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가능성(2)
무뚝뚝한 표정의 타자 하나가 타석에 들어왔다.
강라온.
마린스의 주전 유격수로 작년 127경기에 출장하여 0.261/0.341/0.403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는 작년 리그 전체 유격수 가운데 네 번째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으며 팀 전체를 통틀었을 때도 노형욱과 이규만 다음가는 성적이었다.
조금전까지 수원이 위치했던 불펜의 투수 하나가 불안한 눈동자로 그를 살폈다.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 스프링 트레이닝 첫 청백전인데 상대팀의 타자들이 죄다 무시무시한 탓이다.
“그런데 재영 선배님. 감독님께선 오늘 라인업을 일부러 이렇게 하신 걸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규만 선배님에 형욱 선배님. 게다가 라온이까지. 청팀이 타격이 전체적으로 좀 더 좋은 것 같아서요. 물론 대신 우리 백팀 쪽 투수진이 조금 더 무게감 있는 것 같긴 하지만요.”
“아, 그거. 뭐 당연하지. 한쪽은 투수 쪽에 힘줬고, 또 한쪽은 타격에 살짝 더 힘주고. 투타를 다 시험해보는 거지. 게다가 덤으로 내야 수비진 상태에 따라 투수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 그리고 포수랑 궁합은 또 어떤지까지 다 보실 거야.”
마운드의 최수원이 1루를 한번 살폈다.
서경준이 세 걸음 반을 걸어 나와 몸을 한껏 낮췄다.
34세.
올해부터 3년 27억을 받는 외야수.
다년 계약으로 총액 백억에 가까운 선수들이 거듭 나오기 시작한 리그 상황에서 3년 27억은 적어 보일 수 있었지만 사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매우 큰 금액이다. 옵션을 제외해도 1년 평균 7억에 가까운 돈을 받는다는 의미인데 이는 마린스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액이다.
게다가 오늘 경기는 기껏해야 청백전. 그리고 2월 초의 덜 풀린 몸 고려하면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기는 했지만 절대 무리한 도루는 없다.
와인드업.
최수원의 공이 미트를 꿰뚫었다.
헛스윙.
강라온이 잠시 손을 들어 타석에서 물러났다.
‘빨라······. 그리고 높아.’
대기 타석에서 배트링을 끼고 타이밍을 맞췄다. 하지만 맞지 않았다. 지금까지 적당히 던진 것일까? 아니면 이번 공이 쥐어 짜낸 공인 것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딱히 상관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최수원이 던지는 공이 직전, 서경준을 상대로 던지던 공보다 더 빠르다는 점이었다.
좋았다.
강라온이 다시 방망이를 쥐고 타석에 섰다.
지난 며칠. 그는 저 어린 유망주를 관찰했다. 그와 어울리는 선수는 둘. 백만달러짜리 용병 투수인 딜튼, 그리고 작년의 1라운드인 백하민이었다.
강라온이 생각할 때 마린스에는 두 덩이의 쓰레기 더미가 존재했다.
그 가운데 이정훈이 주축이 되는 유흥파는 누가 봐도 쓰레기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작은 외부에서 트레이드로 온 선수들, 그리고 경남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드래프트로 온 선수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경남 연고가 아닌 선수들은 주로 그쪽으로 모여들어 서면역으로 나가 유흥을 즐기는 쓰레기로 발전한다.
그리고 또 하나.
본래 마린스의 가장 큰 똥덩어리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경남을 연고로 하는 놈들. 그래도 그들은 유흥을 즐기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팀의 최고참인 이규만부터가 그런 쪽은 아니었다. 하지만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해야할까? 파이팅이 없다. 게다가 무슨 야식을 야식을······. 물론 야구 선수는 긴 시즌, 많은 경기를 치러야 하는 만큼 잘 먹어야 하는 건 맞다. 게다가 평일 저녁 경기가 주인만큼 식사 시간이 뒤로 밀리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좀 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수원과 백하민은 합격이었다.
또한, 긍정적인 부분은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점이다.
KBO에 한정하여 그 말을 다시 해석하면 야구는 결국 ‘토종 선발 투수 놀음’이다. 두 명의 외국인 용병이 당연히 프론트라이너급 투수가 돼준다고 가정할 때, 한, 두 명 정도만 제대로 된 토종 선발이 나와주면 가능성이 있다.
개똥 위에도 꽃은 핀다.
‘자, 어디 던져 봐라.’
경남 출신의 저 늙은이들은 안된다. 그들과 다투다 더 거대한 똥이 돼버린 이정훈을 비롯한 쓰레기들도 안된다. 결국 마린스가 쇄신하는 방법은 1차 드래프트 폐지 이후 꾸준한 하위권 성적으로 모여든 젊은 피들의 활약뿐이다.
마운드의 최수원이 ‘또’ 와인드업했다.
특유의 빠른 타이밍.
1루에 있던 서경준이 달렸다.
그는 달리면서 생각했다.
‘아, 이거 엿됐는데?’
투수의 타이밍을 훔치지 못했다.
스타트를 끊는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최수원의 공을 던지는 템포가 너무 괴랄하게 빨랐던 탓이다.
강라온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공이었지만, 서경준의 도루를 돕기 위한 스윙이었다. 마린스의 주전 포수인 최진웅이 미트로 공을 낚아챘다.
그리고 빠르게 일어나 2루를 향해 공을 뿌렸다.
살짝 빠지는 공.
이루수인 김훈이 손을 뻗어 그 공을 잡아냈다. 그 타이밍은 서경준이 2루에 도착하는 시간보다는 아주 극미하게 빨랐다. 하지만 2루 도루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공을 잡는 것으로 다가 아니다. 지금은 포스아웃 상황이 아니었으니 태그가 필요하다.
쭉 뻗었던 팔을 그대로 내려 슬라이딩하는 서경준을 향해 휘둘렀다. 동시에 서경준의 쭉 뻗은 팔이 2루 베이스에 닿았다.
-툭
심판의 양손이 번쩍 올라간다.
“세이프!!!”
덕아웃에 앉아있던 감독이 자신의 턱을 긁적였다.
“세트 포지션 장착이 필요하겠는데?”
“네, 신경 쓰겠습니다.”
물론 김대철 감독은 바보가 아니었다. 와인드업임에도 불구하고 최수원이 타이밍을 뺏기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문제는 포수인 최진웅의 도루 저지였다. 미트에서 공을 뽑아 던지는 타이밍도 늦었고 코스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최진웅의 도루 저지는 이미 엉망인 걸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무사에 주자 2루.
볼카운트 0-2.
타석에 타자는 강라온.
안타 하나면 추가점이 나오는 상황.
강라온이 생각했다.
‘커브는 쉽게 던지지 못해.’
서경준은 최수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사흘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최수원을 지켜봐 온 강라온은 알 수 있었다. 최수원은 지독하게 에고가 높은 녀석이다. 아닌 척하지만, 녀석은 기본적으로 마린스의 선수 대부분을 깔보고 있다.
‘아니, 아닌 척하는 게 맞긴 한가?’
녀석의 커브는 일품이다.
하지만 녀석은 최진웅을 믿지 못한다. 커브를 카운트를 잡는 유인구로만 사용할 뿐이다, 그렇기에 결정구는 언제나 속구다.
최수원이 또 다시 와인드업했다.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을 더한다. 이제는 메이저리그에서는 유행이라는 말도 무색할 만큼 오래된 어퍼 스윙.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다운스윙을 고집하는 타자들이 많았고, 덕분에 낮게 깔린 공은 유효하다. 그런 의미에서 강라온의 크게 퍼올리는 스윙은 분명 경쟁력이 있었다. 하지만 최수원의 공은 조금 다르다. 과감하게 높은 코스로 속구를 찔러온다. 그야말로 평소 녀석이 보여주는 자신감에 어울리는 공이다.
궁합은 맞지 않았다.
하지만 대충 예상한 공을 쳐 내지 못 해서야 프로라는 이름이 아깝다. 물론 팀에는 프로라는 이름이 아까운 녀석들이 태반이긴 했지만.
묘하게 빠른 템포. 그리고 타이밍을 파악하기 힘든 디셉션. 머리 뒤에 있던 손이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0.15초.
그의 시선이 공의 궤적을 따랐다. 시각으로 파악한 정보를 뇌가 인지하고, 그 궤적을 경험적으로 계산하여 판단했다.
쳐야 하는 공.
높은 코스 빠른 공이다. 전신의 근육이 그 신호를 받아들였다. 여기까지 0.225초 이제는 몸에 지겹도록 박아넣은 동작의 수행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뤄지느냐만이 남았다. 이것만으로도 강라온은 훌륭한 타자다. 보통의 타자들보다 무려 0.025초나 그 시간을 줄였으니, 그는 분명 150의 공을 ‘보고 칠’ 자격이 있었다.
강라온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 자신이 정해둔 코스보다는 아주 조금 높았지만 그래도 충분히 내야를 꿰뚫을 수 있는 힘을 품은 방망이가 공을 향해 움직였다.
0.275초.
그 순간 강라온은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늦었다. 스텝은 이미 내딛었고 방망이에 실린 힘을 회수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몸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여전히 공은 오지 않았다. 아니, 왔다. 다만 이미 강라온의 방망이는 너무 멀리 나왔고 최수원의 공은 강라온의 두뇌가 예측한 코스보다 20센티는 차이 나는 곳으로 파고 들어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비틀거리던 자세를 바로잡은 강라온이 마운드의 최수원을 바라봤다. 여기서 커브를 던진다고?
마운드의 최수원은 웃고 있었다.
자신을 삼진으로 잡은 것이 기쁜 것일까? 강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저 미소의 의미는 그게 아니다. 어찌 저 표정을 기쁨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무려 자신을 상대로 삼진을 잡아냈음에도 마운드의 투수는 직전 도루를 허용한 것에 화가 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터무니 없이 지독한 에고이며 어떻게 보면 강라온이라는 타자에 대한 모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라온은 최수원의 저 모습이 싫지 않았다.
‘일단은 합격.’
자신도 모르는 사이, 최수원이 합격판정을 받았다.
물론 강라온은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보류 판정을 받았지만.
***
-스읍······.
생각보다 나쁘지가 않았다. 특히 지금이 2월 초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서경준도 그렇고, 강라온도 그렇고, 노형욱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의외로 이규만도 42세라는 나이에 비해 반응속도 등이 나쁘지 않다.
‘왜지?’
솔직히 너무 옜날 일이라 자세한 부분은 좀 가물가물하긴 하다. 특히 마린스 같은 경우는 아예 경쟁 상대가 아니었으니 더 가물가물하다. 그냥 용병이 폭망이었다는 점, 그리고 최민혁이 꽤 괜찮은 투수였다는 점. 원래 작년에 백하민 대신에 마린스에 입단한 정병철이 미쳐 날뛰었다는 점 정도만 기억한다.
아,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마린스가 올해도 기념비적인 꼴찌를 기록했었다는 점 역시도.
아무튼 1이닝을 깔끔하게 막아내고 마운드를 내려와 덕아웃으로 돌아갔을 때, 작전코치님이 나에게 다가왔다.
“수원아, 타석도 준비해라.”
“네.”
다시 말하지만, KBO는 아직 오타니 룰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뭐 이상하거나 잘못된 일은 아니었다. 야구는 FIFA처럼 세계적인 중앙 단체가 없는 로컬 스포츠였으니 미국에 생긴 룰을 한국이 꼭 따라가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본래는 내가 선발을 뛰는 날에 타자로 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강판당하는 순간 우리는 지명타자를 잃게 되고, 그 말인즉 우리는 타선은 8명의 타자와 한 명의 방망이를 든 허수아비로 이뤄진다는 뜻이었으니까.
물론 작년 마린스 타선을 보면 한 절반 정도는 방망이를 든 허수아비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오늘은 어디까지나 연습 경기였다. 어차피 선수들의 역량을 점검해보는 시간이었으며 감독이 곧 법이다.
2회 말.
1이닝 던지고 강판당한 딜튼과 달리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여전히 마운드에 올라와 있었다. 확실히 이제 2월이라 몸이 많이 안올라오긴 했는지 좀 두들겨 맞긴 했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점수는 내주지 않는 것이 과연 2.87을 기록한 투수였다.
“확실히 체력만 빼면 나무랄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야 엘리츠한테 그저 땡큐지. 저만한 투수를 안 잡다니 말이야. 심지어 보류권도 행사 못한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어주다니. 쯧.”
-딱!!
내야 땅볼.
타자가 1루를 밟지 못하고 아웃됐다.
그리하여 2회 말, 투 아웃 주자 2루.
솔직히 타석을 준비하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3회쯤 돼서 차례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찌어찌 내 차례가 돌아왔다.
이상했다. 내가 생각한 마린스라면 여기서 폭풍 삼진을 당하는 것이 정상인데 타자 하나가 ‘출루’를 하다니.
아무튼 타점을 올릴 절호의 기회.
타석에서 디에고 로드리게스를 바라봤다.
올해 31세.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메이저를 꿈꾸기 힘든 나이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땅은 그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기회의 땅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작년에 제법 괜찮은 성적을 올렸었으니 자신감도 넘칠 것이고.
상대는 이제 막 프로에 올라온 19살짜리 애송이.
뭐, 역대 최고의 유망주라는 알렉산더 맥도웰이 라이벌이라고 떠들어 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메이저 물까지 먹어본 투수다. 프로에서 한 경기도 못 뛰어본 애송이에게 위축될만한 커리어는 아니다.
주특기는 기가 막히게 들어오는 149km/h의 커터. 그 정도면 속구로 들어와도 공략하기 힘든 공일 텐데 존 근처에서 지저분하게 움직이기까지 한다. 어려울 만하다.
-딱!!
아, 물론 KBO를 기준으로 했을 때.
타구가 담장을 사뿐하게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