지는 아직 제대로 이야기가 밖으로 나온 게 없어. 근데 이렇게 기대 모으는 거 봐서는 대학팀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조금 있다가 발표한다니까 한번 지켜보자고.”
***
“감독님, 이거 연습 경기. 조금 시간 낭비 같은데요······.”
“나도 알아. 그리고 조금이 아니야. 완벽하게 시간을 버리는 일이지.”
“그런데 대체 왜?”
“젠장!! 왜긴 무슨 왜야. 위에서 하라고 하니까 하는 거지. 요즘 사무국 분위기 잘 알잖아. 세계화인지 뭔지. 저 빌어먹을 chinazi새끼들한테 굽실거리지를 않나, jap 새끼들부터 해서 gook 새끼들까지 캑터스리그에 합류를 시키겠다고 지랄들인데. 단장 놈이 그걸 덥썩 물어버린 거지. 빌어먹을. 괜히 그러다 우리 애들 다치면 욕먹는 건 우리인데 말이야. 게다가 하필 뭐? 마린스?”
제임스 콜 감독이 쉴 새 없이 낙하산으로 내려온 단장 놈 욕을 퍼부었다. 고학력의 어린놈을 단장에 앉히는 게 아무리 유행이라고 해도 그건 제대로 팀 프런트에서 뛰어본 경험을 가진 경우다. 하지만 이번에 단장으로 내려온 녀석은 그냥 어디서 어플이나 좀 만들고 야구 게임이나 하던 머저리였다. 녀석이 단장 자리에 앉은 이유는 단 하나. 구단주와 대학 동창이라는 이유밖에 없다.
제임스 감독의 끝없이 쏟아지는 분노에 연습 경기가 시간 낭비 같다고 이야기하던 코치가 말을 바꿨다. 억지로라도 긍정적인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저 불평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래도 AAA에 근접한 리그라고 그러셨잖습니까. 게다가 저희보다 한 달이나 먼저 훈련을 시작한 팀이니까 아예 시간 낭비까지는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AAA에 근접한 리그라고? 웃기지 말라고 해. 그래, 뭐, 백번 양보해서 KBO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마린스는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제임스 콜 감독.
그는 마린스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감독님이 계시던 때랑은 또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웃기는 소리. 자네는 그 팀에 안 가봐서 몰라······. 그 팀은······, 그 팀은······. 심연이야.”
3년 전.
마린스는 그가 감독으로 있던 팀이었으니까.
***
“이봐, 스완. 대체 왜 애리조나로 간 거야. 이왕 올 거면 플로리다로 왔어야지.”
“글쎄······. 그건 나한테 물어볼 게 아니라 우리 구단에 전화해서 문의해봐야 할 사항 같은데? 왜 스프링캠프로 더 멀리 떨어진 미국 동부가 아니라, 가깝고 날씨 좋은 서부로 왔는지 말이야.”
“쯧, 아무튼 아쉽네. 만약 플로리다로 왔더라면 내가 소개시켜줄 녀석들이 참 많았을 텐데 말이야. 너 우리 팀에서는 제법 유명해.”
“내가?”
“당연하지. 무려 8개월만에 마이너를 박살내고 메이저에 데뷔한 전미 최고 슈퍼루키 알렉산더 맥도웰의 라이벌인데 말이야.”
“어······. 음······. 글쎄다. 너 작년 9월 확장 로스터 때 잠깐 콜업되서 27타수 2안타치고 다시 마이너 강등되지 않았나?”
“······. 그래도 하나는 홈런이었어. 게다가 생각지도 않던 타이밍에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컨디션도 별로였고. 올해는 다를 거야. 아무튼 잘됐어. 올해 나는 여기서 신인왕을, 그리고 스완 너는 거기서 신인왕을 따고 만나자. 아, 그 한국 리그에도 신인왕이 있는 거 맞지?”
“맥도웰 너는 네 이마 안에 들어있는 그 뇌라는 기관을 조금 더 활용할 필요가 있어. 말을 할 때는 그 기관을 사용하는 게 좋을거야.”
“아, 미안 미안. 기분 나쁜 말이었다면 사과하지. 아무튼 세기의 라이벌인 너와 내가 동시에 신인왕을 따는 거야. 어때.”
“글쎄다······. 난 MVP까지 딸 생각이라서.”
수염이 숭숭난 알렉산더 맥도웰이 과장된 표정으로 스마트폰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억시!! 내 라이벌. 아무리 마이너라고 해도 프로는 프로인데. 대뜸 MVP 선포라니. 그래, 그 정도는 되야지 이 알렉산더 맥도웰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나도 올 해 신인왕을 넘어 MVP를 노려보지. 역시 나에게 어울리는 데뷔는 신인왕 MVP 동시 석권쪽이야.”
“응, 27타수 2안타.”
“큭······.”
알렉산더 맥도웰 녀석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딱히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아마 내일쯤 되면 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다시 전화를 걸어올 게 분명하다.
지금 그것보다 더 신경 써야 할 것은 오늘 있을 연습 경기였다.
스프링캠프가 시작되고 근 한 달. 열 번이 넘는 청백전을 거치는 동안 이제 슬슬 팀 내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돈이 됐다.
사실 경기를 좀 뛰어보면 선수들 스스로도 알 수 있다.
아, 쟤가 이번에 스타팅 멤버로 뽑히겠구나. 쟤는 좀 어렵겠다. 뭐 그런 것들.
물론 이런 판단에 있어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조금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관대함도 어디까지나 자기랑 비슷, 혹은 약간 나은 상대를 대상으로 ‘쟤보다는 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법이다.
총 여덟 경기에 출전하여 19이닝 11실점 6자책. 평자책 2.84.
그리고 27타석 23타수 11안타(2루타 2개, 3루타 1개) 4홈런 4볼넷.
슬래시라인 0.478/0.556/1.174. OPS는 1.729.
아무리 스프링캠프가 컨디션 조절에 방점이 맞춰졌다지만 이만한 성적에도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루키 취급을 한다면 그건 그냥 미친놈이다.
물론 이 바닥에서 선, 후배니, 연차니, 하는 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뜨면 열외’의 법칙은 어딜가나 유효한 법이다.
아직 리그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시범 경기도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마린스의 선수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번 시즌 ‘쟤’는 무조건 뜬다.
바로 오늘 경기를 시작으로.
[마린스 스프링캠프 첫 교류전!! 상대는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