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00화 (100/305)

100화. 가능성(1)

솔직히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MVP급 선수다. 그것도 KBO가 아니라 MLB에서 MVP급 선수다. 비록 MVP는 한 번도 못 받았다지만 아무튼 MVP급 선수다.

‘테드 윌리엄스 이후 가장 위대한 타자.’

누가 먼저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몇 언론에서는 나를 저렇게 불렀다. 아, 물론 우리 지역 언론 위주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렇다.

지금 내 타격은 저런 소리를 듣던 전성기에 ‘버금’간다. 엄밀히 말해서 그 시절이 미약하게나마 나은 건 사실이다. 근력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저건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무턱대고 지명 타자로 뛰던 시절 같은 몸을 만들 수도 없으니까, 대충 빗맞은 타구를 담장까지 날려보내던 시절의 힘은 다시 구현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대신 지금의 나는 공을 던진다.

그것도 KBO를 기준으로 하면 상위 선발급으로 공을 던진다. 그리고 이건 MLB MVP급 타자만큼이나 귀한 자원이다.

KBO가 괜히 외국인 용병으로 투수를 최우선으로 데리고 오고, 역대급 타자 신인에게는 5억 계약금도 벌벌 떨면서 투수에게는 10억을 턱턱 안겨주는 리그인 게 아니다.

그래서 생각했다.

하민이 형이 좀 제대로 던져주고, 최민혁이 본래 역사만큼 던져준다면, 거기에 MVP급 타자인 동시에 토종 프론트라이너급 투수인 내가 합류한다면 어쩌면 마린스도 우승 후보 아닐까? 1년 만에 KBO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떠날 수 있는 거 아닐까?

‘아······.’

멍청한 생각이었다.

딜튼이 마린스 코치진의 역량을 오해했던 것처럼, 나는 마린스 선수단의 역량을 오해했다. 그래도 고교야구에서 고르고 골라 뽑아온 녀석들이니 당연히 모든 포지션에서 고교야구 에이스급 역량들은 다들 가지고 있겠지. 라는 생각은 너무 나이브한 생각이었다.

-딱!!

공이 낮게 날았다.

조금 빠른 타구였다. 타자 주자인 청팀의 삼루수 노형욱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는 100kg의 거구에 딱 어울리는 속도로 달렸다. 문제는 우리 팀 유격수인 정지운이었다. 주전 유격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1년에 한 30경기 정도는 출장하는 내야 유틸인 그의 수비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나쁜 수준이었고, 조금 더 현실적으로 이야기하면 처참한 수준이었다.

빠르게 날아드는 타구는 당연히 못잡는다.

그러면 느린 땅볼은 잘 처리하냐면 그렇지도 않다. 저 정도면 앞으로 달려 나와서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제 자리에서 공이 오기를 기다린다. 글러브를 몸의 중심에 둔 완벽하게 안정적인 자세다. 그렇게 공을 잡아 글러브에서 공을 빼는데 이게 또 미묘하게 느리다. 심지어 최진웅이 장타자였던 덕분에 유격수 수비 위치가 상당히 후진된 상태이기까지 했다.

-뻐엉!!

당연히 결과는?

“세이프!!”

불펜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나도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holy shit!! what the fu······.”

마운드에 선 딜튼은 얼마나 빡이 칠까.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딜튼!! 컴 다운, 컴 다운. 릴렉스. 릴렉스. 슬로우. 원 아웃, 오케이?”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딜튼이 대충 심한 욕을 내뱉는데 다행이랄까?

그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 팀의 주전 포수 최진웅은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

뭐, 본인도 어감을 봐서는 대충 욕인 건 알겠지만 그래도 정확히 못 알아들어서일까? 아니면 원체 성격이 좋은 탓이라서일까? 허허 웃으면서 딜튼을 진정시킬 뿐이다.

“아, 거 양키새끼 성격 존나 더럽네. 딱히 실수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진웅 선배가 존나 잘 친 거 구만.”

“메이저리그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차츰 적응하지 않겠어?”

이걸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물론 그 이유가 100%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100만 달러짜리 용병 딜튼 도일리가 평자책 7점대를 찍은 이유 가운데 매우 큰 부분은 바로 이 환장할 것 같은 수비, 그리고 개똥 같은 팀 분위기에 있다.

“@#$%@#$^%[email protected]$#!!!!!”

가끔 흥분을 했을 때 오히려 더 잘 던지는 투수가 있다. 그래서 가끔 투수 가운데는 마운드 위에서는 일부러라도 더 크게 화를 내는 놈들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딜튼 도일리는 그쪽은 아니었던 것같다.

-딱!!

팀의 최고참. 올해를 끝으로 은퇴가 확정적인 이규만이 흥분하여 가운데로 몰린 딜튼의 공을 시원하게 때려냈다.

석 점 홈런이었다.

***

“구위는 괜찮은데 멘탈이 좀 약한 것 같군. AAA에서도 이랬었나?”

“아뇨, 기록으로 보면 득점권에서 오히려 더 잘 막아내는 타입이었습니다. 다만 그 경우 좀 힘으로 윽박지르는 경향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몸이 좀 덜 풀려서 힘이 충분히 안 올라온 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아무튼 이대로는 의미가 없어 보이니 다음 투수를 올려보자고.”

최근 며칠, 훈련을 진행하는 동안 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투수는 둘로 좁혀진 이후였다. 부상에서 돌아온 10억 5천만원짜리 투수 최민혁. 그리고 묘하게 건방진 독불장군 20억짜리 신인 투수 최수원. 그렇기에 두 명의 용병 투수를 시험해본 다음은 자연스럽게 이 두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네, 다음 이닝부터 최수원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2회 초.

최수원의 차례가 돌아왔다.

‘시발······.’

상대 팀 마운드에 최수원이 올라오는 모습을 본 한명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프로 바닥에서는 아무것도 증명해낸 것이 없는 애송이가 단지 공이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3선발의 가장 강력한 후보라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물론 코치는 이번 청백전이 선발 투수 낙점이나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 하긴 했다. 하지만 팀의 1, 2선발이 확실한 용병 투수 둘이 양팀에 선발로 등판하고 그 뒤로 곧바로 최수원과 최민혁의 순서로 이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심지어 저쪽의 3선발은 백하민. 지난 시즌 막판부터 선발로 전환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무성했던 8억 5천만원짜리 대형 유망주다.

-뻐엉!!

“스트라잌!!”

분명 강력한 속구였다. 하지만 그게 도저히 치지 못할 공인가 하면 사실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타석에 3년 27억의 우익수 서경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진짜 스트라이크냐라는 몸짓이었다.

그는 바로 어제 명훈과 피자를 나눠 먹으며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최수원? 안 그래도 우리끼리도 말이 많아. 신인 주제에 지가 벌써 무슨 슈퍼스타라도 된 것처럼 말이야. 학교에서 잘하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었으니 선후배도 모르고 그렇게 하던게 버릇이 된 거지.”

“그렇습니까?”

“그렇다니까.”

“그럼 어떻게 제가 기강 좀 한 번 세게 잡아볼까요?”

“이 새끼 아주 큰일 날 소리하네. 규만이 형이 때리고 집합시키고 그러는 거 진짜 싫어하는 거 몰라? 걍 내버려 둬. 원래 그렇게 허파에 바람들고 그런 건 현실을 깨달으면 쪼그라드는 법이야. 너도 많이 봐서 잘 알잖아.”

“그건 그렇죠. 고등학교 때 왕놀이 하던 놈들이 2군에서 급속도로 구겨지는 거.”

“그래, 최수원이 쟤 공 던지는 거 보니까 몸도 제대로 안 만들었고 저 정도면 청백전 한 번 하면 그대로 구겨진다.”

서경준은 이 바닥에 15년이나 있으면서 충분히 많이 봤다.

저런 유형의 자존심 강한 천재들이 박살나고, 구겨지고, 다시 회복하지 못하게 되는 수많은 경우를.

타석의 서경준이 크게 호흡했다. 뭐, 여기서 미리 좀 깨져보는 것도 저 녀석의 장기적인 미래를 위해서는 괜찮으리라.

고등학교 레벨에서는 컨디션이 별로이건, 몸을 좀 덜 만들었건 150짜리 공이면 복판에 펑펑 던져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판은 다르다. 방금과 같은 공이 제대로 코스 내로 들어온다면 얼마든지 쳐낼 수 있다.

두 번째.

마운드의 최수원이 와인드업했다.

묘하게 빠른 타이밍. 디셉션이 생각보다 매우 좋은 녀석이다.

그렇기에 지난 사흘, 유심히 지켜봤다.

반 박자 빠르게.

최수원의 손끝에서 야구공이 날아올랐다. 서경준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스는?

존에 살짝 걸치는 코스.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망이를 멈춰 세운다.

-뻐엉!!

오늘 구심을 보고 있는 배터리 코치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조금 전의 어필이 먹혀든 모양이다.

볼카운트 1-1

마운드의 최수원이 웃었다. 방금 잡아줬던 공이랑 똑같은 코스로 공을 넣었는데 웃는다고? 화가 나면 웃는 타입인가?

세 번째.

서경준이 머릿속에 담아둔 공은 두 가지.

속구와 커브다. 다른 공도 몇 가지 던지는 것 같지만 커브와 속구에 비해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다. 뭐, 굳이 따지자면 다른 변화구가 너무 허접하다기 보다는 커브의 완성도가 너무 높은 탓이다.

솔직히 최수원이 던지는 커브는 다른 녀석들의 커브와는 다르다. 서울 재규어스의 외국인 에이스인 요한슨이 결정구로 던지는 커브와 결이 비슷하다. 손을 떠나는 순간 커브라는 것을 인지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서경준은 최수원이 결정구로 커브를 던질 거라고 예상했다. 이번에 들어올 공은 속구. 미리 잡아둔 타이밍에 맞춰 방망이를 휘두른다.

-부웅!!!

-퍼억!!

“스트라잌!!”

떨어지는 커브볼. 최진웅이 미트로 공을 받는 것은 실패했지만 다행히 공이 뒤로 빠지는 것은 막아냈다.

볼카운트 1-2.

설마 여기서 커브를 던질 줄이야. 서경준의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일반적인 투수라면 여기서는 커브 하나 더 넣어서 상황을 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저렇게 자신만만한 신인이라면? 그대로 속구를 집어 넣을지도······.

그 순간 서경준은 스스로 흠칫 놀랐다.

저 어린 녀석을 상대로 내가 지금 이렇게 진지하게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고? 심지어 몸도 덜 풀린 것 같은 녀석에게?

아니, 아니다. 몸이 덜 풀린 것은 서경준 본인도 마찬가지다.

네 번째.

속구.

몸의 박자감을 속구에 맞췄다. 최수원이 와인드업한다. 그리고

-딱!!!

‘씹······.’

방망이를 내던지고 1루를 향해 질주했다. 속구는 맞았다. 하지만 코스가 너무 예리했다. 직전에 두 개를 모두 바깥쪽 낮은 코스로 집어 넣더니, 이번에는 몸쪽 높은 코스로 과감하게 찔러 넣었다.

빗맞은 타구.

크게 바닥을 찍은 타구가 2, 3루간으로 튀어나갔다. 느린 타구. 정지운의 대쉬가 늦다. 게다가 빠르게 달려와 공이 최고점에 올랐을 때 점핑 캐치를 하는 대신 살짝 뒤에서 안정적으로 공을 받아낸다. 다만 이번에는 글러브에서 공을 빼는 속도는 늦지 않았다. 하지만 소용 없다. 서경준은 노형욱보다 빨랐으니까.

“세이프!!”

마운드에 선 최수원의 입꼬리가 또 올라갔다.

***

실책이 아니다.

그래, 실책은 아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정상적인 유격수라면 이 정도는 아웃으로 만들어주는 게 예의 아닐까?

조금 짜증이 좀 났다. 아니, 안정적으로 수비하는 것도 좋긴 한데 타구를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타구가 자기한테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비가 말이 되나?

아, 물론 이해는 한다. 전통적으로 아시아식 수비는 그랬었다. 하지만 그것도 21세기 초반까지 이야기다. 이미 KBO의 대부분 구장에서 미끄러운 인조 잔디는 사라졌다. 공이 바닥을 구를수록 속도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제 자리에서 안정적인 자세로 공이 굴러오길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자자, 수원아.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하나씩 가자.”

게다가 지금 공을 받는 최진웅도 그렇다. 아니, 솔직히 커브 하나 더 던지고 싶었는데 공이 뒤로 빠질까 봐 걱정돼서 못 던졌다. 내 커브가 무슨 원 바운드해서 들어가는 공도 아니고, 대체 왜 못잡는 걸까? 그런 주제에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하나씩 가자?

그래도 괜찮았던 부분은 지금 내가 상대한 서경준이 주전 우익수라는 점. 그리고 저 어처구니 없는 수비를 하는 유격수가 백업 유격수라는 점이었다.

지금 몸이 아무리 덜 올라왔다고 해도 속구 구속이 150에 가깝다. 그런 공을 어떻게라도 쳐내고, 저만한 속도로 1루까지 달려나간다는 것은 내가 생각한 최소치 정도는 해준다는 의미다.

‘그래, 서경준 일단 넌 합격.’

그래, 인정한다.

1년 만에 마린스를 우승시키고 미국으로 떠나겠다는 생각은 너무 나이브했다. 하지만 적어도 포스트시즌. 그러니까 가을 야구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은 타진해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내가 그래도 명색의 당장 내년에 은퇴해도 명전 직행할 수준의 타자였는데?

자체 청백전.

나는 아직 이 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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