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봄(3)
“싸가지 없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인데?”
“그러니까요. 아니, 신인이 비즈니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것 같은데요.”
“야야, 너무 그러지들 마라. 몰라서 그랬겠지. 몰라서. 쟤 2군 아예 안 뛰고 개인 훈련하다가 합류했다잖냐.”
“아이참. 하여간 혁주 선배님은 너무 천사라니까. 애초에 2군 안 뛴 거 자체가 건방진 거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2군을 뛰건 안 뛰건 이 정도는 학교에서도 충분히 배우고 왔어야죠. 백 하민, 안 그래?”
“하하······, 그게 저 녀석 학교가 중앙고라고 바로 위에 선배 하나가 프로 가기 전까지 7년인가 프로 배출을 아예 못 한 학교입니다.”
백하민의 이야기에 권혁주가 혀를 내둘렀다.
“허······. 그런 고등학교에서 전체 1번에 20억을 받고 프로에 왔다고? 진짜 난 놈은 난 놈이네.”
“난 놈이면 뭐합니까. 인성이 썩었는데. 아무튼 제가 미국 가면 애들 시켜서 확실히 단도리 시켜두겠습니다. 스프링 캠프 오고 간 마일리지로 업그레이드 가능할 때까지는 좌석은 무조건 이코노미석. 이건 기본이죠.”
“너무 심하게 말하지는 말고. 아직 어린 애잖아. 게다가······. 아, 아니. 아니다.”
올해 서른 하나.
지금 여기 이코노미석에 앉아있는 선수들 가운데 권혁주는 가장 연장자였다. 그렇기에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짬밥이니 뭐니 해도 결국 프로판에는 그것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20억짜리 유망주라면 그 가치를 손에 넣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이미 그 범주로 봐야 할지도······.’
슈퍼스타.
단순히 1군 붙박이를 넘어서 올스타, 골든글러브와 같은 KBO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힐만한 입지를 구축한다면 그깟 짬밥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당장 그보다 세 살이나 어린 강라온과 자신의 입지는 감히 비교할 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마십쇼 선배님. 제가 뒷말 안 나오게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
LA를 거쳐 애리조나의 투손까지 길고 긴 비행이었다.
물론 그 편안함은 이전 뉴욕에 갈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특히 잘했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LA에서 투손으로 가는 비행기에서였다. 환승한 비행기는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비행기였는데 이코노미석의 좌석 피치가 불과 30인치였다.
참고로 우리나라 국적기 이코노미석의 좌석 피치는 34인치인데 그보다 10센티 이상 좁다는 의미다. 좌석 피치 30인치면 키 180에 평균적인 다리 길이만 돼도 엉덩이를 좌석 끝까지 넣지 않으면 무릎이 앞 좌석에 딱 붙는다. 하물며 190이 넘는 사람이라면? 고작 2시간짜리 비행이지만 차라리 서서 가는 게 편안할 만큼 고통스러운 비행이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코노미석을 타고 온 선수들 가운데 키가 큰 몇몇은 무릎을 문지르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수하물을 찾아들었다.
뭔가 미국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면 그대로 항공기에서 버스로 직행하던 메이저리거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던지라 좀 어색한 순간이었다.
심지어 몇몇 고참들의 경우는 자기 수하물 찾는 일 없이 그대로 버스로 가서 앉아버렸기에 더 그러했다. 아마 그 수하물을 찾는 건 내 몫이겠지. 뭐, 빅리그도 선, 후배 문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빅리그가 어떤 부분에서는 더 심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난 거기서 주로 대접을 받는 쪽이었지 이런 일을 하는 쪽이 아니었다.
“선배님, 짐 다 챙긴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일하지 않겠다고 뻗댄다는 말은 또 아니었다. 어차피 그리 오래 할 일도 아니다. 선, 후배의 위계가 아무리 빡빡해도 실력이 MVP급이면 다 해결된다. 왜, 연예계에서도 선후배 관계 빡빡하기로 소문난 개그맨들도 ‘뜨면 열외’라고 하지 않던가. 프로 야구판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뜨면 열외다. 저기 하민이 형이 자기 짐만 들고 걸어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버스를 타고 30분.
구단에서 제법 큰 맘 먹고 투자한 인상이 가득한 장소에 도착했다.
재키 로빈슨 트레이닝 콤플렉스.
보통의 경우 모텔에 묶으면서 훈련장을 나가기 마련인데 여긴 훈련장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숙소가 딸려 있었다. 야구 필드만 무려 10면. 굉장한 대규모의 훈련장으로 거의 메이저리그 스프링 트레이닝급의 훈련 시설로 훌륭하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물론 이 와중에 훌륭하지 못했던 것도 있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긴 비행으로 피곤한 나를 불러내 허튼소리를 늘어놓는 머저리들이었다.
“······정도면 잘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는다.”
“햐, 진짜 세상 많이 좋아졌다. 선배가 이런 무개념 후배한테도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말이야. 우리 때였으면 얄짤 없었을 텐데.”
“너무 그러지 마. 20억짜리 대형신인 아니냐. 그럴 수도 있지. 학교 다닐 때도 독불장군으로 성격 엿 같았다는데 그럴 수도 있지. 있는데. 근데 수원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긴 고등학교가 아니야. 지금 저기 저 선배들도 전부 고등학교 때는 너처럼 날고 기던 분들이야. 프로에서 1군으로 남았다는 건 그걸 넘어서 FA까지 해냈다는 건 그런 의미야. 네가 앞으로 한 10년 프로에서 뛰었을 때 나올 결과물이라고. 근데 신인이 자기랑 동급으로 맞먹으려고 군다? 입장 바꿔 생각해봐라. 얼마나 엿같겠냐. 안 그래?”
어······. 음······. 내가 한 10년 프로에서 뛰어봐서 아는데 그건 아닐 텐데······. 솔직히 대형 FA정도 받은 애들은 보통 여유롭다. 뭐 신인이 비즈니스를 타건 뭐를 타건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거 신경 쓰는 애들은 연차는 찼는데 연봉 억 단위 못 받아서 자기 돈 내고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하기 너무 부담스러운 애들이다. 대충 미국 한 번 다녀오면 마일리지가 1만2천 마일리지 정도 쌓인다. 이걸 일곱 번 정도 반복해야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가 가능할 만큼 쌓인다. 그렇다면 일곱 번 이후로는 항상 좌석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스프링캠프 여덟 번 아홉 번 따라 나온 선수라고 해도 누적 연봉이 십억도 안 되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물론 십억쯤 되면 매우 큰 돈이기는 하지만 야구 선수는 생각보다 유지비가 많이 드는 직업이다. 연봉 일억쯤 되도 비용처리 다 하고 어쩌고 하면 세금 한 푼 안 내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보통 사람의 경우 커리어가 쌓여 가면서 마흔살을 넘어갈 때즈음부터 소득이 피크에 다다르지만 야구 선수의 경우는 다르다. 대형 FA를 해낸다면 뭐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거 하는 선수는 전체의 5푼이나 될까. 서른쯤 되면 연봉이 슬슬 꺾이기 시작한다.
결국 비즈니스 탈 수 있는 선수는 많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인이 비즈니스 타는 거 보면 배알이 꼴릴 수 있다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근데 그렇게 배알이 꼴렸다고 이렇게 사람 불러서 을러대는 건 또 다른 말이다.
솔직히 나라면 쪽팔려서도 그냥 모른 척할 텐데······. 역시 마린스답다.
들이받을까? 하는 고민은 생기지조차 않았다.
이렇게 찾아와서 직접 이야기하는 놈들은 일종의 칼이다. 그냥 누군가의 손에 휘둘리는 놈들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화를 낼 거면 칼을 휘두른 놈에게 내야지, 굳이 이런 애들까지 일일이 감정 싸움을 할 이유는 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전 그게 예의인 줄을 미처 몰라서······. 그냥 이코노미석이 불편하기도 하고 어차피 비용처리도 해야 하고 해서 그랬거든요.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몰랐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다.’
사실 진짜배기 미친놈이라면 여기서 몰랐으면 전부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을 것이다. 예컨대 지금은 대학 리그에서 커브볼 열심히 던지는 어떤 투수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래, 다음부터는 주의하고. 비행 피곤했을 텐데 들어가 쉬어라.”
“네, 감사합니다.”
물론 누가 시킨다고 20억짜리 계약을 맺은 신인을 이렇게 불러내는 시점에서 적당히 미친놈들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꼬박 하루.
시차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흘러갔다. 16시간의 시차. 그러니까 서울에서 월요일 아침 10시 30분에 출발했는데 애리조나 투쏜에 도착하니 여전히 월요일 아침 10시 30분이라는 것은 사실 하루 만에 극복하기 힘든 시차였다. 게다가 그 좁은 비행기에 16시간이 구겨져 있었으니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컨디션이 회복되기를 기다려줄 수는 없는 노릇.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이미 훈련장에는 먼저 나와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이 있었다. 이글이글한 눈동자에 의욕들이 가득했다. 이맘때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저 가운데는 어제 나에게 헛소리를 늘어놓던 두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스프링 캠프에서 두각을 드러낸다고 바로 1군에 부름을 받고 하는 경우는 매우, 몹시 드물다. 보통 스프링 캠프를 시작하기 전부터 감독의 머릿속에는 이번 시즌 어떤 선수들을 쓸지가 가닥이 잡혀 있고, 거기서 벗어나는 경우는 기껏해야 한두 명?
어차피 야구는 긴 시즌을 치르는 운동이다. 몸을 빨리 끌어올리면 빨리 퍼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걸 아는 주전 선수들은 자신의 페이스대로 몸을 끌어올린다. 스프링 캠프나 시범 경기에서 2군급 선수들이 종종 두각을 드러내는 이유다.
물론 2군급 선수들도 그 정도는 다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최선을 다한다. 여기에 모인 34명의 선수 가운데 28등 안에 들어간다고 28인 엔트리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 FA 계약이 끝나지 않아서 합류하지 못한 선수들, 조만간 합류할 외국인 선수들. 부상에서 돌아올 선수들까지. 정말 1, 2자리를 두고 열댓 명이 함께 경쟁한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뛴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내가 천천히 몸을 풀었다.
‘20억······. 쟨 무조건 1군 시작이겠지?’
‘원래라면 그럴 확률이 높긴 했지. 근데 쟤 2군 훈련도 제대로 안 받고 합류한 거라 코치님들도 욕 많이 하잖아. 부진하면 2군에서 일단 적응부터 하라고 할걸?’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매섭게 내리꽂혔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고참이라고 할만한 이들이 하나둘씩 합류하기 시작했다.
아직 스프링 캠프 첫날.
투수와 야수를 나눠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보다는 적당히 몸을 푸는 훈련이 이어졌다. 미리 몸을 만들고 참가한 선수들과 그렇지 못한 선수들의 차이는 이 적당히 몸을 푸는 훈련에서도 확연하게 차이가 났는데, 놀라운 점은 간단한 폴앤폴 10세트조차 끝까지 수행하지 못하는 선수들이 전체의 3할가량 됐다는 점이었다.
“아이고, 디다. 디. 오늘 훈련이 억수로 디네.”
“아직 첫날에 시차 적응도 안 끝났는데 빡세긴 빡센데요?”
“마, 니가 빡세면 우야노. 내는 네 나이 때는 거의 날라다닜다.”
“선배, 저도 이제 서른넷입니다.”
“머꼬, 경준이 니가 벌써 그리 댔나? 와, 시간 억수로 빠르네.”
심지어 코치들은 그렇게 네 세트 정도 끝내고 뒤로 빠져서 슬쩍 열외하는 고참들에게 별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너무 당연한 것 같은 풍경. 세트 수가 늘어갈수록 슬쩍 빠지는 선수들이 늘어갔다. 그저 1.5군급 선수들만 이를 악물고 폴앤폴을 반복했다.
처음 몇 세트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세트가 이어질수록 내 속도를 따라오는 선수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코치들이 그런 나를 바라보며 수군댔다.
“20억 쟤는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요. 애가 여유가 넘치는데요?”
“팔다리도 길쭉하고 몸도 날랜 것이 이번 기회에 타자로 완전히 전향해서 외야수 하면 딱 좋겠는데요?”
“어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157 던지는 애를 외야수를 시키다니요. 차라리 전업 투수를 시키면 또 몰라도.”
“에이, 그러기엔 타격이 너무 아깝지. 영상 봤는데 폼이 참 깔끔한 게 몸만 조금 불리면 전성기 규만이 포스 나오겠던데?”
“전성기 규만이 포스요? 그 정돕니까?”
“그렇다니까. 진짜 이상한 거 시키기 아까운 놈이야.”
“아니, 이상한 거라니요. 아무리 그래도 저 몸으로 157인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몸만 조금 불리면 진짜 160도 가능할지 몰라요.”
투수 코치와 타격 코치의 가벼운 티격태격.
그 사이를 작전 코치가 슬쩍 끼어들었다.
“근데 쟨 2군 훈련장 나오지도 않았다더니 몸은 빡세게 만들어 왔나 본데?”
“그러게, 이제 막 성인이 된 녀석이 20억이나 받았으면 좀 대충해올 법도 한데 말이야. 협조성은 좀 떨어지는 대신 워크에씩은 괜찮은 것 같은데?”
“스읍······. 근데 저런 식이면 초반에 확 달리고 여름 되자마자 퍼지겠는데요?”
“그건 이제 우리가 잘 조율해 봐야지.”
10세트를 끝낸 시점에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확실히 12월까지 빡세게 훈련하고 한 달 넘게 적당히 컨디셔닝 훈련만 하면서 휴식을 취했더니 몸이 좀 무겁긴 무거웠다. 하지만 1년을 풀로 달리기 위해서는 휴식, 그리고 적절한 지방은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충분한 영양의 섭취.
그리고 훈련.
그렇게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오우, 네가 스완이구나!! 반가워.”
파란 눈에 노란 머리. 건장한 체구.
드디어 합류한 외국인 투수가 라커룸의 모든 선수를 제치고 가장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라커룸의 서열따위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 하지만 진짜 중요한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얼굴을 보는 순간 기억이 났다.
본래의 역사에서 어째서 마린스는 이번 시즌에도 꼴찌를 했었던가. 바로 지금 내 앞에 그 답이 있었다.
딜튼 도일리.
그는 이번 시즌 마린스 꼴찌의 주역으로 7점대의 평자책을 기록하고 3개월 만에 방출당한 100만 달러짜리 용병 투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