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20억(2)
가끔 손만 잡아봐도 알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녀석들이 있다. 솔직히 광식은 그런 놈들은 죄다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랄까?
최수원의 손을 잡는 순간 느껴졌다.
묵직했다. 악력을 자랑하기 위해 손에 힘을 주거나 한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언론등을 통해 알고 있는 그의 재능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에게서는 뭔가 특별함이 존재하는 것일까?
박광식이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런 특별함을 이야기 하는 것들은 죄다 사기꾼이다. 아우라 이론이 붕괴된 지가 언제인데. 세상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사실 고교시절만 따져보면 박광식 역시도 그저 그런 유망주는 아니었다. 20년 전에 100만 달러라면 그간에 있었던 메이저리그의 인플레이션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300만 달러에 육박하는 거금이다.
그래도 지금으로치면 0.5 최수원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거금을 받고 미국에 건너갔던 자신도 결국 MLB 무대를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채 귀환했고, 심지어 KBO에 제대로 된 성적도 남기지 못한 채 쓸쓸하게 은퇴했다.
‘그래, 그래도 좀 다르긴 다르지.’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600만 달러라는 금액이 주는 묵직함은 또 다르다. 게다가 당시에는 국제 유망주 계약금 보너스풀 제도가 없던 시절인 만큼 지금 국제 유망주 슬롯머니 600만 달러와는 실제적 가치가 좀 다르긴 하다. 박광식이 그것까지 정확하게 인정했다.
짧은 시간.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박광식에게 최수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코치님. 오늘 경기 잘 봤습니다.”
“아, 그래. 잘 봤다니 다행이네. 어때? 병영이 공 많이 좋아졌지?”
“네, 커브가 정말 일품이던데요? 타석에서 본 게 아니라 제대로 본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각이 조금 작은 대신에 손에서 출발할 때 둥실하는 느낌이 거의 없더라고요.”
“역시. 제대로 볼 줄 아는구만. 맞아. 보통 고교야구 코치들이 가르쳐주는 커브랑 내가 가르치는 커브는 발사각이 조금 다르지. 장담하는데 한국에서 이거 제대로 가르치는 코치는 몇 안 될 거야.”
자신이 가르친 커브를 정확히 알아본 것에 신이 난 것일까?
박광식이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사실 브레이킹볼이라는 게 그래요. 훅 하고 떨어지면 당연히 보기는 좋지. 뭔가 더 치기 어려워보이고. 하지만 이게 결국 타자를 현혹하는 게 목적이란 말이지. 내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애들이 이상하게 내 커브는 뻥뻥 잘 쳐내더란 말이야? 근데 미국이라는 게 그래요. 한국이랑 또 달라. 코치들이 아무도 내 커브의 문제점을 먼저 알려주지를 않는 거야.”
“그래서 직접 알아내신 거군요.”
“아니, 그건 또 아니고. AA까지는 쭉쭉 갔는데 거기서 턱 하고 정체가 되버려서 한 1년을 고생했거든. 그때 팀에 코치 중에 윌이라는 영감님이 있었는데 그분은 좀 뭐랄까? 미국인치고는 오지랖이 굉장히 넓던 영감님이었어. 덕분에 싫어하는 애들도 많았는데 내 경우는 땡큐였지. 아무튼 그 윌 영감님이 나한테 말하기를 자기 커브만 제대로 익혀도 메이저에서 뛸 수는 있을 거다. 뭐 그렇게 이야기했거든.”
22세부터 26세까지 무려 4년.
박광식은 그 긴 시간 동안 커브를 연마했다. 물론 중간에 팔꿈치 인대를 갈아치우는 일도 있긴 했지만, 그때 재활에 사용한 시간은 1년 남짓이니 커브만 무려 3년을 붙잡고 있었던 셈이다.
“미쳤던 거지. 3년을 그렇게 고생했는데 결국 윌 영감님이 말하던 그런 수준까진 커브를 못 던졌거든. 그래도 어찌어찌 한 두 어번 정도 빅리그 콜업될 기회도 있었는데 기가 막히게 빗나가고, 평자책 4점대인데 27살쯤 되니까 슬슬 쫄깃해지더라고. 계약금으로 받았던 돈도 생활비에 뭐에 이미 다 써버렸고. 아무튼 그래서 결국 한국 돌아왔지. 다행히 우리 때는 해외파 KBO 특별지명도 있었고, KBO 안 뛰었어도 상무랑 경찰청에서 뛸 수 있기도 했는데······.”
박광식이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어휴, 내가 지금 애 데리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아무튼 그렇게 배워온 커브인데. 뭐, 이게 오래 던지니까 미국 있던 시절보다 확실히 더 잘 던지는 요령 같은 걸 알겠더라고. 게다가 한국에서는 꽤 쏠쏠하기도 했고. 뭐 상무 끝내고 나왔더니, 구속이 이미 전성기 때랑 비교해서 15km/h쯤 떨어져서 별 의미가 없긴 했다만.”
“병영 선배한테 가르쳐주신 요령은 그렇게 몸으로 익힌 요령들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어, 뭐. 그런 셈이지. 근데 솔직히 내가 잘 가르친 것도 있지만, 병영이가 커브에 제법 재능이 있긴 있는 편이야. 구속이 좀 안나와서 그렇지 감각이 있더라고. 이건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타고 나거나. 아니면 엄청 던져서 경험치로 채워 넣거나 해야지.”
최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학교에 있을 때도 안병영은 커브를 결정구로 쏠쏠하게 잘 써먹긴 했었다. 조유진이 워낙에 블러킹을 잘했던 덕분에 원바운드 되는 공이 뒤로 빠지지 않는다는 점도 유효했었고.
“코치님.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저도 커브 그립 잡는 것 좀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커브를? 흐음······. 수원이 네가 거의 100마일짜리 공 던지지 않나? 그런데 너한테 커브가 굳이 필요할까?”
“네?”
“아니, 그렇잖아. 솔직히 그런 속구 있으면 걍 적당히 존 구석에 그것만 잘 집어넣어도 거의 정타가 나오기 힘들 텐데 굳이 커브 같은 거 익힌다고 시간 버릴 필요는 없잖아.”
박광식의 그 말은 수원이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답이었다.
“사실 투수가 모든 구종을 다 잘 던질 필요는 없거든. 그보다는 자기한테 좀 맞는 걸 선택해야지. 뭐, 속구에 커브에 체인지업이 정통파 투수의 레퍼토리이긴 한데, 난 솔직히 거기에 좀 회의적이거든. 아, 물론 우리 학교 입학하는 애들한테 주야장천으로 커브만 익히게 하는 코치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이게 또 다 이유가 있거든.”
물론 커브는 제대로 익히기만 한다면 단일 구종으로는 가장 강력한 공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제대로’라는 부분이다. 커브를 ‘제대로’ 익히는 데는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그렇게 ‘제대로’ 커브를 익혔다고 해도 그게 정말 윌 영감의 이야기처럼 커브 하나만으로 빅리그에서 통할 수 있느냐를 묻는다면 박광식은 과거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현재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아이들에게 굳이 커브를 가르치는 건 드래프트에 떨어진 채로 대학까지 온 애들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기 때문이야. 게다가 얘들이 뛸 곳은 빅리그가 아닌 KBO이니까. 하지만 수원이 넌 다르지.”
박광식이 생각하기에 최수원만한 재능을 지닌 투수가 빅리그에서 뛸 생각이라면 굳이 커브를 익힐 시간에 다른 구종을 익히는 것이 빠를 것이고, 만약 빅리그에 가지 않는다면 굳이 커브가 없어도 생태계 교란종급의 구속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 다듬는 것이 더 맞다.
맞는 말이다.
바라는 것이 그저 빅리그에서 뛰는 투수라면 말이다.
최수원이 입을 열었다.
“전 그냥 빅리그에서 뛰는 투수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서요.”
하지만 최수원이 바라는 것은 두 개 이상의 플러스 피치를 갖춘 컨텐더 팀에나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사이 영을 다툴 수 있는 진짜배기 에이스.
“그건 절대 한, 두 달로 되는 게 아니다.”
“네, 고작 그 정도로 될 거로 생각했으면 KBO에 남지도 않았을 겁니다.”
최수원이 바라보는 높이는 박광식이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던, 그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목표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득한 높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압도적이었기 때문일까?
박광식은 자신도 모르게 어쩌면 손만 잡아도 알 수 있다고 떠들어대는 사기꾼들 가운데 몇몇 정도는 '진짜'를 만난 경험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렇기에 몹시 확인해보고 싶어 졌다.
그 터무니없는 생각이 정말 현실에 이뤄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그러면 잠깐 연습장으로 가 볼까?”
“네.”
***
9월 말.
길고 길었던 마린스와 최수원의 협상이 마침내 끝났다.
[역대 최고액 20억!! 마린스. 중앙고 최수원과 전격 계약 발표!!]
─삼진왕김홈런: 20억? 마린스 미친 거 아니야? 신인한테 20억을 태운다고?
─8888577: 마린스 우승을 위해서라면.
─삼전88층살려줘: ㅅㅂ 좋겠다. 고딩이 벌써 은퇴자금 모았네.
─만승구단: 뭐야? 분명 어제까지 우리 팀 기자가 최수원이랑 프런트랑 이야기 중이라고 트윗 날렸었는데?
─꼴뚜기게임: 와, KBO 인플레 미쳤네. 근데 드래프트면 독점 계약 같은 거 아님? 어차피 잡은 물고기인데 거기다가 무슨 20억을 태움?
─나는행복합니다: KBO는 독점인데 미국으로 가는 수가 있어서 독점 계약은 아님. 최수원이면 지금 메이저 구단에서는 50억씩 부른다고 하더라.
─88층구조대는언제오는가: 50억? 최수원 아직 어려서 돈 무서운 줄을 모르네. 30억이나 차이 나는데 미국을 안가고 한국에 남는다고?
─8888577: 마린스 우승을 위하여.
─논리왕피카츄: KBO에 남는 게 리스크가 적으니까. 게다가 이번에 포스팅 규약 바뀌어서 7년 안 채우고 미국으로 뜰 수도 있음. 지금 가면 마이너부터 시작인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콩단장: 하여간 야알못이 아는 척하기는. 최수원 빠따면 지금 가도 거의 곧바로 메이저 콜업임. 저거 백 퍼 이면계약 있을걸?
─꼴뚜기게임: 20억도 미쳤는데 이면계약이 있다고?
─콩단장: 마린스는 손해 보는 거 없음. 지금 빅리그에서 500만 달러 이야기 나오는 애인데, 얘 그대로 내년에 포스팅 내놔도 30억 이상 남겨 먹는 장사임. 심지어 그 500만도 한도액에 걸려서 500만인 거라 1,000만은 무조건 넘어갈걸? 두고 봐라. 아마 마린스 모그룹에서 최수원한테 그 차액만큼 CF 같은 걸로 돈 엄청 챙겨줄거임.
─안경에이스: 개소리 ㄴㄴ. 우리 수원이는 이제 마린스에서 20년 동안 왕조 세워주고 영결임. 메이저는 무슨.
─잠실먹부림: 꼴리건 양심 보소. 포시도 못 나가는 놈들이 신인 하나 왔다고 왕조는 무슨. 걍 7년 졸라 뺑이 치다가 메이저 가서 우승반지 끼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
인터넷 여론은 그야말로 폭발이었다.
물론 20억이라는 이야기가 꾸준히 흘러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비현실적인 금액이었던 터라 대부분 사람이 ‘설마?’하는 마음으로 바라봤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KBO에서 20억은 어지간한 중하위급 FA선수의 총액보다 더 큰 금액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 이들은 그 20억조차도 매우 싼 가격이며 심지어 마린스가 작정하고 장사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몇 배나 남겨 먹을 수 있는 상황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20억이라는 거대한 숫자는 그런 이야기를 휩쓸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의 시선이 20억이라는 숫자에만 쏠리는 것은 수원에게도 크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계약서에 그런 문구들을 넣으셨다고요?”
“네, 덕분에 조금 길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굳이 KBO에 남는 이유인데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이야기했던 것처럼 1회 우승, 혹은 2회 MVP.
구단이 최수원의 포스팅에 전력으로 협조하겠노라 명시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태근 변호사는 이번에 최수원의 대리인으로 협상에 임하면서 평소 자신의 선수인 권호영의 대리를 할 때 을의 입장에 섰던 것을 분풀이라도 하듯 정말 상세하고 많은 부분에서 구단의 양보를 받아냈다.
특히 등판에 관한 부분은 매우 길고 빼곡했는데, 휴식일부터 해서 최대 이닝과 의무적인 기회까지 그야말로 빅리그에서도 보기 드문 조항들이 가득했다.
물론 수원은 이 모든 조항들이 진짜로 완벽하게 지켜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야구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강요받았을 때, 그것을 회피할 근거를 만들어 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수원은 안경 에이스가 한쪽 팔을 박살 내야지만 우승을 할 수 있다는 마린스의 전통을 지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2025년.
어느 팀들은 포스트시즌이 한창인 10월 초.
마린스의 홈구장에서 신인 선수들의 입단식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