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드래프트(2)
후반기 주말 리그가 끝났다.
사실 전반기 주말 리그의 우승팀이 전, 후반기 왕중왕전에 모두 진출하고 후반기 주말 리그는 아무런 특혜가 없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후반기 주말 리그는 단순히 대학에 진학할 선수들 기록 쌓기용에 가깝다.
그렇기에 후반기 주말 리그 우승을 놓친 것은 그렇게 크게 아깝지 않았다. 진짜 아까웠던 것은 후반기 왕중왕전, 4강전에서 패배했던 것이었다. 타석에서는 한 번도 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했고, 피칭으로는 아쉽게 2실점을 내줬다.
뭐, 피칭이 항상 좋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지만 여러모로 아쉬운 결과였다.
하지만 그 아쉬움도 잠시.
KBO의 드래프트가 훌쩍 다가왔다.
“신청서 냈냐?”
“나야 당연히 냈지. 넌 어쩔 건데? 요즘 뉴스 보니까 미국에서 뭐 50억이니 60억이니 이런 이야기도 나오는 것 같던데. 아직도 고민 중이냐?”
“글쎄.”
“야, 학교로 나오는 지원금 때문에 고민하는 거면 그냥 가버려. 계약금 50억 받고 그걸로 적당히 후원금이나 내면 되지. 애당초 우리가 언제부터 프로 구단한테 지원 빵빵하게 받는 학교였다고 그런 걸 고민하냐. 그냥 메이저 가서 다 터트려버려.”
“그러다가 메이저 터트리는 대신에 내가 터지면 어쩌려고.”
“글쎄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터지는 그림은 잘 안 그려지긴 한다만. 뭐 만약에 그렇게 되면 한국 복귀하면 그만이지. 그러면 네가 내 후배가 되는 셈인가?”
쪼유의 쉰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사실 드래프트 신청서를 낸다고 해도 꼭 KBO에 남으라는 법은 없었지만 그래도 여론이라는 게 있다. 단순히 시장의 크기나 돈 문제를 떠나서 솔직히 한국 팬들에게 딱히 밉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미 경험해봤기에 알 수 있다. 생각보다 팬덤이라는 건 무섭다.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 내 기사를 클릭해보게 되는데 거기 달린 베스트 댓글이 악플이냐 선플이냐로 제법 영향을 받는다. 빅리그에서 뛰던 시절 좀 부진했던 경기 이후에는 주로 미국 언론 말고 한국 쪽 사이트들을 보면서 좀 위로를 받기도 했었다.
이미 마음은 9할 이상 KBO에서 일단 뛰는 걸로 굳힌 상황이었지만 물밑에서 이뤄지고 있는 세부적인 협상이 틀어질 경우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헛소리 하지 말고 내 걱정 그만하고 네 걱정이나 해라. 너 그러고 보니 나 미국 보내려고 하는 게 네 드래프트 순번 1번이라도 높이려는 개수작 아니냐?”
“······. 나, 나를 대체 뭘로 보고!!”
***
“MVP 두 번이라 그 말씀이시군요.”
“네, 아무래도 마린스 우승과 동일한 조건이라면 그래도 그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냐고······.”
마린스 우승과 MVP 2회.
솔직히 백투백 MVP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어느 게 더 어려운지는 명확했다. KBO에 백투백 MVP는 다섯 명이나 존재하지만 마린스는 고작 두 번밖에 우승하지 못했으니까.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보긴 하겠습니다만 태도가 상당히 완강합니다.”
“하긴 드래프트 1라운드에 20억이나 내주고 MVP까지 딴 선수가 덜커덕 1년 만에 포스팅으로 미국에 간다고 하면 단장님 입장에서는 곤란하시긴 하겠네요. 그보다 투타겸업에 관한 부분은 어떤가요?”
“아, 그 부분은 완전히 합의가 끝났습니다. 에인절스 초창기 시절 오타니 쇼헤이 선수에 준하는 관리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놨습니다.”
“그건 좋군요.”
운이 좋으면 1년. 그게 아니더라도 2년.
아니, 어쩌면 운이 정말 없다거나 부상등이 생긴다면 몇 년이 될지도 모른다.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마이너에서 뛰고 넘어가는 것이 더 현명할지, 아니면 그냥 KBO에서 피칭을 가다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이 현명할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도미니카나 베네수엘라 쿠바 멕시코 같이 남미에서 온 선수들이 한국과 일본 선수들을 상당히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 그리고 그 경제 규모에 맞는 리그를 갖추고 있다는 점으로 마이너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는 대신 자국에서 스타로 활약하다 빅리그로 바로 올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혜택이었으니까. 뭐, 사실 메이저 정도 뛰는 애들이 더 부러워했던 점은 실패하더라도 비빌 언덕이 남아있다는 점이 더 크긴 했지만.
“알겠습니다. 그 정도 조건이면 나쁘진 않네요. 다만 메이저 진출 시에 구단의 전폭적인 협조. 그러니까 여론과 언론 등에 관해서도 확실하게 케어를 해준다는 조건 꼭 강조해주세요.”
***
“됐습니다!! 최수원 선수가 드래프트 신청서 냈다고 합니다.”
“후······,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고. 이거 잘못되면 드래프트 전체 1픽을 그대로 날려버리는 거야. 그리고 외부로 세부 내용 새어나가지 않게 거듭 조심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중간중간 회의감이 드는 순간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솔직히 그래봐야 고등학생 아닌가. 과연 20억이라는 가치가, 과연 이러한 규칙 개정과 외부로 발설할 수 없는 조건들을 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위력이 전상익 단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3타석 연속 볼넷.
밀어내기 고의사구.
6타수 5안타 3홈런.
그야말로 고교야구에 강림한 배리 본즈 그 자체였다. 당장 프로 최정상급 선수가 고교야구에서 뛴다고 해도 과연 저만한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타격만큼 압도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이번 시즌 투수 최수원이 보여준 퍼포먼스만 하더라도 작년 백하민에 필적하는 퍼포먼스였다. 심지어 타자로서의 최수원이 뭔가 보여줄 기회 자체가 없었기에 성장하는지, 아닌지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면 투수로서의 최수원은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에서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자자, 그러면 일단 1라운드는 최수원이고 2라운드부터 전략을 좀 짜보자고.”
“그런데 어차피 최수원 선수 우리랑 이렇게 이야기가 된 거면 전체 1픽 조금 아깝지 않습니까? 다른 팀에서 우리 팀만 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을 리 만무하고, 미국 갈지도 모르는 위협을 무릅쓰고 다른 팀에서 굳이 1픽으로 뽑을까요?”
파마 머리의 뚱뚱한 사내. 김 과장이 이제는 신입이라고 할 수도 없는 최성철의 헛소리에 혀를 찼다.
“쯧. 멍청한 소리 하기는. 성철아.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말할 때는 생각을 좀 하고 말하라고. 지금 최수원 메이저에서 50억이니 60억이니 하는 소리 나오는 판국에 포스팅 제도까지 개편이 됐어. 막말로 브레이브스 같은 팀에서 20억 주고 1년 쓰고 바로 미국 보내준다고 해봐. 브레이브스가 손해겠냐? 무조건 이득이지. 이건 솔직히 포스팅피 생각하면 이건 무조건 남는 장사야. 피닉스도 아예 우리가 최수원 안뽑는 플랜 자체가 없을걸? 근데 우리가 최수원 안 뽑는다? 걔들도 플랜이고 뭐고 무조건 최수원 뽑고 볼 거라고.”
“하지만 그러다가 그냥 휙 미국으로 가버릴지도 모르는데요?”
“그래, 그건 그렇지. 그런데 우리도 이러다가 그냥 휙 미국으로 가버릴지도 모르는 최수원 1픽으로 뽑는다고 하고 있잖니.”
“아······.”
***
컴퓨터 모니터 속으로 남산에 위치한 한 특급호텔의 그랜드볼룸이 펼쳐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매년 꾸준하게 KBO 드래프트 행사가 열렸던 이곳에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원들이 들어왔다.
“후우······.”
열 개 팀 단장들과 스카우트팀들이 각기 하나씩 차지한 원탁. 모든 이들의 얼굴에 약간의 긴장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긴장한 이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오늘 드래프트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드래프트를 신청한 선수들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부터 전문대생, 그리고 얼리 드래프트를 신청한 대학교 2학년생들과 일말의 희망을 놓치못한 4학년 졸업생까지.
누군가는 정장을, 또 누군가는 팀 유니폼을 입은 채 그랜드 볼룸의 한 구석 주르륵 늘어놓은 의자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는 그들의 시선이 참으로 불안했다.
물론 여기에 초청장을 받고 온 선수라면 드래프트에 거의 무조건 뽑히는 선수라고 봐야했다. 하지만 1라운드인가 2라운드인가 혹은 3라운드인가. 그리고 그 라운드 내에서도 몇 번인가에 따라서 계약금의 단위가 바뀐다. 야구 선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직장인들 이상의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프로 구단에 입단한다고 해도 받을 수 있는 연봉은 3천만 원에 불과하다. 계약금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불안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짧게는 7, 8년을. 길게는 15년 이상을. 오직 이 순간을 위하여 그들의 뒷바라지를 해온 부모들이야 말로 이 순간 가장 불안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결코 그들이 투자한 시간과 돈 때문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식들이 얼마나 여기에 최선을 다해왔는지. 그 꿈이 부디 여기서 좌절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역시 서울 팀이 좋겠지?”
“쪼유, 네가 지금 팀 가릴 처지냐? 그냥 1번이라도 더 빠르게 불리길 바래야지.”
“아무리 그래도 한 3라운드 이내에는 뽑히지 않을까? 나 전반기 왕중왕전 타격왕이잖아.”
“타격왕은 타격왕인데 타출갭 거의 없고 장타율은 더 처참했잖아. 요즘 누가 타율을 보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랜드볼룸 구석에 깔린 의자의 첫 번째 줄.
유니폼을 입은 두 선수가 귓속말을 주고받는 장면이 TV 화면에 잡혔다.
“아, 저기 중앙고의 최수원 선수와 조유진 선수가 보입니다. 중앙고라면 올해 고교야구 최강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네, 최수원 선수야 뭐. 이제 부연 설명을 하면 입만 아픈 선수죠. 메이저리그에서도 국제유망주 한도액 꽉꽉 채워가면서까지 데리고 가고 싶어하는 초거대 유망주. 오늘 전체 1번이 확실한 선수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조유진 선수도 상당히 훌륭한 선수인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저 선수가 1라운드에 뽑힌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와우, 조유진 선수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네, 타격에서는 상당히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수비로는 꾸준히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포수였거든요. 보면 뒤로 흘린 공이 거의 없어요. 특히 원바운드 되는 공의 처리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게다가 도루 저지도 훌륭하고요. 하지만 타격에 상당히 큰 문제가 있었는데 이번 시즌 타격폼을 바꾸면서 전반기 왕중왕전에서 타격왕을 차지했단 말이죠. 결국 프로에서 선수를 뽑을 때 발전 가능성을 안 볼 수가 없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조유진 선수. 1라운드가 아니더라도 상당히 높은 순번을 받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카메라가 다시 원탁 쪽으로 넘어갔다.
원탁에 놓인 노트북과 태블릿들. 그리고 충혈된 눈의 프런트 직원들까지.
그 가운데 가장 퀭하게 보이는 것은 역시 올해 또다시 전체 1번을 가져온 마린스의 전상익 단장이었다.
그래도 전체 1번인데 첫 라운드에 이렇게까지 긴장이 되는 일은 드물었다. 뽑은 선수가 진짜 성공할지, 실패할지에 대한 걱정은 있겠지만 어쨌거나 정해진 전략이 틀어질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내가 부른 선수가 성공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넘어서 뭔가 문제가 생겨서 계약 자체가 불발되고 전체 1번을 그대로 날려버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할 수 있는 시간도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다가온 카메라. 그가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일어나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사와 꼴찌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긴 인사와 변명의 끝. 마침내 오늘의 본론이 흘러나왔다.
“그러면 지명하겠습니다. 서울 중앙고 최. 수. 원.”
이변 없는 선택.
안병영이 컴퓨터를 껐다. 이제 다시 훈련을 하러 나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