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20억(8)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마린스의 곽진철이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삼자범퇴. 오늘 양 팀 투수들이 정말 굉장한데요?]
[마린스의 선발인 최수원 선수도 그렇고, 오늘 블레이즈의 선발인 정다정 선수 역시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인의 깜짝 활약. 이런 게 또 교육리그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깜짝은 개뿔. 우리 다정이가 하반기에 얼마나 버닝했는데. 멍청한 프런트 놈들이 1군에 안올려줘서 그렇지.”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블레이즈의 팬이 해설자의 이야기에 투덜댔다.
“야야, 그래도 최수원에 비교하면 깜짝 아이가? 둘이 몸값이 20배는 차이나는 거 아이가?”
“정확히는 40배. 다정이 3년 전에 계약금 5천 받고 입단했어.”
“우와, 5천만원 대 20억이라 이거네. 오늘 다정이가 이기면 마린스 점마들 배 좀 아프겠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희망사항이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루킹 삼진.
덕아웃으로 돌아온 블레이즈의 타자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1군에 여유 있는 선수들이야 헬멧도 막 집어 던지고, 방망이도 내팽개치고 그런다지만 2군 선수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학대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모근뿐이다.
2.1이닝.
무려 셋이나 되는 타자가 공을 건드려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나머지 타자들이 안타를 만들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야 땅볼 하나와 외야 플라이 하나. 그리고 파울 세 개.
-후우······.
블레이즈의 코치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최종엽 감독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쯧······.”
코치라는 녀석이 무슨 수를 내볼 궁리를 해야지. 상황이 어렵다고 한숨을 내쉬다니.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영 이해 못할 건 또 아닌게 화가 나는군······.’
그나마 정다정이 잘 버텨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번 시즌 하반기에 그렇게 다정이를 한번 써보라고 추천했건만 끝까지 들어먹지 않던 1군 감독도 오늘 경기를 본다면 마음을 돌려 먹을 수밖에 없으리라.
‘확실히 쉽게 익숙해지기 어려운 빠른 공이야. 이 정도면 써드 피치가 없어서 그렇지 거의 외국인 1선발급······. 아니지, 아니야. 저런 속구에 커브면 굳이 써드 피치가 없더라도······.’
그래도 걸어볼 부분이 아예 없지는 않다.
체력.
저 녀석 프로필상으로 키가 190이 넘는데 몸무게가 고작 90 남짓이다. 게다가 오늘 나름대로 프로 데뷔전이라고 힘을 빡 준 게 분명할 터. 아무리 괴물 신인이라도 그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1회 초부터 자기 최고 구속을 낸다는 건 그렇게밖에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흥분해서 먼저 달리기 시작하는 경주마는 결국 후반에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타자들이 최대한 저 공을 눈에 익히고 몸에 타이밍을 익혀나갈 수밖에 없다.
덕아웃 구석.
조용히 투수용 점퍼를 입고 앉아있는 정다정의 모습이 보였다. 8라운드로 계약하여 계약금 5천만원을 받고 입단했다. 그리고 무려 4년. 낮은 라운드나 신고 선수로도 종종 로또가 터지는 타자들과 달리 투수의 경우는 낮은 순번이 터지는 일이 매우 드물다. 어쩔 수 없다. 타자의 타격은 기술적인 측면도 크지만, 투수의 피칭은 결국 재능의 총합이다. 빠른 공을 던지는 것, 더 정확하게 공을 꽂아넣는 것. 모두 결국 타고난 재능을 따라간다.
그런 의미에서 8라운드인 정다정이 지금까지 방출되지 않고 꾸역꾸역 버텨 결국 1군을 오가고 있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은 뻔한 탑독의 승리보다 언더독의 기적을 더 좋아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블레이즈 2군의 늙은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딱!!!!
높게 뜬 내야 뜬공이 유격수의 글러브에 쏙 들어갔다.
삼자범퇴.
마운드의 최수원이 3이닝을 삭제시켰다.
순식간에 돌아온 차례.
정다정이 투수용 점퍼를 벗었다.
-꿀꺽······.
아직 마운드에 올라가지 않았음에도 정다정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두려움 때문이다.
그는 이번 시즌 하반기 경기를 앞두고 우연히 체인지업 그립을 조금 바꿨는데 그 날 경기에 결과가 제법 괜찮았다. 보통 자기애가 충만한 사람이라면 ‘내가 드디어 각성했구나. 내 공이 기가 막히나 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정다정은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의 행운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공을 갈고 닦았다.
일정 수준 이하에서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에서 노력은 매우 높은 빈도로 사람을 배신한다. 그 정도 레벨에 이르면 중요한 것은 단순히 더 노력하는 것이 아닌 바른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다정은 운이 좋았다. 그가 바꿔 잡은 그립과 감각은 그에게 딱 알맞은 형태의 공이었기 때문이다.
타석에 8번 타자 최수원이 들어왔다.
투수임에도 9번이 아닌 8번을 친다는 점에서 그의 타격 능력이 범상치 않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타자였다. 물론 최수원의 고교성적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팀에서도 다 생각이 있으니 그를 8번에 뒀을 것이다. 고교야구에서 5할에 7홈런을 친 타자가 10년 가깝게 2군에 있기도 한다. 이처럼 고교레벨에서 날아다니던 타자가 프로에 와서 바로 죽을 쑤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다.
정다정이 크게 호흡했다.
두방망이질 치던 가슴이 진정된다. 그래, 고작해야 하위 타순에 불과하다.
그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
익숙한 얼굴이었다.
보통 타자는 반대 손 투수에게 조금 더 강하다. 우타자인 나를 기준으로 보자면 좌투수가 던지는 공의 궤적이 조금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변화구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공 순위 1위를 거의 놓친 적이 없는 슬라이더가 바로 같은 손 타자를 기준으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결정구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반대 손 타자를 잡아내는 특효약 같은 변화구가 존재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서클 체인지업이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선 저 정다정이 바로 그 서클체인지업 하나로 몇 년을 프로에 붙어 있던 투수다. KBO에 뛰던 당시를 기준으로 나도 제법 저 서클체인지업에 농락당했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시즌 막판에 순위 결정하는 경기에서 체인지업 괜히 건드렸다가 내야 땅볼로 병살타 만들었던 날. 누군지 정체모를 녀석이 내 차 옆을 아주 길게 긁어놓고 도망갔었더랬다.
마운드의 정다정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키킹한 발이 땅을 딛고 등 뒤에서 뽑혀 나오는 팔의 회전이 똑똑하게 보였다.
공이 날아든다.
오랜 시간 내가 쌓아 올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험들이 그 공의 궤적을 순간적으로 그려냈다.
존 안쪽으로 들어오는 공이다. 그것은 단순한 스트라이크 존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장 자신있게 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는 공간. 흔히들 사용하는 히트맵으로 표현하자면 구등분된 존 가운데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다섯 개의 공간 가운데 하나로 들어오는 공이다.
쳐야 하는 공이다.
본능으로 그것을 결정 내리는데 걸린 시간은 약 0.125초 남짓. 생생한 두뇌에 오랜 경험이 더해진 그것은 한참 메이저에서 홈런왕을 차지하던 전성기 시절보다도 훨씬 빠르고 영민한 판단이었다.
아직도 공은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여유로웠다.
느린 공, 서클 체인지업이었다.
아마 정다정이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였다면 혹은 100마일짜리 공을 뻥뻥 날려대던 나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여기에 타이밍을 빼앗겨 내야 땅볼이나 치고 쓸쓸하게 덕아웃으로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기껏해야 88마일짜리 속구를 던지는 투수였다.
거기서 만들어진 약 0.075초의 시간이 그가 던진 공이 체인지업이라는 것을 간파할만한 여유를 안겨주었다.
살짝 느린 타이밍.
머릿속에 그려졌던 공의 궤적이 수정됐다. 스트라이크 존을 슬쩍 벗어나는 위치다. 공 반 개 정도?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의 팔은 충분히 길었고, 서클 체인지업을 대비한 나의 위치 역시 충분히 홈플레이트에 가까웠다. 스트라이크 존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내가 자신 있게 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뿐이다.
내가 예상한 코스 그대로.
어느 순간, 바깥으로 꿈틀대며 날아가는 그 공을 향하여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경쾌한 감각.
지켜볼 것도 없었다.
홈런이었다.
가볍게 방망이를 내던지고 일루를 향해 달렸다.
[타구 큽니다!! 매우 큽니다!! 홈런!!! 담장을 까마득하게 넘어가는 대형 홈런입니다!!! 맙소사. 최수원 선수!! 오늘 거의 완벽한 피칭을 선보이던 정다정 선수의 초구를 그대로 잡아당겼습니다!!]
[와, 상당히 잘 제구된 체인지업이었거든요? 그런데 마치 체인지업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걸 그대로 잡아당겼어요.]
[상동 야구장 외야에서 지켜보던 팬들이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홈런볼이 관중들 저 너머로 날아가는 바람에 지금 공 줍기 위해 달려들 가고 계시거든요. 대단한 힘입니다. 이거 비거리가 얼마나 나왔을지 궁금하네요.]
[마운드에서는 완벽한 피칭을. 첫 타석에서는 대뜸 홈런을. 정말 20억이라는 금액에 어울리는 대단한 활약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지금 어느 남성분이 홈런볼을 주웠네요. 정말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가족과 함께 온 가장이신 것 같은데요? 옆에 앉은 아이에게 야구공을 건네주고 있습니다.]
[자, 최수원 선수의 선제 홈런포로 이제 점수는 1:0. 경기 계속됩니다.]
“와, 설마 설마 했는데 프로 데뷔 첫타석이 홈런?”
대기타석에 있던 조유진이 자기 방망이도 버려둔 채 달려 나왔다.
“데뷔 첫 타석은 무슨. 정규 리그도 아니고 교육 리그인데. 오버 그만하고 니 타석이나 준비해. 저기 선배들 표정 별로 안 좋다.”
덕아웃으로 돌아가 나에게 손바닥을 내미는 몇몇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유진이 특유의 폼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조유진 선수 쳤습니다!! 낮게 깔린 타구!! 유격수 잡아 그대로 일루에!!]
“아웃!!”
[아, 타구는 상당히 빨랐는데 코스가 영 좋지 못했네요. 조유진 선수 운이 따르지 않습니다.]
깔끔한 초구 땅볼아웃.
살짝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하던 정다정의 표정이 조금 안정됐다. 아마 고등학교 레벨이었다면 방금 타구는 높은 확률로 안타가 됐을 텐데 매우 안정적인 수비였다. 확실히 프로 2군이라고 해도 고교야구 기준으로는 에이스급은 에이스급이다.
경기가 계속됐다.
내가 좀 쉽게 두들긴 경향이 있긴 했지만, 정다정은 괜찮은 투수였다. 그는 마린스의 허접한 타선을 4회 말까지 추가점 없이 막아냈다.
왜 4회 말까지만 막아냈는지는 굳이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5회 말 원 아웃 주자 없는 상황.
-딱!!!
공 두 개를 거르고
세 번째.
조금 더 깊숙하게 들어오는 속구를 그대로 걷어 올렸다.
경기 두 번째 홈런.
이번에는 다행히도 사람들이 그리 열심히 뛰지 않았다. 홈런의 비거리가 짧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장타력이 있는 타자가 타석에 들어오면 깊숙한 곳까지 물러나서 수비하는 것처럼, 외야에서 경기를 관전하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담장에서 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미리 빠져 있던 덕분이었다.
그렇게 교육리그의 한계 투구 수인 70구를 꽉 채워 5.1이닝 무실점 11탈삼진. 그리고 2타석 2타수 2안타(2홈런).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교육리그 경기가 끝났다.
[2026 낙동강 교육리그 마지막 경기!! 마린스 6:2 아쉬운 역전패]
─마린스해체왜안함?: 아쉬운??아쉬운??아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