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99화 (99/305)

99화. 봄(4)

딜튼 도일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 찝찝함? 아니, 그보다는 불쾌함에 더 가깝다.

어째서일까?

-뻐엉!!

아픈 곳은 없었다. 하지만 공을 던질 때마다 시원한 느낌이 들기는커녕 그 기분은 점점 더 커진다.

-뻐엉!!

“굿볼!! 굿볼!!”

딜튼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그의 강속구가 미트에 시원하게 틀어박혔다. 공을 받아낸 최진웅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정확한 구속을 알 수는 없지만 대략 150 전후. KBO를 기준으로는 충분히 강속구 투수라고 부를 만했으며, 지금이 아직 2월 초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충분 이상으로 빠른 공이었다.

최수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만 봐서는 대체 왜 7점대 투수인지를 모르겠는데······.’

용병이 150짜리 속구를 가지고도 KBO에서 실패할 수는 있다. KBO에서 용병에게 바라는 기대치는 적어도 180이닝 이상 먹어주는 상위 선발급의 성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딜튼 도일리는 단순히 KBO의 기준으로 실패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폭망한 투수다.

7점대 평자책.

경기당 평균 6이닝쯤 먹었다고 치면 거의 모든 경기에서 5점씩은 꾸준히 내줬다는 뜻이다. 용병이 아니라 토종 투수라도 그대로 2군에 내려버릴 성적이다. 그렇기에 최수원은 이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딜튼 도일리는 무려 100만 달러를 주고 데려온 용병이다. KBO의 규약상 1년 차 용병에게 줄 수 있는 최고액은 100만 달러다. 즉, 마린스가 판단하기에 딜튼은 KBO에 올 수 있는 용병 가운데 조건상 최고였다는 뜻이다.

29세.

AAA에서 2.78. 물론 타고인 퍼시픽 코스트 리그가 아닌 투고에 더 가까운 인터내셔널 리그에서 2.78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리그 평자책이 4.7정도 되는 곳에서 2.78이면 꽤 우수한 성적이다. MLB에서는 37.1이닝 동안 6.03으로 썩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KBO에서 AAA도 아니고 MLB보다 더 나쁜 성적을 거뒀다는 것은 영 이해하기 힘들다.

부상을 숨긴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지금 녀석의 상태는 너무 좋아 보였다.

“뽈 좋은데?”

“이번에는 프런트에서 일 좀 똑바로 한 것 같네.”

딜튼 도일리 다음에 공을 던진 투수는 마찬가지로 외국인 투수인 디에고 로드리게스.

이미 KBO를 경험해본 경력있는 신입이었다. 물론 우리 팀에서 경험해봤던 것은 아니고 작년에 서울의 엘리츠에서 뛰었었는데 141.2이닝 2.87에 10승을 기록했다. 세부 지표만 보면 상당히 좋은 투수인데 문제는 내구성이다. 덕분에 엘리츠는 녀석과 재계약을 포기했다.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바라는 용병 투수는 최소 180이닝은 먹어주는 투수인 만큼 141.2이닝이면 곤란한 수준이기는 하다. 게다가 성적 자체는 또 좋아서 연봉 협상 과정에서 100만 달러를 요구했다.

물론 엘리츠는 그렇게나 큰 금액을 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계약 상에 난점으로 보류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본래는 NPB의 한 팀에서도 제의가 왔었는데 최근의 엔저와 NPB 특유의 1년 차 용병에게는 매우 짠 연봉 때문에 마린스가 85만 달러에 낚아챌 수 있었다고 했다.

“돈을 그만큼이나 썼잖아. 투수 용병 둘만으로 185만 달러인데.”

“하긴······.”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공은 딜튼 도일리만큼 인상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지난 시즌 디에고 로드리게스에게 몇 차례나 영혼까지 털려봤기에 마린스의 코치진은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기량을 의심하지 않았다.

투수들의 피칭이 이어졌다. 곽재영, 최민혁, 백하민 등등.

그리고 그 가운데는 작년 6승 11패로 마린스의 최다승 투수이자 4.11의 평균자책점으로 토종 선발 가운데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했던 한명훈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뻐엉!!!

“역시, 슬라이더 하나는 참 좋단 말이죠.”

“저기에 기복만 없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그거야 차차 나아지겠죠. 그보다 오늘 보니까 이번 시즌 투수진은 걱정을 안 해도 되겠는데요? 아니, 오히려 너무 풍족해서 누굴 써야 할까 그게 걱정일 것 같습니다. 하하하.”

“어휴, 정말 행복한 고민이네요. 게다가 아직 진짜 중요한 아이가 하나 남지 않았습니까.”

코치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190이 넘어가는 큰 키. 아직은 앳된 얼굴과 호리호리해 보이는 체격.

최수원이었다.

화제의 신인.

하지만 2군 훈련에도 나오지 않았던 터라 수원이 공을 던지는 것을 직접 본 코치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교육리그 한 경기. 그나마도 그 자리에 있던 코치들 대부분이 2군 코치였고 1군 코치는 서넛에 불과했다.

“이야기 들은 거에 반이라도 하면 좋겠구만.”

“기대 이상일 겁니다.”

그리고 그런 코치진의 분위기를 가장 먼저 읽은 것은 현재 마운드에 서 있던 한명훈이었다.

-으드득

그가 이를 악물었다.

4년 전 계약금 6천만원을 받고 입단했던 그는 부단한 노력으로 현재의 위치에 이르렀다. 대체 어떻게 잡은 기회였던가. 코치들에게 잘 보이고, 매일 연습하고, 궂은 일을 마다 않은 끝에 간신히 선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기회를 아주 잘 살렸다.

6승 11패.

물론 누군가가 보기에는 초라해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년 마린스가 얻은 모든 승리의 13%정도가 그가 얻어낸 승리다. 게다가 4.11의 평자책은 리그 전체 선발 가운데 42번째다. 어느 팀을 가건 간에 선발 한 자리 차지하기는 충분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10억 5천, 8억 5천. 그리고 20억. 지난 3년 동안 마린스가 드래프트 1라운드들에게 사용한 금액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비슷한 실력이면 더 비싼 돈을 들인 선수를 써보는 게 당연하다. 과연 올해도 선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작년 팀에서 가장 잘 던진 토종선발이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화가 났다.

그는 작년 이미 한차례 경험했었다.

스프링 캠프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반기에 푹 퍼진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뻐엉!!

“오오, 굿볼!!”

그리고 그의 바로 옆 연습용 마운드.

최수원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한명훈을 바라보는 코치는 아무도 없었다.

***

초구는 가볍게.

-뻐엉!!

사흘의 시간은 시차에 적응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요 며칠 꾸준히 몸을 풀어뒀던 터라 컨디션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긴 했다.

“흐음······.”

“듣던 것보다는 조금 못한 것 같은데? 저 녀석 157까지 던진다고 그러지 않았나?”

하지만 그래서 몸이 최상의 상태인가를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

내 몸의 상태는 내가 더 잘 안다. 지금 이 몸의 총체적인 체력은 MLB에서 뛰던 전성기 시절과 비교했을 때 약간 부족한 상태다. 아, 체격적인 차이가 있는데 ‘많이’가 아니라 ‘약간’인 까닭은 30대 중반의 회복력과 19살의 회복력은 그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만약 내가 지명타자로만 뛴다면 그럭저럭 전력으로 풀 시즌을 치를 정도의 체력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난 이번 시즌 투수와 타자 두 가지를 모두 커버할 생각이다. 투타겸업이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건 162경기가 아닌 144경기를 뛴다고 해도 호락호락하게 볼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목표는 4월 중순.

천천히 몸을 끌어 올린다. 1년 차 주제에 건방진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20억이나 쓴 선수를 2군으로 내려보낸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확실히 지난 교육리그 경기때같은 느낌은 아니네요. 아직 2월이라 몸이 좀 덜 올라온 것 같습니다.”

“신인이 몸을 덜 만들어온다고?”

“하여간 요즘 애들은 완전 빠졌다니까. 20억 받았다고 자기가 무슨 1군 확정인 슈퍼스타인 줄 아나? 감독님, 저거 정신머리가 완전히 썩은 것 같은데 2군 잠깐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마린스는 어지간한 팀이 아니니까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르긴 하다.

-뻐엉!!

바로 옆 마운드.

한명훈이 이를 악물고 공을 던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년에 4.11에 6승 11패였다고 하더니 공이 제법 괜찮았다. 기대 이상이다. 저런 공만 계속 던질 수 있으면 올해도 중간중간에 땜빵 선발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내가 투타 겸업을 하게 되면 중간중간 휴식일을 조금 넉넉하게 받아야 하는 날도 있으니 여섯 번째 선발 투수도 필요하긴 필요하다.

“일단 이번 스프링캠프 동안 전체적으로 좀 지켜보지.”

***

재키 로빈슨 트레이닝 콤플렉스.

메이저리그의 위대한 선수 이름을 딴 이곳의 시설은 아주 훌륭했다. 메이저리거들이 머무는 특급호텔 수준의 시설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화장실이나 샤워실. 그리고 식당의 시설과 음식까지 모두 기준 이상이었다.

“헤이, 스완.”

“딜튼?”

샤워를 끝내고 식당으로 가는 찰나, 딜튼이 수원에게 따라 붙었다.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이야?”

“어.”

“그러면 같이 가자고.”

보통 용병들은 아무래도 자기끼리 어울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딜튼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언어 때문이다. 현재 팀에 용병으로 온 나머지 두 선수가 모두 영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라틴계열 선수였던 탓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저 제법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탓에 익숙했던 최수원에게 아는 척을 했을 뿐이다.

“근데 스완 너는 영어를 어떻게 이렇게 익힌 거야? 역시 빅리그에 진출할 생각이라서?”

“그냥 학교 수업 열심히 들은 것 뿐이야. 다른 친구들은?”

“글쎄, 나가서 사 먹을 것 같던데? 근처에 괜찮은 펍을 하나 알아놨다고 하더라고.”

“펍?”

“혹시 스완 너도 관심 있어?”

“딜튼, 나 아직 열아홉 살이야.”“아······. 맞다. 앨릭스랑 동갑이었지?”

“아니, 근데 진짜 알렉산더 이 녀석은 내 이야기를 얼마나 떠들고 다녔길래 고작 두 달 같은 팀에 있었다면서 내 이름까지 외운거야?”

“글쎄······. 앨릭스 녀석은 워낙에 독특하니까. 뭐라더라? 숙명적 라이벌 관계? 그 괴물 녀석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고 다니니까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더라고. 게다가 이름도 다른 애들처럼 좀 복잡했으면 또 모르겠는데 스완이니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식당으로 가는 사이 또 한 명의 선수가 합류했다. 백하민이었다.

“뭐야, 형네 사람들도 오늘 또 다 나간 거예요?”

“어.”

애리조나주의 음주 가능 연령은 만 21세.

현재 19세인 최수원은 물론이거니와 20세인 백하민 역시 음주가 불가능했다.

“정훈 선배는 그냥 적당히 섞이면 잘 모른다고는 하는데, 그러다가 괜히 걸리면 사건 커지니까.”

“잘했어요. 괜히 경찰이랑 무슨 일 생기거나 해서 기사라도 나면 안 그래도 성적도 폭망인데 보통 욕먹는 거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물론 훈련소에서 저녁을 먹지 않는 모든 선수가 다 술 한잔하겠다고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절반은 펍으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맛집을 찾아 떠났다.

“그나저나 내일 드디어 청백전이네. 후······. 좀 긴장되는데?”

“에이, 뭘 긴장을 하고 그래요. 그래봐야 청백전인데.”

“아니, 이번에 민혁 선배에 너까지 들어오면서 투수진 진짜 박터진다고. 올해는 선발로 잘 전환하나 했는데 이러다가 또 불펜에서 뛰게 생겼어.”

두 사람의 대화를 흘려 듣던 딜튼이 그들의 말에서 단어 하나를 용케 알아들었다.

“불펜? 뭐야. 지금 백이 자기가 불펜 투수가 될까봐 걱정하는 거야?”

“어.”

“하하, 그것 참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좀 전해줘. 내가 보기엔 코치진이 모두 바보 멍청이가 아니면 백은 무조건 선발로 써야 하는 투수라고 말이야. 애초에 로드리게스 녀석보다 백 쪽이 훨씬 더 선발에 어울리는 투수잖아.”

“어······. 음······.”

수원이 잠시 망설였다.

“뭐야? 뭐라고 그러는 건데? 뭐 안 좋은 말 한 거야?”

“아뇨, 그게 그러니까······. 딜튼이 한국 야구의 용병에 관한 규칙과 마린스의 총체적인 상황을 조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근데 형 피칭 괜찮다고 충분히 선발 한 자리 차지할만하다고 전해주래요.”

“그래? 딜튼, 땡큐. 땡큐.”

하민이 딜튼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다시 수원에게 물었다.

“근데 총체적인 오해라니? 딜튼이 뭘 오해하고 있다는 거야?”

“어······. 마린스 코치진의 역량?”

청백전의 아침이 밝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