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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02화 (102/305)

102화. 가능성(3)

그 순간 경기장에 잠깐 정적이 맴돌았다.

어······. 그러니까 지금 저게 뭐지?

공이 나빴나?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오늘 컨디션이 막 화끈하게 올라온 건 아니기는 한데, 그래도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낮은 코스 커터를 단박에 두들겨 담장을 넘겨버린다고?

사람들 마음의 소리가 선명하게 와닿는 느낌이었다. 뭐, 저런 반응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사실 컷패스트볼, 그러니까 커터는 치기 어려운 공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알고도 치기 힘든 공이다.

대구속의 시대.

201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메이저리그 전체에 유행하기 시작한 공으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변화구라기보다는 변화구를 흉내 내는 속구에 더 가깝다.

제대로 던진 커터는 다른 손 타자에게는 거의 언터쳐블.

아마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평속이 6~7km/h만 높았더라면 저 커터 하나로 메이저에 충분히 생존했을 것이다. 그리고 KBO와 MLB의 평속 차이를 생각한다면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뿌리는 저 커터는 KBO 선수들에게는 메이저 선수들이 느끼는 최정상급 마무리 투수의 커터나 다름없으리라.

그리고 나는 KBO 선수들에게 그렇게 느껴지는 커터가 아니라, 진짜 메이저 최정상급 마무리 투수의 커터를 약 2할 5푼 확률로 쳐내던 타자였다. 심지어 힘은 그 때에 비해 좀 부족하겠지만 반응속도나 컨트롤은 조금 더 낫다. 물론 제대로 된 커터를 멀리 보내는 건 사실 힘이기는 하다. 좀 어긋나더라도 때려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100마일짜리 커터의 이야기다. 기껏해야 90마일 남짓한 커터? 그것도 그냥 낮게 깔기만 한 공을 담장 밖으로 보내지 못한다?

전성기에 시즌 0점대 평자책 기록을 세우네 마네 하다가 나한테 두 경기 연속 솔로 홈런 처맞고 평자책 1.2로 시즌을 마무리했던 자칭, 타칭 양키스의 수호신 녀석의 눈물을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아 홈플레이트에 안착했다. 약간의 허전함이 느껴졌다. 아마 항상 홈런을 치면 나를 반갑게 맞아주던 쪼유의 빈자리가 아닐까?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덕아웃에 돌아가 바로 다음 이닝을 준비했다.

“와, 20억. 뭐야? 공만 잘 던지는 줄 알았는데 타격폼이 아주 죽여주네. 공항에서부터 범상치 않더니만 역시 건방질 만하네. 인정. 그 정도 실력이면 그 정도 건방짐은 갖춰야지. 어때? 오늘 저녁에······. 아 맞다. 여기 미국이지? 어쩐다······. 그래, 오늘 내가 크게 인심쓴다. 내가 술 두어병 테이크아웃 해올 테니까. 이따가 내 방에서 같이 한잔하자. 남자끼리 마시는 게 좀 우중충하긴 한데 그래도 괜히 위험 감수하느니 그게 낫겠다. 오케이?”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이정훈이 자기 마음대로 떠들어댔다.

얘는 무슨 알콜 중독자도 아니고 그래도 마냥 싫어하기도 좀 그런 것이 오늘 내가 이 녀석을 상대로 공을 던져본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플레이를 보면 뭐랄까······. 4년 42억이 납득은 간달까? 아니, 오히려 저 유흥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것까지 감안해서 적당히 디스카운트된 금액으로 느껴진다.

수비 범위 넓고, 공 잘 치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아, 저 올해가 첫 스프링캠프라서 구설수에 오르는 것도 좀 그렇지만 야구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죄송합니다.”

“응? 아냐, 아냐. 죄송은 무슨. 솔직히 너만한 실력이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도 없지 싶긴 한데······. 그래, 어차피 여기서 고추들끼리 비좁은 방에서 고급술 까느니, 한국 가서 놀자. 형이 좋은 곳 많이 아니까 걱정하지 말고.”

권위 의식 같은 거 없고 제법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비행기 탈 적에도 제일 먼저 나서서 나를 데리고 들어갔던 게 이정훈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팀 전체 분위기로 보면 좀 해악이 되는 인간인데 개인적으로는 딱히 나쁘지 않달까?

-딱!!

내야 땅볼 아웃.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아, 제 차례네요.”

“그래, 그러면 고생하고. 어지간하면 내 쪽으로는 공 좀 보내지 말아 주면 더 고맙고. 어제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머리가 좀 아프네.”

“노력해볼게요.”

글러브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워, 무슨 애가 너무 진지해 보여서 농담을 못 하겠네. 농담. 농담. 조크. 언더스탠?”

“농담이라면 많이 마셔서 숙취 왔다는 말씀이요?”

“아니, 그건 진짜고. 내가 위스키는 좀 잘 받는데 짐빔은 오래간만이라 그런가? 영 그렇네. 근데 공은 좀 보내도 괜찮아.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솔직히 숙취 조금 있다고 쳐도 내 수비가 여기선 제일 믿을 만할 테니까.”

자체 청백전이 계속됐다.

나는 청팀의 하위 타선을 상대로 1피안타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2이닝 무실점.

“수원아 한 타석만 더 서자. 할 수 있지?”

“네. 얼마든지요.”

그렇게 투수로서의 역할은 끝났지만 아무래도 고작 한 타석. 그것도 초구를 그대로 잡아당겨 담장을 넘기는 모습을 본 탓인지 감독님이 한 번 더 지켜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본래 피칭을 끝내면 아이싱에 들어가 주는 것이 가장 좋긴 했지만, 어차피 투타 겸업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실전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을 목표로 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아직 오타니 룰도 없는 KBO에서는 어쩌면 투구가 끝난 이후 야수로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오타니룰이 생기기 전의 오타니처럼 말이다.

청팀의 마운드에 최민혁이 올라왔다.

내가 20억이라는 터무니 없는 금액으로 그의 신기록을 깨기는 했지만, 본래 회귀하기 전의 역사에서는 최민혁이 은퇴하고 3년이 더 지났던 2043년 시점까지도 깨지지 않았던 대기록이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최민혁은 분명 그 금액에 어울리는 투수였다.

-딱!!

아, 물론 지금 말고.

그러니까 2년 뒤. 내가 KBO 첫 MVP에 도전하던 시점부터의 이야기다. 깔끔하게 2점을 내준 최민혁이 살짝 지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오른 것은 하민이 형이었다. 최민혁 다음에 마운드를 올라가서 그런가? 아니, 그냥 이건 백하민이라는 인간 자체가 뭔가 종이 달라서일 것이다.

과연······. 작년에 41.1이닝에 4.14의 평자책. 불펜 중에서 세 번째의 성적을 기록한 주제에 유니폼 판매는 팀 2위를 기록한 투수다운 비주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민이 형의 진정한 재능은 150을 던지는 어깨가 아니라 저 얼굴이다.

내가 깔끔하게 하위타선만 싹 정리하고 내려온 마운드였다.

솔직히 마린스가 좀 엉망진창이긴 했지만 서경준에 강라온. 노형욱에 이규만까지 이어지는 타선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상위타선의 빠따 ‘만’ 따진다면 그래도 KBO전체에서 중상위권 정도는 되지 않을까?

물론 하민이 형의 경우 신인다운 패기로 조금 몸을 일찍 끌어올렸다. 하지만 투수와 타자는 몸이 만들어지는 속도 자체가 다른 법이다.

144km/h의 속구.

노형욱이 시원하게 담장을 넘겼다.

최민혁과 마찬가지로 2실점.

하민이형이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리고 청팀의 마운드에 또다시 최민혁이 올라왔다. 좋지 않았다.

-딱!!

물론 최민혁의 멘탈 이야기다.

시원하게 담장을 넘어가는 타구를 지켜보는 최민혁의 표정이 조금 허탈해 보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뭐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야지.

내가 가볍게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았다.

그라운드는 여전히 고요했다.

***

김대철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BABIP이 어느정도 선수 개개인의 고유값이 있다는 것이야 이제는 상식이지만, 어쨌거나 투수의 공을 쳐내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안타로 연결되는 것은 어느 정도 운의 영역이다.

하지만 세 가지.

삼진, 볼넷. 그리고 홈런.

이 세 가지는 행운의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실력과 실력이 맞붙은 결과물이다.

물론 그럼에도 이것 역시 우연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특히 샘플이 작을수록 그 우연이라는 것이 미치는 영향은 더 크다.

최수원이 고교 레벨에서 상대할 투수가 없는 압도적인 홈런 타자였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뭐? 과거 고교 레벨에서 역사적인 홈런 타자였던 어떤 선수도 프로판에서 거의 6년이나 2군을 전전한 끝에야 간신히 그 포텐셜을 터트렸다. 프로와 아마의 수준 차는 그만큼 크다. 심지어 2000년대 중반이었던 당시와 2020년대 중반인 지금.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수준의 차는 더욱 더 커졌다. 지금 생짜 고졸 신인 1년차가 신인왕을 타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 것이 그를 증명한다.

하지만 지금 최수원이 보여준 모습은 달랐다.

2타석 연속 초구 홈런.

물론 투수들의 몸은 최상이 아니다. 실제로 팀의 다른 타자들도 이 투수들을 상대로 제법 괜찮은 타격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작년 서울 엘리츠에서 141.2이닝 2.87에 10승을 기록했던 디에고 로드리게스다. 작년 녀석에게 두 경기나 영혼까지 털려봤기에 그 커터가 얼마나 까다로운 공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민혁은 또 어떤가.

물론 10억 5천만원이라는 계약금은 오버페이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2년 전, 고졸 1년 차에 신인왕을 탈 ‘뻔’했던 선수다. 아마 시즌 막판 부상만 아니었더라면 신인왕은 그의 차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투수들을 상대로 대뜸 2타석 연속 초구 홈런?

그것도 아슬아슬한 수준이 아닌, 타격의 순간 누구나 ‘아, 저건 넘어갔다.’라고 느낄만큼 거대한 홈런?

확실하다.

쟤는 진짜다.

김대철 감독의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박 코치.”

“네, 감독님.”

“영양사한테 연락해서 최수원이랑 따로 1:1 온라인 미팅 잡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 녀석 외야 수비 테스트도 좀 제대로 하고.”

“외야 수비 테스트를요?”

“올해는 규만이가 있잖아. 어디서라도 뛰어야지. 보니까 몸도 날래던데 저런 몸에 157까지 던지는 어깨면 기본은 해주겠지. 오른쪽 수비가 되면 좋겠는데······.”

“근데 이제 1년 차인데 체력이 될까요?”

“그건 이제부터 차차 알아봐야지.”

고작 2이닝의 피칭.

그리고 두 번의 타석.

그것만으로 최수원이라는 녀석의 실력을 확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고등학교에서 얻어낸 기록이, 세계대회에서 얻어낸 기록들이 그의 추측에 힘을 실었다.

최수원은 외국인 투수에 ‘버금’가게 공을 던질 포텐셜이 있었고, 현재 팀의 최고 타자인 노형욱에. 아니, 어쩌면 팀 역사상 최강의 타자였던 전성기 이규만에 필적하게 방망이를 휘두를 가능성이 존재했다.

투타 양면에서 가장 강력한 선수. 하지만 사람인 이상 체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차라리 최수원이 둘로 나뉘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아, 그리고 이 경기 끝나면 NPB랑 MLB. 투타겸업에 관한 기록들도 좀 다 가져오고. 선수 운용에 관한 기록들 위주로.”

“네, 알겠습니다.”

***

이번 마린스의 첫 청백전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마린스 청백전을 보겠다고 찾아올만한 팬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스프링캠프까지 따라오는 팬들이 많았지만, 미국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번 청백전 비공개의 이유는 역시 기자들이었다.

창원 블레이즈가 창단된 이후, 마린스는 마린스였던 반면에, 블레이즈는 꾸준히 강팀이었다. 심지어 9년 차에는 마린스가 창단 45년 동안 단 한번도 이루지 못했던 통합 우승까지 이뤄냈다. 경남권의 인기를 싹 끌어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블레이즈가 창단되기 전 마린스는 그딴 성적에도 불구하고 전국 최고의 인기 구단이었지만, 블레이즈 창단 이후 광주 호크스에게 인기 1위 자리를 내줬다. 그리고 그 인기는 점점 떨어져 본래 1:9정도 됐던 경남지역 지지도 비율은 어느새 3:7까지 크게 따라잡힌 상태로 최근에는 인기 2위 자리까지 피닉스에게 내주고 3위로 주저앉았다.

몇몇 전문가들은 그 현상을 피닉스는 꼴찌를 거듭해도 인기가 떨어지지 않지만, 마린스는 꼴찌를 거듭할수록 그 인기가 근처에 있는 블레이즈로 흡수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린스는 여전히 인기팀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비공개로 청백전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몇몇 스포츠 기자들은 개인적으로 선수들, 혹은 코치에게 인터뷰를 접촉해왔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

고려일보의 이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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