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90화 (90/305)

90화. 20억(4)

“야, 최수원. 너 진짜 안 올 거야? 여기 지금 분위기 장난 아니야.”

조유진이 소곤소곤 속삭였다.

“뭐라고? 잘 안 들려. 좀 크게 말해봐.”

“아니, 너 진짜 안 올 거냐고.”

“어, 나 요즘 바빠. 이게 될 듯 말 듯 영 어렵네.”

“하······. 미치겠네. 야 지금 여기 분위기 진짜로 장난 아니야.”

마린스는 올해도 가을 야구를 하지 못했다.

그래도 7월까지 5위 경쟁을 했다는 점에서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자위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후로 보여준 모습이 너무나도 지리멸렬했기에 시즌을 지켜본 팬들의 입장에서는 딱히 위로가 되는 모습은 아니었다.

차라리 시즌 막판에 고춧가루라도 뿌렸다면 내년에는 다르다!! 같은 정신승리라도 하겠지만 막판 열 경기를 기준으로 마린스는 2승 8패를 거뒀고 그나마 위안이라면 초반에 벌어둔 승리 덕분에 정규시즌 꼴찌는 아니었다는 점 정도뿐이다.

승리는 언제나 옳다.

바꿔말하자면 패배는 언제나 그르다는 뜻이며 마린스는 언제나 글러 먹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또한, 언제나처럼 그냥 시즌 내내 무기력했으면 모르겠다. 무려 7월까지 붕 떠 있다가 저 밑으로 처박힌 덕분에 분위기는 더 최악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린스의 시즌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마린스의 시즌은 끝났지만, 1.5군 미만 선수들의 시즌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낙동강 교육리그.

처음에는 이름 그대로 정말 낙동강을 사이에 둔 창원 블레이즈와 부산 마린스만의 단촐한 시리즈였던 이것은 2019년에 처음 시작된 이후 매년 그 규모를 확대해왔다. 처음에는 낙동강 상류 지역 팀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 그리핀즈가 합류했고 조금 늦게 광주의 호크스가 합류했다.

이후 서울 수도권 지역 팀들이 이와 비슷한 교육리그를 개최하기 시작했고, 위아래 어디로 합류할지를 고민하던 대전의 피닉스는 결국 올해 낙동강 교육리그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프로팀 가운데 무려 다섯 개 팀이 경합을 벌이는 교육리그가 탄생한 것이다. 한 팀당 열두 경기씩 다 해서 총 서른 경기. 한국시리즈까지 모조리 다 끝나고 아쉬움이 가득한 팬들에게는 일종의 선물이 된 셈이다.

비록 유명한 1군 선수들은 아무도 참가하지 않지만, 여기서 두각을 드러낸 선수가 다음 해에 1군 무대에서 활약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으니 최근에는 몇몇 경기의 경우 공중파에서까지 중계를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마린스는 그 낙동강 교육리그에서 또 마린스를 하고 있었다.

“지금 선배들도 너 건방지다고 말 나오고 있고, 동기 애들은 거의 너 공공의 적 취급이다. 20억이나 받았다고 자기 눈 밑으로 깔고 보는 거 아니냐고.”

“너는 어떤데?”

“나?”

“어, 너 나랑 같은 학교 출신에 2라운드잖아. 애들이 막 따돌리고 그래?”

“아니, 난 아니지. 난 여기서 열심히 하고 있잖아.”

스마트폰 화면 너머의 조유진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야, 너 솔직히 내 욕하고 다니지.”

“어? 내가?”

그러고 보면 과거에도 좀 그랬다. 조유진 저 녀석은 안병영이 나에게 지랄 맞은 것을 잘 알면서도 팀 전체를 생각했을 때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방관했었다. 게다가 어딜 가거나 인간관계의 중심에 들어가는 녀석의 성향을 생각해봤을 때, 지금 공공의 적이 된 나를 커버쳐주기 보다는 은근슬쩍 같이 욕을 보태면서 스며들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아니, 뭐 꼭 욕을 한 건 아니고. 그냥 너도 그럴만하다. 뭐, 살짝살짝 커버도 치면서. 야, 솔직히 네가 돌아왔는데 내가 하민 선배 꼴이면 어? 네가 어떻게 팀에 융화가 되겠냐. 내가 다 미리미리 이렇게 작업을 쳐둬야 너도 쉽게 하나가 되지.”

“하민이 형 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하민이 형한테 무슨 일 있어?”

하민이 형은 이번 시즌 제법 괜찮게 공을 던졌었다.

물론 시즌 내내 1군에서 공을 던진 건 아니었다. 초반에 잘 던지던 하민이 형은 많은 신인들이 그렇듯 7월 미친 폭염 속에서 푹 퍼졌다. 결국 경기를 몇 번 말아먹었고 평자책 4점 중반대까지 올라간 이후 2군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9월에 결국 다시 1군에 복귀했고 최종 성적은 41.1이닝에 47피안타 24실점 19자책 4피홈런에 38탈삼진 11볼넷으로 4.14의 평자책을 기록하며 팀에서 세 번째로 잘 던진 불펜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아니, 그냥 코치님부터 해서 뭔가 기류가 좀 별로더라고.”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봐. 뭐가 어떤데.”

“음, 뭐랄까? 그냥 2년 전에 우리 팀에 너랑 비슷한 느낌?”

“야, 그건 좀 별로가 아니라 최악인 거 아니냐?”

“아냐, 아냐. 느낌만 좀 그런 거고. 하민 선배는 너랑 달리 성격이 괜찮더라고. 시간 좀 지나면 괜찮아질걸? 게다가 듣기로는 그래도 1군 선배들이랑은 잘 지낸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여긴 붙박이 1군은 없고, 연차랑 상관없이 하민 선배한테 밀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잖냐. 게다가 최근에 소문으로는 내년에 하민 선배한테 선발 기회 줄 거라는 소문도 있어서 좀 더 그런 것 같아.”

사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빅리그 붙박이들과 25인과 40인의 경계에 있는 애들은 내가 합류했을 때 분위기가 확 달랐었다. 이건 KBO나 마린스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냥 사람 사는 곳은 다 그렇다고 봐야했다. 어디나 밥그릇이 달린 문제는 예민할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야, 그나저나 너 커브는 좀 어떠냐? 병영 선배 말로는 코치님이 너 아주 예뻐서 죽을라고 그런다던데.”

“뭐야? 쪼유 너 안병영이랑도 연락해?”

“어, 뭐 가끔? 병영 선배도 내년에 얼리 한 번 도전해볼 거라고 그러던데? 아무튼 내가 생각할 땐 어지간하면 교육리그는 합류하는 게 좋지 싶다. 어차피 이거 11월 초순이면 끝나잖아. 그리고 다시 11월부터 거기 가서 훈련하면 되는 거고.”

“야, 그게 되겠냐? 그리고 너네 교육리그 끝나면 마무리 훈련이라고 11월 말이나 12월 초까지 상동 갈 거 아니야. 아예 안가면 모를까. 거기서 중간에 빠지는 게 더 모양새가 이상하지.”

“그러면 11월까지 같이 훈련 하는 것도······.”

“야, 그러면 자율훈련 할 시간 딱 한 달 남는 거거든? 1월 중순에 또 동계훈련 모집하잖아. 애당초 그런 교육리그니 마무리 훈련이니 하는 건 나처럼 개별 훈련하기 힘든 선수들 대상으로 하는 거야. 나한테는 필요 없다고.”

“그래, 취지는 그게 맞지. 근데 현실이 그게 아니잖냐. 너 진짜 그러다가 괜히 밉보여서 겉도는 수가 있어.”

쪼유의 말이 이해는 됐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야구는 팀 스포츠고 팀원과의 융화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니까. 게다가 녀석이 지금까지 해온 야구에서 선후배의 관계란 매우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으니까.

“상관 없어.”

“뭐라고?”

“상관없다고. 야, 무슨 학교 야구도 아니고. 훈련 같이 안 했다고 밉보여서 겉돈다고? 그건 그냥 애초에 날 싫어할 준비가 된 인간들인 거야. 솔직히 자기들 제치고 1군 먼저 올라가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냐? 난 프로에서 굳이 그런 애들 비위까지 다 맞출 생각은 없다.”

“야, 최수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그리고 훈련 열심히 참가 안 하는 건 1군 붙박이 선배들도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거든?”

“그거야 훈련 열심히 안 해서 야구 잘 못 하는 애들 이야기지. 따로 개인 훈련 해서 팀 훈련 한 것보다 더 완벽하게 해온다? 난 그런 후배면 아주 예쁠 것 같은데?”

아마추어에서 1년 1년은 매우 중요하다. 한참 성장기에 1년은 보통 넘기 힘든 실력차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는 다르다. 결국 실력이다. 한참 변화구 장착하고 프로 준비해야 되는 타이밍에 교육리그니, 2군 멤버들과 융화되느니 하는 짓? 의미 없는 수준을 넘어 심각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분명 야구는 팀 스포츠다.

하지만 동시에 야구는 개인과 개인의 맞대결이다.

필드 안에서 복합적으로 움직이는 많은 구기종목들과 달리 야구는 결국 투수와 타자의 1:1 승부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타자가 공을 치지 못하면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고, 투수가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넣지 못하면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 야구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스트라이크 존에서 타자들의 방망이를 붕붕 돌아가게 만들 기가 막힌 커브볼이지, 2군들이 모여서 다투는 교육리그가 아니다.

“쪼유 나 저녁 훈련 할 시간이다. 이만 끊는다.”

“야!! 최수원. 최수원!!”

***

2013년 창원 블레이즈가 프로 1군에 합류한 이후 14시즌.

마린스는 블레이즈의 창단 첫해인 2013년과 블레이즈가 역사상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던 2018년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리그 최종 성적에서 블레이즈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창원 블레이즈는 고작 1군 합류 여덟 시즌 만에, 마린스 45년 역사에 단 한 번도 기록해본 적이 없는 통합 우승까지 이룩했다.

굴욕의 역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난 15년. 마린스는 리그 부동의 하위권으로 상위 드래프트를 쭉 수급해왔다. 그렇다면 적어도 신인이나 2군급 선수들이 맞붙는 교육 리그 정도는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합리적이지않았을까?

하지만 마린스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았다.

합리적이라면 마린스가 아니다.

2026년 낙동강 교육리그.

마린스는 지금까지 총 열 번의 경기를 치렀다. 그리고 그중에서 딱 2번 이겼다.

야구는 세 번 싸워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고 나머지 한 번의 경기로 순위가 결정나는 게임이다.

그리고 그 말에 따르자면 2026년의 마린스는 교육리그에서조차 야구를 하고 있지 않았다.

-딱!!!

백하민의 손가락이 높게 뜬 야구공을 가리켰다.

마린스의 영원한 유망주. 중견수 이주혁이 그 공을 쫓았다.

오른쪽인가?

햇살이 좀 눈 부셨다.

아, 왼쪽이다.

이주혁의 발은 매우 빨랐다. 살짝 낙구 지점을 잘못 예측했음에도 그 공을 따라갈 수 있을 만큼 매우 빨랐다.

아니다. 처음 예측이 맞았다. 오른쪽이다.

하지만 아무리 발이 빨라도 낙구 지점을 두 번이나 잘못 예측하고 공을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발이면 애초에 야구가 아니라 육상을 해야 했다.

보는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갈지자(之)형 수비.

지극히 평범한 플라이볼이 그라운드에 떨어졌다.

백하민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6회까지 0:0으로 팽팽하게 이어지던 경기의 균형이 저런 어처구니없는 수비 실책 하나에 깨진 것이다.

“수고했다.”

게다가 오늘 경기가 지역 방송으로까지 송출되는 인기 경기라고 해도 어쨌거나 교육리그 경기다. 각 투수들마다 한계 투구수가 정해져있다. 0점으로 잘 틀어막던 상황이었기에 6회까지 맡기려던 것이지 비자책이라고 해도 점수를 내준 마당에 굳이 마운드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백하민이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리고 그날 마린스는 교육리그 아홉 번째 패배를 기록했다.

2승 9패.

부산의 여론이 미친 듯이 끓어 올랐다.

***

-퍼억!!!

날카롭게 떨어지는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

여덟 개 연속이었다.

탄착군의 크기는 어린아이 머리통 정도.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커브를 두 개 던지고 중간에 하나씩 포심을 섞었음에도 탄착군이 더 커지지 않았다는 점이 매우 놀라웠다.

안병영만 하더라도 구속이 좀 아쉽지 커브에 대한 감각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던 박광식이었다.

하지만 최수원은 또 달랐다.

‘와······. 얜 대체 뭐지?’

과연 600만 불의 사나이인가?

마운드의 최수원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맺혀있던 땀방울을 닦아냈다.

“코치님!!!”

“어?”

“그······, 그······.”

“뭔데?”

“김주언 스카우트님 오셨습니다!!”

“주언이가? 걔가 갑자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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