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91화 (91/305)

91화. 20억(5)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1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 시즌이 끝나는 날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오늘 오규환씨에게 그 말은 해당이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낙동강 교육리그.

야구 시즌도 다 끝났는데 왜 이건 새로 시작해서 오규환 씨를 괴롭게 하는가.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그대로 내동댕이치려던 오규환 씨가 남은 할부금 87만 7천 원에 이성을 되찾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0.01초. 그래도 사나이가 한번 올린 손을 그대로 내려놓을 수는 없었던지라, 조용히 스마트폰과 범퍼케이스를 분리해 범퍼케이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에이 싯팔!!!”

아니, 그래. 교육리그의 목적은 승리가 아닌 거 잘 알겠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2승 9패가 말이 되나? 이래서야 내년도 너무 뻔한 거 아닌가?

무엇보다 교육리그는 일반적으로 새롭게 영입한 신입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올해 1번 픽을 갖고 있었던 마린스가 2승 9패를 했다는 건 정말이지 참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을마린스: 아니, 최수원은 대체 왜 교육리그 안 나오는 거야?

─again1984: 내가 팀에 아는 사람 있는데 그쪽 말로는 지금 합류를 아예 하지 않았다던데?

─최강동원: 그게 무슨 소리야? 최수원 몸에 뭐 문제라도 있는 거야? 왜 팀에 합류를 안 해?

─again1984: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개인 훈련 중이라고 하던데.

─사직야가다: 걔 미친 거 아니야? 여기가 무슨 메이저도 아니고. 아니, 메이저도 그렇게는 안하겠다. 신입이 개인 훈려언?

─수학의정석마린스: 그러고보니 최수원 고등학교 소문도 좀 안좋던데.

─최강동원: 소문?

─수학의정석마린스: 어, 지 야구 좀 한다고 선배들 개무시하는 독불장군이었다는 소문이 있어.

─again1984: 신인이 개인 훈련 하는 게 선배들 개무시라니. ㅉㅉㅉ 생각하고는.

─사직야가다: 하여간. 전단장 이 새끼. 신입 뽑는 솜씨 진짜. 에휴. 1라운드는 워크에씩 개판인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독불장군에. 2라운드는 땅볼만 주구장창 치는 포수? 야, 때려치우라고 그래. 내가 진짜 경하고 거르고 서울 애들만 계속 뽑을 때부터 알아봤다.

─가을마린스: 아니, 그래도 백하민은 잘 던지잖아.

─사직야가다: 응, 조규찬이 더 잘 던졌어.

인터넷은 언제나 그렇듯 난리였다.

조금 코어한 팬층으로 갈수록 신인 드래프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대형 FA야 금액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지만, 그 이상으로 팀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프랜차이즈였으니까.

여느 스포츠가 다 그렇듯 야구 역시 지역 기반의 스포츠였고, 당연히 그 지역 출신의 선수에게 더 호감을 줄 수밖에 없다. 이건 단순히 한국 스포츠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일본이건 미국이건 마찬가지다.

“이 새끼들 또 지랄이네. 하여간 지역감정 없어진 지가 언젠데. 에휴.”

물론 마린스의 그것은 조금 특별하긴 했다.

보통의 경우 자기 지역 출신의 선수를 ‘더’ 선호하는데 그치는 반면, 마린스의 경우는 지역 외 출신 선수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어딘가에 형성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제일 큰 문제는 그런 주제에 야구를 못 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인터넷 여론을 앞에 두고 오규환 씨는 생각했다.

그래도 최수원을 뽑은 건 잘못은 아니었을 거라고. 그가 확인한 최수원은 진짜배기였다. 물론 하이라이트 편집만으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선수가 어딨냐고 떠드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작자들에게 오규환 씨가 해줄 수 있는 답은 플레이 하나하나가 모두 하이라이트 필름이 되는 선수가 세상에 어딨냐는 답이었다.

“스읍······. 근데 아무리 개인 훈련이 바빠도 한 경기 정도는 뛰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도 20억이나 받았는데?”

***

“오, 주언아. 어쩐 일이야.”

“이렇게 학교 돌아다니는 게 제 일인데 어쩐 일이냐뇨.”

“에이, 내가 반가워서 그러지. 반가워서.”

“수원이는 좀 어때요?”

김과장의 시선이 저쪽에서 몸을 풀고 있는 최수원을 스쳤다.

“어떻기는. 죽여주지. 장담하는데 내년에 너희 팀 진짜 대박 날 거다. 나 내년에는 부산 은행에 적금 넣을라고.”

“그 정도예요? 형님 그거 부산 은행이 벌이는 합법적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엄청 욕했었잖아요.”

“야, 말도 마. 이번에 걔들 처음으로 토해낼 거니까. 마린스의 문제점이 뭐냐?”

“글쎄요······. 올 시즌 우리 문제라면 하반기에 체력이 좀 방전된거니까 뎁스? 뎁스가 좀 두꺼웠으면 선수들한테 휴식주면서 버텨낼 수 있었겠죠.”

“아니지. 아니야. 그건 마린스의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야.”

“그럼 마린스의 근본적인 문제가 뭔데요.”

“그야 토종 에이스가 없고, 타석에 중심을 잡아줄 타자가 없고, 수비가 종종 흔들린다는 부분이지.”

맞는 말이었다.

“잠깐만요. 형. 방금 그 말은 좀 아픈데? 방금 팩트가 뼈를 세게 때리고 지나갔는데? 아니, 야구팀이 못 던지고, 못 치고, 수비까지 못 하면 그건 그냥 다 못한다는 말이잖아요.”

“근데 들어 봐봐. 토종 에이스 하나에 타선에 중심 잡아줄 타자까지 하나 딱 생기면 이제 문제는 수비 하나잖아. 야구는 셋 중 하나 정도는 좀 후달려도 충분히 우승노려볼 수 있거든. 타팀이라고 다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지금 최수원 하나로 그게 다 될거다? 에이, 형. 물론 나도 작년부터 최수원 강하게 밀긴 했는데 솔직히 좀 오버 심한 거 아닙니까? 뭐 타격이야 그렇다고 쳐도. 피칭은 아직 에이스급은 아니죠.”

“두고 봐라. 이대로 딱 두 달만 나한테 더 맡겨 놓잖아? 너희 선발 한 자리는 아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김과장이 박광식을 알고 지낸 지 벌써 9년 째.

허풍이 쎈 형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적어도 야구에 관해서 만큼은 쉽사리 허언하지 않는 형이기도 했다.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확실히 좀 기대가 되네요.”

“수원아. 몸은 다 잘 풀었어?”

“네.”

“최수원 선수, 오래간만이에요. 드래프트날 보고 처음 보는 거죠?”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앳된 얼굴.

과연 이 어린 친구가 마린스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김과장은 박광식의 말이 현실에 이뤄지기를 바랬다.

그의 나이 올해 서른다섯. 마린스는 그가 세상의 밝은 빛을 보던 해에 마지막으로 우승을 했다. 지금까지 그가 살면서 만나왔던 마린스를 응원하는 수많은 팬들을 위해서라도 마린스는 한 번 정도는 우승을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최수원의 활약이 우승으로까지 이어진다면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추천했던 자신의 미래가 조금 더 밝아진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기는 했지만.

“자자, 그러면 여기 서서 떠들지 말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가시죠.”

“뭐야? 법카야?”

“한도 15만원이에요.”

“야, 15만원이면 충분하지. 저기 학교 앞에 냉삼 잘하는 곳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돼지 굽는 고소한 냄세로 가득한 가게.

박광식이 자진해서 집게와 가위를 들었다. 과연 운동선수 출신, 그리고 현역 운동선수의 먹성은 대단하여 1인분 6천 원짜리 냉동 삼겹살 25인분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최수원 선수. 이건 그냥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절대 강요는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남은 된장찌개를 박박 긁어먹던 박광식이 그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뭔데? 뭔데 갑자기 그렇게 무게를 잡아?”

“아니, 혹시 모레 있을 낙동강 교육리그 마지막 경기 참가해줄 수 있을까 싶어서.”

“교육 리그?”

“어, 아무래도 그 경기 감각 같은 거 익히기도 좋고. 팀원들이랑 미리 호흡 맞춰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고교야구랑 여러 가지로 분위기가 좀 다르기도 하잖아.”

“뭐, 그건 그렇지. 안 그래도 커브도 슬슬 몸에 좀 익어가는 느낌인데 잠깐 가서 공 던져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그렇지? 아무래도 실전에서 던져 보는 것도 좋은 연습이니까.”

박광식의 말에 김과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수원아, 너 아이스크림 먹고 싶지 않냐?”

“네? 갑자기요?”

“갑자기는. 원래 고기 먹으면 아이스크림 땡기는 게 당연한 건데. 여기 이걸로 저기 길 건너 편의점 가서 아이스크림 좀 사와라.”

“형, 그냥 가는 길에······.”

“어허, 원래 양반은 디저트까지 한 자리에서 다 먹고 일어나는 법이야. 수원아. 자. 이 카드로 사와. 절대 고급아이스크림 코너는 얼씬도 하지 말고. 투쁠러스원으로.”

수원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와는 달리 수원은 눈치가 있었다. 지금 타이밍에 아이스크림 심부름을 보낸다는 것은 누가 봐도 그 목적이 아이스크림이 아닌 김과장과 둘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내용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자, 그러면 수원이 없으니까 이제 솔직하게 좀 이야기 해보자. 너희 단장 요새 좀 많이 후달리냐?”

“어?”

“뭘 놀라고 그래. 네가 전 단장 라인인 거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마린스와 함께 KBO의 양대 바닥으로 불리는 피닉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프랜차이즈에 대한 예우다. 물론 프랜차이즈를 대접하는 것이 어떻게 문제가 될 수 있느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피닉스는 단순한 대접을 넘어 그들을 코치로 고용한다. 물론 좋은 선수가 항상 지도자로 망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선수와 좋은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미묘하게 달랐고, 그것이 피닉스 코치진의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다면 그 피닉스와 맞먹는 마린스는 어떠한가.

여긴 그래도 프랜차이즈를 그렇게까지 대접하지는 않는다. 여긴 그것보다 학맥과 인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다. 말만 들어보면 뭔가 더 막장인 것 같다. 하지만 놀랍게도 학맥과 인맥으로 자리를 보전하는 코치나 현역 시절 명성으로 자리를 보전하는 코치나 그게 그거라 그렇게까지 더 막장은 아니다.

아무튼 마린스라고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서 가끔 감독을 외국인으로 데리고 오기도 하고 단장을 파격적으로 데리고 오기도 하지만 벌써 수십 년째 박혀 있는 사람들과 시스템을 한순간에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시 제자리다.

그리고 그 파격적인 단장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현 마린스의 단장인 전상익이었다.

“솔직히 좀 후달리긴 하겠지. 3년 전부터 올해까지 전단장이 신인 드래프트에 쓴 금액이 유래가 없을 만큼 막대한데 그 신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교육 리그 성적이 이 모양이니까.”

이래서야 차라리 FA에 돈을 썼어야 했다. 이런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전상익 입장에서야 좀 억울한 평가였다.

재작년의 드래프트 1라운더인 최민혁은 1군에서 제법 쏠쏠하게 던지다가 팔꿈치 수술로 빠진거고, 작년의 1라운더인 백하민은 매우 훌륭했으니까.

하지만 어쨌거나 결과는 결과. 이런 들끓는 여론은 전상익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20억짜리 신인이 갑자기 등장해서 쾅!! 압도적인 모습 한 번 보여주면 그런 이야기가 쑥 들어가겠지. 물론 리스크는 있어. 괜히 컨디션 별로인데 올라와서 망하기라도 하면 20억이나 쓴 유망주가 저 모양이냐고 여론은 더 안 좋아질 테니까. 그래서 네가 직접 눈으로 보러 온 거고. 아니야?”

“형······. 뭐예요? 지금까지 지능을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야, 내가 숨기긴 뭘 숨겨. 내 몸이 조금 푸짐해져서 오해들을 하는데. 내가 원래 현역 시절에도 지능형 투수였다고. 아무튼. 나도 개인적으로 마린스에 그 공무원들 보면 좀 열 뻗치니까 나도 도와줄게. 아니지. 이미 도와준건가?”

“도와줬다고요?”

“그래, 인마. 수원이 걔 은근 고집이 세서 일단 아니라고 하면 어지간하면 마음이 안 바뀌거든. 거기서 교육리그 안 나가겠다. 뭐 그런 이야기 딱 하잖아? 그러면 그땐 이런저런 조건 아무리 가져다 대도 싫다고 그럴 거라고.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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