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20억(7)
경기를 지켜보던 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동 야구장의 좌석은 250석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좌석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KBO의 관계자들. 혹은 방송 관계자들이다.
외야 입석 자리에 앉아 있던 일반 관중들 역시 그 심상치않은 반응에 대체 무슨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몇몇. 현장에서조차 TV에서 나오는 중계를 동시에 틀어놓고 있던 이들이 입을 떡 벌렸다.
“157.1km/h?”
“미친? 11월에 157이라고?”
상동이 남부지방이라고는 해도 11월 초순쯤 되면 쌀쌀을 넘어 추워지는 날씨다. 실제로 오늘 기온도 16.5도로 경기를 관람하러 온 사람들 대부분이 얇은 패딩 정도는 하나씩 걸치고 있었다. 헌데 그런 날씨에, 대뜸 초구부터 157km/h를 던진다고? 물론 최수원이 최고 157의 공을 던진다는 것은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고 구속이다.
보통 최고 구속 155를 던진다는 투수도 2회나 3회쯤 몸이 완전히 풀렸을 때 그 구속이 나오지, 평균적으로는 152정도. 특히 경기 초반에는 140대 공도 심심치 않게 던지는 게 일반적이다.
“야, 20억짜린데 저 정도는 해야지.”
“아니, 근데 초구로 대뜸 157 던진다는 건 막 오늘 경기에서 160까지 던지고 그런다는 거 아니야?”
“그러겠냐? 그냥 신인이고. 어차피 교육리그라 오래 던질 거 아니니까 처음부터 이 악물고 던진 거겠지. 그리고 야구 하루 이틀 보냐? 구속만 157이면 뭐해? 제구 안 잡혀서 2군에서 썩는 애들 한둘도 아니고.”
안경 낀 사내 하나가 부정적인 이야기만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하지만 상기된 피부와 벌렁거리는 콧구멍을 봐서는 그 역시 157이라는 구속에 흥분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물론 야구는 단순히 공을 빨리 던지거나 공을 멀리 쳐내는 게임이 아니다. 100마일짜리 속구로 삼진을 잡건 80마일 속구로 삼진을 잡건 삼진은 똑같은 삼진이고, 장외홈런을 날리건, 담장을 슬쩍 넘어가는 홈런을 날리건 홈런은 똑같은 홈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의 입장에서는 그것들은 절대 같지 않다. 아니, 같을 수가 없다.
마운드의 최수원이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꿀꺽······.
타이밍을 놓친 것은 타석에 선 조병진만이 아니었다. 대기 타석에 선 정영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올해 나이 21세.
지금 타석에 선 조병진보다 2년 후배로, 최수원 이전 드래프트 최고액을 기록했던 마린스 최민혁, 피닉스 서규탁과 드래프트 동기다. 당 해에 워낙에 좋은 투수 자원이 많았기에 드래프트 순번이 전체 6번까지 밀리긴 했지만, 타자 중에서는 전체 1위. 만약 그가 수비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더 높은 순번도 가능했으리라 여겨졌던 자원이다.
마린스나 피닉스 정도 팀이었다면 지금쯤 1군 붙박이도 가능했을 재능으로 지난 3년 동안 꾸준히 1군과 2군을 오갔다. 굳이 상무를 택하지 않은 것도, 아마 언젠가는 국가대표로 병역 면제의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
둘
그래, 바로 이 타이밍이다!!
-부웅!!!
그리고
셋
넷
다섯.
-뻐엉!!
“스트라잌!!!”
타석에 선 조병진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것은 대기 타석에서 배트링을 끼운 채 방망이를 휘두르던 정영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친······.”
자신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커브였다. 하지만 못 알아봤다. 적어도 그의 눈으로 봤을 때는 속구와 완벽하게 같은 폼이었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지금 타석에 서 있는 것이 조병진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타자였지만 한 가지. 공을 고르는 능력만큼은 현재 팀에서 최고 수준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헌데 그런 그가 커브를 속구라고 생각하고 헛스윙을 했다?
타석에 선 조병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렵다.
그리고 그런 정영식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타석에 선 조병진이 고개를 저었다. 공을 뽑아내는 타이밍이 빨랐다. 157의 구속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저 피칭 동작이 더 큰 문제다.
세 번째.
마운드의 최수원이 피칭 동작에 들어갔다. 터무니없이 빠른 템포.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무게 중심을 뒤에 두고 최대한 오래 공을 살피겠다는 자세로는 어려웠다. 조병진에게 157의 강속구란 그런 공이었다.
최수원의 손을 떠난 공이 포수의 미트에 닿기까지 불과 0.35초.
사람이 공을 판단하기에 0.35초라는 시간은 너무 짧다. 심지어 배트가 회전하는 데 필요한 약 0.2초의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더욱 더 그러하다.
문제는 조병진이 지금 최수원이 공을 놓는 타이밍조차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와인드업을 하고, 키킹을 하고 스트라이드를 가져가고 플렉스에서 코킹으로 넘어가고, 그리고 릴리스가······.
-부웅!!!
“스트라잌!!! 아웃!!!”
조병진의 방망이가 허공을 휘저었다.
헛스윙 삼진.
그것도 삼구삼진. 그야말로 압도적인 피칭이었다.
경기장이 끓어오르기에 상동 구장에 모인 인원은 너무 적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관계자들이었으며 순수한 팬은 저기 외야의 한줌에 불과했다.
하지만 TV로, 인터넷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은 달랐다.
미친 듯이 올라가는 채팅창.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기는 역시 부산의 한 전설적인 투수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8888577: 야, 지금 저 커브 봤냐?
─최강동원: 마, 동원햄, 보고 계십니꺼?
지금에 와서 보면 KBO에 그보다 더 좋은 성적을 기록한 투수는 많았다. 상위리그에 진출하여 혁혁한 기록을 세운 투수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1984년의 그 날을 기억하는 부산의 팬이라면 KBO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로 그를 꼽는 데는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설적인 투수를 대표하는 구종이 바로 불꽃같은 속구와 폭포수 같은 커브였으니 지금 최수원이 보여준 그 모습에 늙은 야구 팬들의 가슴이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병진이 타석에서 물러나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좀 어떻습니까?”
“미쳤다. 커트하겠다는 마음으로 섰는데 안 돼. 공도 공인데 디셉션도 미쳤고 대체 언제 공을 던지는지 타이밍도 못 잡겠더라. 게다가 무슨 투구 템포가······. 아니 생각할 시간도 없이 후다닥 던지는데······. 하······. 자료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해. 게다가 저 커브는 듣도 보도 못했던 공이잖아.”
그야말로 횡설수설 그 자체.
보통이라면 대기타석에 있던 타자에게 타격에 도움이 되는 팁을 건내주고 들어가기 마련인데 이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말이었다. 아마 그만큼 그의 멘탈이 박살났다는 의미겠지.
정병석이 방망이를 단단히 손에 쥐고 타석에 섰다.
그는 작년에 2부리그에서 올스타까지 올라갔었다. 그리고 올해는 1군에서 뛴 기간이 절반 가까웠고, 내년에는 붙박이 1군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157의 강속구.
그리고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완성도 높은 커브.
분명 조병진이 당황할만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머릿속에 커브라는 선택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커브는 버린다.
노리는 것은 속구.
아마 공을 던지는 타이밍도 못 잡겠다고 했던 것은 그 이질적인 속도로 날아오는 커브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한 박자를 당겨서 방망이를 휘두른다면 분명······.
마운드의 최수원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속구의 타이밍에 맞춰서!!
-딱!!!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난 직후.
아니, 정확하지 않다. 그저 몸에 새겨넣은 박자 감각으로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그대로 초구는 속구. 하지만 코스가 날카로웠다. 손바닥 전체를 울리는 통증. 빗맞은 타구가 파울라인을 크게 벗어났다.
볼카운트 0-1
마운드의 최수원이 웃었다.
***
정병석이라고 했던가? 솜털이 보송보송한 타자 녀석이었다. 물론 나보다 두 살이나 많긴 했지만 저 묻지마 배팅을 보고 있자니 솜털이 보송보송하다는 말밖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
고교레벨에서는 워낙에 수준 차가 났던 탓에 그냥 공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이었던지라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고교레벨에서 고르고 고른 원석들이 몇 년씩이나 자기들끼리 부딪히며 연마된 프로 레벨에서는 조금 달랐다.
워싱턴 형제가 만들어준 디셉션은 유효했다. 타자가 내 손끝에서 언제 공이 튀어나오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식의 묻지마 배팅이라니. 그래도 박자 감각 하나는 제법 괜찮았는지 어찌어찌 공에 방망이를 가져다 대기는 했다.
그러나 저래서야 노림수가 너무 뻔히 보인다. 철저하게 속구를 노리는 게스 히팅. 그것도 존에 들어오는지, 빠지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일단 속구면 휘두르고 보는 게스 히팅이다.
일반적으로 144km/h의 속구가 존을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0.4초라고 친다면 통상적으로 타자가 날아오는 공을 인지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0.1초라고 본다. 이후 그것을 파악하는데 0.075초를 사용하고, 칠까 말까를 결정하고 몸이 움직이는데 걸리는 시간이 0.075초다. 그리고 마지막 방망이를 휘두르는데 걸리는 시간이 0.15초. 이게 될 때 비로소 KBO에서 3할을 치는 타자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157km/h의 강속구는 어떠한가. 157km/h의 강속구가 존을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0.35초. 저기서 0.05초를 더 줄여야한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KBO를 정복한 타자들 가운데 그게 안되서 MLB에서 리턴한 선수가 한 둘이 아니다.
스윙 속도가 터무니없던지, 아니면 저 인지능력이 터무니없던지 적어도 둘 중 하나는 가능해야 칠 수 있는 공이 157km/h의 공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정병석의 선택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저런 타자가 상대라면 투수 입장에서는 너무 편할 수밖에 없었지만. 간단하다. 저런 식으로 나오는 타자에게는 굳이 좋은 공을 줄 필요가 없다.
두 번째.
바깥쪽 낮은 코스 훅 빠지는 속구.
-부웅!!!
“스트라잌!!!”
어김없이 타자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아무리 잘 봐줘도 좋은 코스라고는 말하기 힘든 공이었다. 바깥으로 공 두 개 분량은 빠지는 공이었으니까.
잠시 손을 들어 타석에서 물러난 녀석이 헬멧을 고쳐썼다.
여기서는 저런 시간 따윈 주지 않고 몰아쳤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시간을 좀 준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세 번째.
딱히 독심술 따위는 없다고 해도 알 수 있었다. 이번 공은 한 번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마음이다. 배트 타이밍이 좀 늦더라도 커트를 하겠다. 뭐 그런 각오겠지.
빠른 박자. 타자가 자세를 잡자마자 냅다 공을 뿌렸다.
커브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타자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타이밍의 문제? 그럴 리가.
그냥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속구만 노렸고, 속구라고 생각하고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크게 떨어지는 커브였다. 아마 그저 막막한 마음밖에 없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메이저에서 2038년도였나? 그 해에 사이영 받았던 그 미친······. 아니 아무튼 그 녀석을 만났을 때 내 심정이 딱 그랬었으니까.
“와!!!!!”
외야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물론 그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백여 명. 그리 크지 않은 그 환호를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었다. 고작해야 교육리그. 자차가 아니면 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이곳에 굳이 찾아와준 팬들이다. 코어 중의 코어 팬이라는 뜻이다. 고작 손 한 번 흔들어주는 서비스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물론 타석에 들어오는 타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해한다. 이제 막 졸업한 19살짜리 애송이가 삼구삼진 두 번 하고 건방지다. 뭐 그런 의미겠지.
근데 말이다······.
상대 팀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왜 너희까지 표정이 안 좋은 거냐?
이루수와 유격수.
두 ‘선배’의 표정이 영 불편하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물론 경기는 그들의 불편함과는 무관하게 흘러가 1회 초, 우리. 아니, 내가 블레이즈의 타자들을 완벽하게 막아 세웠다.
그야말로 성공적인 피칭.
하지만 오늘 여기 상동을 찾은 저 백여명의 팬들을 위한 서비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글러브를 낀 나는 아직 미숙한 투수로 기량을 끌어올릴 연습 무대로 KBO를 선택했다.
하지만 방망이를 든 나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