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20억(6)
마린스에는 유망주가 많다.
지난 2013년 이후로 2026년까지 총 14시즌. 마린스가 포스트시즌에 나간 건 딱 한 번 뿐이다. 당연히 유망주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당연함이 좋은 일인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14시즌이나 모았는데 유망주‘만’ 많다? 아니, 유망주를 넘어 노망주라고 불리는 선수들이 그득하다? 포텐셜은 좋은데 뭔가 하면 터질 것 같은데 그 한 끗이 부족한 선수들이 2군에 가득하다?
이건 절대 칭찬이 아니다.
올해 나이 27세. 군필 유망주 나승찬은 그런 칭찬이 될 수 없는 선수 중 하나였다.
유망주를 넘어 이제 슬슬 노망주의 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한 나이.
하지만 그럼에도 마린스가 그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평균 147km/h를 찍는 빠른 공 때문일 것이다.
“어?”
나승찬이 공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내일 있을 경기에 선발은 자신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뭔가 익숙한 이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최수원?”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태블릿을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수원.
20억짜리 루키.
물론 계약금이 선수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나승찬 자신도 신인 계약금으로 무려 5억8천을 받았었지만 8년째 1군에 자리를 잡지 못한 처지였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20억은 느낌부터가 다르다.
다만 문제는 이 녀석 아예 훈련에 참가조차 안하는 건방진 놈이라는 점이었다.
그래, 물론 명시된 바에 의하면 고교졸업 선수를 소집할 수 있는 시기는 11월 이후다. 하지만 어디 교육리그가 팀 좋자고 하는 리그인가? 실력 늘면 좋은 건 선수다. 게다가 감독이나 코치도 새로 들어온 선수의 기량을 좀 눈으로 파악해야 리그에서 실제로 써먹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무엇보다 단체 생활에서 혼자 튀는 행동을 한다? 최악이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오래된 말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조직을 가건 그런 녀석은 환영받을 수 없다. 괜히 다른 애들이 지금 등에 번호도 없는 유니폼 입고 여기서 열심히 구르는 게 아니다.
“코치님!!”
“어, 나도 봤다.”
2군의 수석코치 최정식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본래 작년까지 투수코치였던 그는 이번에 2군 투수들을 잘 키워낸 것을 인정받아 1군에 올라갈 뻔 했었는데, 전 단장이 이번에 선임한 감독을 따라 온 코치에게 물을 먹어 2군에 또 주저 앉았다. 대신 수석코치 자리를 받긴 했지만 1군 투수코치 할래? 2군 수석코치 할래? 묻는다면 백이면 백 1군 투수코치를 택할 것이다.
‘이거 아주 나를 홍어좆으로 보는 거지.’
그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물론 프런트에는 그의 편이 많다. 그것도 아주 많다. 하지만 최근 15년. 마린스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고 덕분에 철밥통이니 뭐니 여론도 영 좋지 못하다. 마린스 모그룹에서는 그 좋지 못한 여론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 요 몇 년 단장들이 물갈이 된 것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다.
이럴 때는 일단 납작 업드려야한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에 단장을 이렇게 갈아치우고 외부인사를 영입해도 딱히 나아지는 건 없다. 아니, 오히려 잘 진행되던 플랜이 빠그라지면서 더 회복할 수 없는 나락을 향해가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뿌려두고 있는 상황이다.
“조금만 참자. 위에서 내려온 결정인데 나라고 무슨 힘 있겠냐.”
“코치님 하지만······.”
“새끼야!!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어차피 교육리그잖아. 투구 수 제한도 있고. 그다음에 나가면 되지. 어? 지금 안 그래도 신경 쓸 거 많은데. 너까지 나 머리 아프게 그럴래? 내가 이제 2군 수석코치인 거 몰라? 감독님 어차피 라인업 그렇게까지 신경 안 쓰잖아. 결국 너희 내가 다 챙겨줄건데. 이렇게 보챌거야?”
“죄······, 죄송합니다.”
“하여간에. 새끼가 진짜 꼭 소리를 질러야 말을 알아 듣네. 마, 너 내가 시킨 런닝은 다 뛰었어? 고기도 다 먹었고?”
“네!!”
“그래, 투수가 하체 단단하고. 몸 푸짐해야 오래 가는거야. 20살 때 반짝 해봐야 아무 소용 없어요. 결국 8년 잘 버티고. FA 챙기고. 어? 이게 다 내가 너희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나야 너희 잠깐 1, 2년 반짝 긁어먹고 그 빨로 승진하고 그러면 이득이야. 진짜 어디를 가도 나처럼 선수들 생각해서 몸부터 만들라고 하는 코치가 없어요. 알아?”
“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았으면 가서 런닝이나 좀 더 해. 나 때는 허벅지가 어? 여자 허리보다는 두꺼워야 어디가서 투수 소리 들었어.”
***
상동 야구장.
마린스의 2군 구장으로 시설 자체는 나쁘지 않은 편에 속했다. 한적한 곳에 위치한데다가 대중교통까지 불편하니 야구에 집중하기에도 딱 좋은 환경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자차가 없는 선수에 한해서이기는 했다.
자기 차만 있다면 부산 최고의 번화가인 서면까지 30분이면 충분하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놀러 다닐 수 있다는 뜻이다.
야구장으로 가는 길.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박광덕 코치님이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너무 긴장하거나 하지 말고. 그냥 연습 하던 대로만 하자. 알겠지.”
“네.”
타자로서이기는 하지만 빅리그 무대에서 커다란 성공까지 거뒀던 나였다. 고작 교육리그 정도에 긴장을 할 리가 없다. 물론 박광식 코치님이야 그런 걸 알 리가 만무하니 나름대로 격려를 이어갔다.
“솔직히 별 거 없어. 아니, 그렇다고 또 너무 자만하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아무튼 지금 네 속구는 프로 레벨에서도 쉽게 치기 힘든 공이야. 거기다가 하던 대로 커브만 들어가잖아? 장담하는데 프로 1군에서도 충분히 통한다.”
“네.”
“아, 물론 그렇다고 막 안타가 절대 안 나오고 그런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현역 메이저리거가 와도 프로 2군쯤 되면 가끔 안타 맞고 그러는 거야. 거기다가 어? 수비 실수로 막 점수 날 수도 있고 그래요. 그래도 멘탈 깨지지 말고 침착하게만 던져. 알겠어?”
“네. 코치님 긴장 그만 하시고 심호흡 좀 하세요. 습습후후. 말씀 그만하셔도 알아서 잘 할테니까요.”
“인마, 내가 긴장은 무슨. 그리고 습습후후 그건 임산부가 하는 거잖아. 아무튼간에 잘 해라. 어? 다시 말하지만 긴장하지 말고. 그렇다고 또 너무 자만하지도 말고. 잘 해야 쿨하게 빠져나오지. 괜히 못 던지고 또 나랑 학교로 돌아가면 팀 내는 물론이거니와 언론에서도 이야기 꽤 나올 거야. 오늘 뭐 관중이야 많지 않다지만 알지? 지금 방송국에서 와있어. 원래는 부산, 경남 방송국에서 올 게, 아예 전국 방송에서 나왔어요. 20억짜리 투수 등판한다고 해서.”
“지금 그러니까 긴장 하지 말라는 이야깁니까? 아니면 긴장을 하라는 이야깁니까.”
“적당히. 적당히 하라고. 아무튼 내가 포수 뒤편 제일 좋은 자리에서 지켜보면서 체크 해줄테니까 한번 마음껏 던져봐.”
코치님 차에서 내려 라커룸으로 향했다.
음, 사람들의 시선이 상당히 따가웠다.
“네가 최수원이로구나. 이거 드래프트 됐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얼굴을 한 번도 못 봐서 그런가? 못 알아볼 뻔했네. 몸이 좀 비리비리해보이는데.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는 거냐?”
“네.”
“그래, 유니폼 여기 있고. 일단 갈아입고 저기 저쪽 연습장에서 같이 몸 풀러 가자. 처음 오는 거라 어딘지도 잘 모를 테니 나 잘 따라오고.”
등번호 없이 이름만 딸랑 적힌 유니폼을 받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박혀 있긴 했지만, 솔직히 그 가시가 그리 날카롭지는 않았다. 그냥 사람이 좀 졸렬하구나. 보자마자 몸 이야기하는 거 보니 이 인간이 그 유명한 증량 성애자 최정식 코치구나. 뭐 그 정도?
장담한다.
지금 저렇게 뾰족하게 세운 가시? 30분이면 완전히 다 뽑혀 나가서 종적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왔냐?’
연습실로 가는 길.
포수 마스크를 쓴 누군가가 다가와서 속삭였다. 조유진이었다. 다행이다. 처음 보는 포수랑 합을 맞추는 거였으면 과연 내 공을 제대로 받아줄까 걱정부터 됐을 텐데, 이 녀석이면 그런 걱정은 없다. 최소한 뒤로 공을 흘리지는 않으리라는 안정감이 느껴지는 놈이니까.
-뻐엉!!
연습구 34개.
내 예상처럼 그 이후 최정식은 더이상 나에게 가시를 세우지 않았다. 그 대신 과당이 다량 함유된 팩 주스 하나를 슬쩍 내밀었다.
“고생했다. 당 떨어졌을 텐데, 이거 마셔라.”
“아, 네. 감사합니다.”
확실히 증량 성애자라는 명성이 있어서 그런가? 맛있는 주스 고르는 솜씨 하나는 일품이었다.
***
1회 초.
블레이즈의 덕아웃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린스는 최근 2경기에서 모조리 패배함으로써 루징시리즈가 확정이었으니 그 말인즉 상대편인 블레이즈의 경우는 위닝 시리즈가 확정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이번 마린스와 붙기 직전 블레이즈는 3승 6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기록 중이었는데 그게 단번에 5승 6패가 됐고, 이제는 6승 6패. 그래도 5할로는 리그를 마무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자자, 오늘은 방심하면 안 된다. 저기 최수원이. 20억짜리 다들 알지?”
“네!!”
“솔직히 언론에서 이런저런 이야기 떠들어대고 뭐 오버페이다 뭐다 말 많은데. 난 내가 구단 관계자면 20억 내고 무조건 잡을만한 놈이다. 내가 볼 땐 KBO에서는 충분히 오타니처럼 할 수 있는 놈이야. 감독 입장에서는 로스터 한 자리에서 선발도 하고 타자도 해주면 진짜 그만큼 고마울 수가 없지.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감독 입장에서의 이야기고. 이제 너희들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주자면 솔직히 20억짜리 실력은 아니야. 20억짜리 타자면 무섭지. 어? 투수들이 뭘 던지건 아주 뻥뻥 날려버릴걸? 20억짜리 투수? 어우 야. 그건 더 무섭다. 1년 144경기 중에서 걔가 등판하는 33경기. 그 중에서 한 절반 이상은 6이닝은 삭제하고 시작한다고 봐야지. 그런데 말이다.”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선수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20억짜리 투타겸업은 20억짜리 투수도 아니고, 20억짜리 타자도 아니야. 그렇다고 10억짜리 타자. 10억짜리 투수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그냥 합쳤더니 더 비싸진 거뿐이야. 로스터 한자리 가격 더 쳐줘서. 야, 정영식. 너 학창 시절에 마린스 최민혁이랑 피닉스 서규탁한테 홈런 몇 방이나 쳤냐? 조병진. 너도 전국대회 우승 서규탁한테 적시타 뽑아내고 했던 거 아니냐? 걔들도 10억 넘는 계약금 받은 투수들이야. 그리고 그 말은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가 20억이라고 쫄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알겠어?”
“네!!!”
“그러면 가자. 다들 아직 프로 밥도 못 먹어본 애송이한테 이게 프로라는 거 똑똑히 보여주자고.”
“네!!!”
2군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블레이즈는 그것을 선수가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빠르고 편안하게 펼쳐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능력이라고 봤다. 그런 의미에서 블레이즈의 2군 감독인 최종엽은 거기에 참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블레이즈 선수단의 사기가 눈에 띄게 올라갔다.
그리고 마운드.
등번호 따윈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마린스의 유니폼위로 최수원. 오직 그 세글자만이 그를 증명했다.
블레이즈의 1번 타자.
올해 나이 23세의 조병진이 타석에 들어왔다.
5년 전.
아직 드래프트 1차가 있던 시절 2차 2라운드 20번으로 지명된 이루수로 2년간 1군과 2군을 오가며 경기를 뛰었고, 이후 곧바로 상무로 병역을 끝내고 올 시즌 역시 1군에서 20경기 가량을 소화했다.
장타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발이 매우 빠르고 방망이에 공을 맞추는 능력이 걸출하여 블레이즈에서도 수위타자로 기대하고 있는 유망주다.
최수원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조병진이 마음속으로 타이밍을 헤아렸다.
그가 프로에 있으면서 가장 확실하게 몸에 취득한 것은 공을 커트하는 방법이었다. 최대한 마지막까지 공을 보고 몸의 중심 뒤쪽에서 컨택하며 배트를 슬쩍 잡아당겨 파울을 양산한다.
아무리 대단한 투수도 항상 좋은 공을 던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결국 실투는 나오기 마련이다. 게다가 공을 많이 본다는 것 자체로도 팀에게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이 바로 팀 스포츠의 묘미 아니겠는가.
하나.
두···
-뻐엉!!!
“스트라잌!!!”
···울.
157.1km/h
용병 투수에게서도 쉽게 보기 힘든 광속구가 홈플레이트를 통과했다. 그것은 조병진의 반응을 아득히 넘어선 타이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