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20억(1)
뉴욕의 한 사무실.
민머리의 사내가 자신의 태블릿 PC를 바라봤다.
-딱!!
다시 봐도 참으로 아름다운 폼이었다.
“참 아쉽습니다. 딱 1년만 늦게 나왔더라도 2,000만 달러를 아낄 수 있었는데 이걸 이렇게 놓쳐버리다니요.”
경영팀의 팀장인 조쉬 해럴드의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 사실 이 정도면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고 말이야. 그보다는 앞으로가 문제지. 앞으로 우리가 저 친구를 어떻게 데리고 올 것인가 하는 부분 말이야.”
“금액적으로는 아무래도 사치세 리셋은 불가능한만큼 100만 달러의 손해를 볼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저만한 선수가 고작 500만 달러냐 600만 달러냐 하는 걸로 팀을 정할 리는 만무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저희 양키스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팀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뉴욕 양키스니까요.”
뉴욕 양키스니까요.
실로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말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역시 그것이 양키스이기 때문일 것이다.
야구 역사, 아니 전세계 스포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제국. 오직 양키스만이 그 칭호에 합당하리라.
“그래, 우리는 양키스지.”
그러한 제국의 재상.
브라이언 캐시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
“뭐야, 마지막까지 나한테도 비밀인 척 하더니. 결국 형 따라 오는 거였어?”
“제가 따라 가려고 가는 게 아니라, 그냥 형네 팀이 지독하게 야구 못 해서 어쩔 수 없이 가는 겁니다.”
“그게 그거지. 나라고 집 떠나와서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에서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있겠냐? 아무튼 말하는 걸 보니까 그래도 확실히 오긴 오나 보네. 언론에는 뭐 온다 안 온다. 말 많던데.”
“뭐, 조건만 다 맞으면요. 이번에 포스팅 제도도 개선됐겠다 굳이 마이너에서 뛰다 빅리그 올라갈 이유는 없죠. KBO에서 잠깐 뛰고 빅리그 올라가도 되는 거니까요.”
“하여간 패기 하나는 끝내 준다니까.”
스마트폰 액정 너머 하민이 형이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확실히 요즘 좀 힘들긴 힘든 모양이다. 이전이었으면 자기도, 아니 자기가 먼저 미국 가겠다고 했을 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형 몸은 좀 괜찮아요? 요즘 구속 많이 떨어진 것 같던데. 뭐 문제 있는 건 아니에요?”
“글쎄, 얼마 전에 병원 가서 검사했는데 뭐 특별한 문제도 없다더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렇겠지 뭐. 고등학교 때는 이렇게 연달아 경기 뛰어본 적이 없잖아.”
“하긴 형이 생각보다 좀 많이 나오긴 했죠.”
“야, 말도 마라. 차라리 등판 하는 날은 괜찮아. 더 힘 빠지는 건 불펜에서 한 20개 던졌는데 등판 없이 넘어가는 날이라니까? 거기다가 프로는 진짜 다르긴 다르더라. 솔직히 학교 다닐 때는 몰랐거든. 그냥 경하고 애들 상대할 때도 방심 안 하고 빡 집중해서 던지면 좀 더 피곤한 정도? 근데 프로는 타자들이 죄다 그 수준 이상이란 말이야. 근데 그게 또 매일매일 그래요. 와 뭔가 컨디션 돌아올 틈도 없이 쭉쭉 피곤해지는데. 그러다가 정신 차리면 한 방 쾅!! 맞고 그런다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훨씬 잘 하고 있더만요. 지금 평자책 3.16인가? 맞죠?”
잠깐의 어색한 침묵.
“아니, 3.63 어제 경기 좀 조졌어.”
“그러면 한동안 인터넷 끊으셔야겠네요.”
“안 그래도 선배들도 그러라고 하시더라. 괜히 그거 보면 마음만 더 심란해진다고.”
“그래도 아직 구장에서 야유는 안 나오죠?”
“야, 그래도 내가 팀에서 세 번째로 잘 던지는 불펜인데 신인이 이 정도 던지는데 야유가 나오겠냐?”
“아니, 뭔가 마린스라면 한 경기 조졌으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
“부산도 이제는 안 그래. 응원 문화가 얼마나 성숙해졌는데.”
“며칠 전에 마린스 선수 그 누구더라? 하여간 외제차를 누가 쫙 긁고 갔다고 인증샷 올라왔던 것 같은데요?”
“아니, 그건······. 뭐 어디나 좀 정신이 아픈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
사실 악플은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이라면 그게 얼마나 매섭게 다가오는 지 잘 모른다. 뭐, 가끔 유명해지는 만큼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는 소리를 하는 놈들도 있는데 글쎄다. 뭐, 맞는 말이기는 하다만 그건 마치 크고 화려한 집에 살고 있으니 강도의 표적이 되는 것도 감내해야 하는 일 아니냐에 가깝게 들린다.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지만 강도 당한 사람으로서는 굳이 그런 말을 내뱉는 놈을 보면 화가 날 수밖에 없는 말이랄까?
아무튼 악플이라는 건 생각보다 극복하는 게 쉽지 않다. 괜히 그거 보면 싱숭생숭 해져서 경기력 떨어지고 그러는 애들도 드물지 않고. 특히 경기장에서 욕 먹는 거 아직 덜 익숙한 나이면 더더욱 그렇다. 괜히 홈 경기에서 환호성 받을 때 좀 더 잘던지고, 원정에서 야유 들으면 공이 흔들리고 그러는 게 아니다.
“아무튼 협상 잘 끝내고 조만간 팀에서 보자고.”
“네, 형도 몸 관리 잘해서 남은 시즌 잘 마무리하세요. 내년엔 선발 자리 하나 차지해야죠.”
“그래. 한 번 힘 내봐야지.”
***
쪼유가 없는 학교는 조금 썰렁한 느낌이었다.
아, 쪼유가 왜 없냐고? 이 녀석 U-18대표로 선정돼서 지금 일본에 갔다. U-18대회의 경우 야구 월드컵과 아시아 야구 선수권이 격년으로 열리는데 작년이 세계대회였으니 당연히 올해 열린 대회는 아시아 야구 선수권이다.
아, 나의 경우는 선발 멤버에서 아예 제외됐다. 뭐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 애초에 U-18멤버의 경우 해외 진출 이야기가 나오는 선수는 좀 배제하는 전통이 있는데 올해 중반까지 꾸준히 미국 쪽이랑 접촉이 있었던 만큼 나도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딱히 나쁜 일도 아니었다. 솔직히 아시안 선수권이라고 해봐야 결국 일본, 중국, 대만, 호주, 파키스탄, 홍콩 정도밖에 참가를 하지 않는다. 요즘 인도 쪽을 요리조리 찔러보고 있다고는 하는데 글쎄······. 거긴 크리켓이 워낙에 탄탄해서 MLB 사무국이랑 뭔가 대타협을 하지 않는 이상 무리가 아닐까?
아무튼 나가봤자 시간만 낭비할 뿐, 딱히 얻을 것도 없는 대회다. 기본적으로 언론의 집중도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물론 쪼유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래도 연령별 대표 아닌가.
어쨌거나 그런 관계로 현재 학교에는 나의 공을 제대로 받아줄 포수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이미 드래프트 결과까지 다 나온 마당에 이제 와서 대회에 출전하는 것도 좀 웃긴 일이었고. 덕분에 나는 충실한 훈련의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다만 여기서 작은 문제는 그 충실한 훈련을 대체 뭐를 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7개월 정도 꾸준히 공을 던지면서 폼이 조금씩 변했는데, 이게 좋은 변화인지 아니면 다시 이전으로 수정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미국으로 가서 다시 NBM 센터에서 피칭을 또 한번 가다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섣불리 미국으로 가기도 어렵다.
차라리 타격이면 이것저것 해본 것들이 있으니 자체적으로 내 동작을 영상으로 찍어 살펴가면서 수정을 해보겠는데 피칭은 또 그게 아니라 상당히 난감하다. 물론 팀에도 투수 코치님이 있고, 여기저기 프로 코치에게 레슨을 받을 기회도 있긴 했지만 뭐랄까? 워싱턴 형제들처럼 전적으로 믿기에는 좀 힘들달까?
아무튼 그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에이전시 쪽에서는 나의 협상이 거의 근접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쫑알쫑알 연락이 오는 박은진의 경우 데뷔가 거의 다가왔는데 덕분에 수능 공부를 잘못해서 스트레스라나 뭐라나. 경험적으로 봤을 때, 여자애들에게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보다 그냥 힘내라고 이야기해 주는 게 더 좋은 반응이었기에 그냥 힘내라고 이야기해줬더니 제법 좋아하는 눈치이기는 했다.
그리고 진우 선배.
진우 선배에게 모처럼 연락이 왔다.
“수원아, 너 혹시 주말에 시간 괜찮냐?”
“네? 주말요? 주말이면 토요일에 애들 경기 가서 벤치 좀 데워주는 거 말고는 특별한 일정은 없는데 왜요?”
“아니, 일요일 경기에 병영이가 또 선발로 나온다고 그래서. 대학리그는 전반기는 권역이고 하반기는 추첨이잖아. 그래서 서울 쪽 원정 나오는데 혹시 너 시간 되면 같이 보러 가자고 하려고 그랬지.”
“굳이 일요일에 병영 선배 경기를 보러 가자고요? 선배 그러지 말고 차라리 강화도에 규혁 선배 보러 가는 건 어때요? 요새 좀 괜찮게 치고 있다고 그러던데.”
“아니, 사실은······. 병영이가 자기 경기에 너 좀 데리고 와줬으면 하는 눈치라서.”
“병영 선배가요?”
“그래, 수원이 너도 알잖아. 걔가 너 엄청 신경 쓰는 거. 게다가 병영이도 요즘 공 제법 잘 던져서 너도 볼만할 거야. 경기장도 바로 근처라서 지하철로 한 25분만 가면 돼. 내가 저녁도 맛있는 거 살테니까 같이 보러가자. 어?”
솔직히 황금 같은 일요일을 굳이 하루 낭비해가면서까지 멍게의 경기 따위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특별한 약속도 없는 상황에서 진우 선배가 이렇게까지 이야기 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좀 그랬다.
“알겠어요. 선배. 뭐, 한 번 보러 가죠.”
***
“이야, 수원이 너 못 본 사이에 키가 더 큰 거 같은데?”
“에이, 아니에요. 고작 석 달만인데요. 그보다 선배는 좀······.”
“하하, 내가 좀 쪘지? 어휴, 운동할 시간은 없고, 공부하면서 주전부리는 계속 입에 달고 살고. 특히 요즘은 달달한 캔커피를 워낙에 많이 마셨더니 이게 주체가 안 되더라고. 근데 또 이게 들어가야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고. 하여간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고. 요즘 내 머리가 고생이 많다.”
빡빡머리에 조금 앙상한 몸. 그리고 항상 그늘이 진 것 같았던 진우 선배는 이제 없었다. 제법 통통한 몸매에 밝은 얼굴. 누가 봐도 나이에 어울리는 대학 새내기다운 발랄함이 느껴졌다.
“장담하는데 너도 병영이 공 던지는 거 보면 깜짝 놀랄거야. 동호대가 괜히 명문대가 아니더라고. 진짜 많이 좋아졌더라.”
“그래요?”
솔직히 그리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대학 리그는 딱히 고교리그보다 수준이 높다고 보기 힘들다. 하물며 멍게의 성적이 괜찮아진 것은 최근. 즉, 얼리 드래프트가 끝난 이후다. 그나마 있던 앙꼬들마저 싹 빠져나가고 쭉정이만 남은 리그에서 그것도 고작 지역별 예선에서 조금 잘 던진다고 내가 깜짝 놀랄 것 같지는 않았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멍게의 손을 떠난 공이 높게 솟았다가 뚝 하고 떨어졌다.
벌써 네 개째 삼진이었다.
물론 오늘 멍게가 상대하는 타자들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기껏해야 고교야구 선수의 평균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말 놀라웠다.
만약 1년 전에 멍게가 저런 공을 던질 수 있었다면 진우 선배는 나에게 울면서 우승을 부탁할 일이 없지 않았을까?
“거봐. 내가 깜짝 놀랄 거라고 그랬지?”
물론 그렇다고 내가 깜짝 놀랄 만큼 커브를 잘 던지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분명 프로 레벨로 간다면 절대 결정구로 써먹을만큼 대단한 위력은 아니었다. 당장 내가 타석에 선다면 커브를 노리고 방망이를 휘둘러 경기장 바깥까지 날려 보내줄 자신이 있었다.
정말로 놀라운 점은 공의 방향성이었다.
원래 중앙고에 있던 시절에 멍게가 던지던 커브는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커브였다. 하지만 고작 팔 개월 남짓. 지금 멍게의 커브는 조금 달랐다. 타석에서 보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발사각 자체가 극도로 억제됐다.
한국에서는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든 제대로 된 미국식 커브였다.
“선배, 병영 선배 커브 저거 동호대에 투수 코치님이 장착시켜주신 거죠?”
“어, 요즘도 계속 붙어서 지도해주신다고 하더라. 나도 한 번 인사했는데 진짜 좋은 분이더라고. 병영이가 커브 던지는 감각이 좀 있다고 그러시네.”
“그래요?”
입단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기간.
작은 목표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
박광식은 고교 시절 제법 잘 나가던 투수였다.
그런 그의 커리어가 꼬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대회에서 당시 우승후보로 꼽히던 학교를 상대로 노히트를 기록하며 미국 스카우트의 눈에 들었던 순간이었다.
계약금 100만 달러.
당시 돈으로 무려 12억.
당시 KBO 역대 최고액이 10억이던 상황에서 그보다 2억이나 많은 금액은 그를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는 KBO에 남는 대신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지금.
“이야, 반갑다. 네가 최수원이구나. 크, 역시 육백만 불의 사나이인가? 확실히 몸이 좋긴 좋네.”
메이저 무대는커녕 KBO조차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코치로써 그와 비슷한, 하지만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거액이 논의되는 까마득한 후배에게 악수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