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드래프트(1)
“크흠······. 전 단장. 신인 하나 하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사장님. 그냥 신인이 아닙니다. 한국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재입니다.”
“아니, 그 말은 재작년에 최민혁이한테 10억 5천 줄 때도 했던 말이잖나. 전무후무라고 하더니 그 녀석 지금 뭐 하고 있나.”
3년 전 마린스는 전체 2번이었던 최민혁에게 10억 5천만원을 내줬었다. 당시에도 오버페이라는 말은 많았다. 심지어 전체 1번이었던 피닉스의 서규탁이 10억으로 종전 신기록과 같은 금액을 받는 상황에서 그보다 5천이나 더 내줬던 계약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었다. 메이저에서 계약금으로 250만 달러를 부르는 애를 주저앉히려면 그래도 그 1/3은 내줘야 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재활은 잘 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올 하반기 정도면 다시 복귀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거 토미존 서저리인지 뭔지 다른 팀은 막 1년도 안되서 복귀하고 그런다더니 걔는 왜그렇게 오래 걸린답니까?”
“개개인마다 편차가 좀 있는 편이고, 게다가 1년도 안 돼서 그렇게 복귀하면 다시 훅 갈 확률이 높습니다. 저희가 민혁이 1, 2년 쓸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무튼 그렇게 10억이 넘는 돈을 써봤자 재활한다고 뭐 아무것도 못하는 일도 부지기수인데 신인한테 20억이라니. 요즘 우리 팀 성적 생각하면 연봉 삭감 안하는 것만으로도 회장님이 얼마나 구단을 사랑하는지 감사해야 할 판국이에요.”
“사장님. 이번에 드래프트로 데리고 온 백하민이가 고등학교 때 매일 홈런 두들겨 맞은 게 최수원입니다. 게다가 투수로 써먹어도 거의 백하민급으로 써먹을만하고요.”
“투수로 써먹어도 거의 백하민 수준이라고? 내가 얼마전에 봤던 보고서에서는 투수로는 아직 2군에서 좀 달궈야 할 것 같다고 읽었던 것 같은데?”
빌어먹을.
역시나 보고서 올린 것들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지난번 사장은 어디서 어줍잖게 세이버매트릭스 몇 권 읽고 와서 이것저것 간섭하려던 것이 힘들었는데, 이번 박충식 사장은 그와는 반대로 아예 야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또 환장할 노릇이다. 그래도 확실히 경영 쪽으로는 잔뼈가 굵은 인물은 인물인지라 마케팅과 경영에서는 확실한 성과를 내고있는 만큼 윗선에서의 신뢰는 제법 크다.
“지난겨울이 지나면서 확 달라졌습니다. 여기 뉴월드 빅마트배부터 전반기 왕중왕전까지 피칭 성적입니다.”
“흐음······. 내가 야구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건 작년에 백하민이만큼 대단한 것 같은데?”
“맞습니다. 고교야구가 워낙에 인재풀이 들쭉날쭉해서 작년과 올해를 1:1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보통 성적은 아니죠.”
“하지만 그래봐야 백하민이급 투수 성적에 타자는 그 누구냐. 하여간 타자 역대 1위 계약금을 합쳐도 15억이잖아. 20억은 너무 비싼데······.”
“지금 빅리그에서도 올 해 국제유망주 풀을 전부 다 최수원 하나한테 쏫아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게 얼마지?”
“가장 높은 팀은 625만 달러. 그리고 좀 낮은 팀도 최소 500만 달러입니다. 그 이하로 묶인 팀은 아예 엄두도 못 낸다고 하고 있고요.”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국 선수가 KBO 거쳐 가는 게 로우리스크 하이리턴인 건 이제 공공연한 사실인데 그렇게까지 프리미엄을 쳐줄 필요가 있나? 솔직히 최민혁이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있었으면 수술부터 재활까지 우리 같은 케어도 못 받았을 거 아니야. 게다가 그냥 20억이 아니라. 이 조건은 대체 뭔가? 20억이나 투자하는데 운 없으면 3년 만에 다시 미국에 보내줘야 하는 조건이잖아. 아니, 심지어 이 조건. 이번에 그 건이 해결돼야만 넣을 수 있는 조건 아닌가? 설마 그거 해결 안 되면 방출로 보내줄 수 있나?”
“그건 아닙니다. 현행 규약에 따르면 방출이고 포스팅이고 일단 7년은 지나야 무조건 진출이 가능하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이 어린놈 하나 때문에 협회에도 싸바싸바를 해야 하고, 거기다가 듣도 보도 못한 역대 최고액을 안겨줘야 한다고?”
“그 정도는 해줘야 한국에 남을 겁니다. 솔직히 그것도 세부적인 협상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요. 하지만 조건 자체가 만약 클리어할 경우 충분히 20억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투자 아니겠습니까.”
박충식 사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끄응······. 난 모르겠군. 어쨌거나 모기업에서 구단에 쓸 수 있는 돈은 한정이 되어 있으니 만약 이렇게 되면 FA나 선수단 연봉에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는 거 명심해야 할 거야.”
“하하, 구단의 재정이야 사장님께서 부임하신 이후로 나날이 좋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하반기에 민혁이도 돌아오고 내년에 수원이도 들어오면 정말 엄청날 겁니다.”
“쯧, 말은 쉽지. 아무튼 모그룹에는 내가 잘 말해보지. 그러니까 전단장은 지금처럼 성적만 좀 똑바로 내줘. 내가 말했잖아. 뭐 많은 거 안 바란다고. 수십 년간 쌓인 걸 한순간에 바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중간은 가야지. 10개 팀 가운데 5개팀이 나가는 걸 벌써 7년이나 못 나가고 있는 건 심하지. 안 그런가?”
“올해는 다를 겁니다.”
“꼭 그래야만 할 거야.”
***
고작 석 달.
야구부의 분위기는 매우 크게 바뀌었다. 우선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역시 시설이다. 단순히 우리가 성적이 잘 나와서 학교에서 지원금이 많이 나온 탓이 아니다.
뉴월드 빅마트배는 고교야구대회에 상금이 걸린 최초의 대회이며 지금까지도 유일한 대회이기도 했다. 그 금액도 대기업답게 시원하게 무려 7천 만원. 그뿐만이 아니었다.
학교 정문 앞에 내걸린 현수막이며 최근 쏟아지고 있다는 후원금까지.
역시 스포츠에서 가장 올바른 정답은 언제나 ‘승리’다.
“야 너 그 소식 들었냐?”
“무슨 소식?”
“병영 선배.”
“동호대 입학 했다는 것 말고는 뭐 특별히 들은 거 없는데. 왜? 무슨 소식 있어?”
“이번에 대회에 선발로 출장해서 5.1이닝동안 2실점 했다고 하더라.”
“그래? 1학년인데 벌써 선발로 출장을 했단 말이야?”
“어, 솔직히 대학 야구 수준 생각하면 병영 선배 정도 되면 선발로 뛸 만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동호대면 꽤 빡셀 텐데 거기 작년에도 얼리로 프로에 4명인가 보내지 않았어?”
“그 덕분에 투수 TO가 좀 난 모양이더라고. 아무래도 거기도 프로 갈만한 싹수 보이는 선수 위주로 좀 밀어주니까.”
사실 고교리그와 대학리그 가운데 더 수준 높은 곳이 어딘지를 묻는다면 답하기는 좀 애매하다. 아무래도 십 대와 이십 대 사이에는 육체적으로 명백한 차이가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가장 재능있는 18세들이 죄다 프로로 빠지고 남은 선수들만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딱히 대학리그가 고교리그보다 수준이 높다고는 단언하기 힘들다.
아무튼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1학년인 멍게가 선발로 출장해서 5.1이닝동안 2실점 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기는 했다. 멍게는 고교리그에서도 5.1이닝 2실점 같은 건 어지간하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날 컨디션 좀 좋았나 보네. 5.1이닝 2실점이라니.”
“진우 선배 말로는 커브를 새로 장착했는데 그게 대박이라더라.”
“진우 선배? 그 선배 아직도 멍게랑 연락한대?”
“어, 경기도 직접 보러 갔다던데?”
“대단하네. 동호대면 D권역이라서 가까워도 대구에서 경기했을 거아니야.”
“부산에서 했다더라.”
“와, 그러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간 거야? 진짜 천사네. 천사야.”
내가 해줬던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3번으로 찍으라는 조언이 효과가 있었던 탓일까?
진우 선배는 수능을 매우 잘 쳤다. 지금까지 봤던 모든 모의고사보다 수능 성적이 훨씬 더 잘 나왔다고 들었다. 이름만 대면 알아줄 만한 명문대학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하철 타고 다니기에는 충분한 학교에 입학을 했다.
우리가 뉴월드 빅마트배 대회에서 우승했던 다음 날과 황금사자기에 우승했던 다음 날에 햄버거와 피자를 잔뜩 사 들고 찾아왔었다. 확실히 멍게 같은 놈과는 비교되지 않는 참선배다운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고 수원이 넌 진짜 어쩔 생각이냐?”
“나? 내가 뭘 어째?”
“아니, 마린스 갈 건지, 아니면 미국 갈 건지. 지금 내 주변도 장난 아니야. 심지어 엄마도 내 드래프트보다 너 마린스 가는지 미국 가는지를 더 궁금해한다니까? 이번에 발표된 그 KBO 한·미 선수계약협정 개정. 그거 너 노리고 나온 개정이라고 언론에서도 아주 난리잖아.”
“글쎄다, 나야 잘 모르지. 어차피 그런 건 에이전시가 알아서 하는 거니까.”
***
“어이쿠, 전 단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하하, 지나가는 길에 그때 먹었던 그 삼계탕 맛이 생각나서 잠시 들렀습니다.”
“아, 하기야 그 집 삼계탕 맛이 참 좋지요. 어떻게? 두 그릇 주문할까요?”
“안 그래도 제가 오는 길에 여기로 배달 주문 넣고 오는 길입니다. 이제 곧 도착 할 겁니다.”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삼계탕 그릇을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고교야구의 템퍼링은 엄격하게 금지된 조항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규칙이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인 면이 있지 않은가.
다행스럽게도 김태근 변호사는 최수원의 한국 대리인인 동시에 마린스의 선수인 권호영의 대리인이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요즘 호영이가 2군에서 굉장히 잘 치고 있다더군요. 양감독 말이 조만간 1군에 한 번 올려볼까 고려중이라던데요.”
“어이고, 그렇습니까? 하긴, 요즘 날이 더워서 선수들이 좀 지친 느낌이 있긴 하더군요.”
“하하, 한여름이니 뭐 다 그렇죠.”
“아차차, 그때 하셨던 말씀 있잖습니까. 마린스가 우승하면 뭔들 못하겠냐고요.”
“그렇죠. 사실 모든 팀의 궁극적인 목표 아니겠습니까. 통합우승!!”
“근데 사실 그 우승이라는 게 개인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선수단 25명 중에 한 사람이 좀 잘한다고 우승 할 수 있었으면 본즈가 자이언츠에서 반지 하나 못 낀 건 설명이 안 되는 일이니까요.”
“그거야 자이언츠가 본즈한테 쓰던 돈이 워낙에 커서 다른 선수 수급이 쉽지 않았던 탓이죠. 상황이 좀 다르지 않을까요?”
“상황이 다를지는 가 봐야 아는 일이고요. 그래서 말인데 조건에 하나 더 추가하시죠.”
“추가요? 뭐를 추가한다는 말씀이신지?”
“MVP 혹은 우승 어떻습니까.”
신인 선수의 MVP. 그리고 마린스의 우승.
전 단장이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둘 중 뭐가 더 어려운 조건인지는 너무 뻔했으니까.
“아니, 고작 MVP를 우승과 같은 선에 두신다니 이거 조금 섭섭합니다.”
92년의 마지막 우승 이후로도 마린스에는 두 명의 리그 MVP가 존재했다. 참고로 그 해 마린스의 성적은 5위, 그리고 4위였다. 리그 MVP가 있다고 우승을 할 수 있다면 마린스가 아니다. 헌데 계약금으로 20억이나 준 선수를 ‘고작’ MVP나 한 번 했다고 대승적으로 미국에 보내준다? 사무실에 퀵으로 다이너마이트가 배달돼도 이상하지 않다.
“하하, 그 부분은 조금 찬찬히 이야기해보도록 하시죠. 어차피 미국 쪽 애들 장이 새로 열리려면 3주나 남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커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7월 3일에 시작되는 국제 유망주 계약 시장이 새로 열리기까지 이제 고작 3주.
“김 변호사님. 우리 이거 서로서로 윈윈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지금 이런 식으로 하시면 제 모가지 짜르는 일 밖에는 안 됩니다.”“허, MVP가 쉬운 일도 아니고. 엄살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아니, KBO에 신인왕 MVP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전 최수원 선수도 충분히 그만한 포텐셜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닙니까?”
“하하, 그런가요? 그렇다면 이건 어떠십니까.”
김태근이 자신의 검지와 중지를 치켜세웠다.
“두 번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