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84화 (84/305)

84화. 통과점(5)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이상하게 공이 잘 들어가는 날.

물론 내 공이 잘 들어가는 날이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고작 고등학생 수준을 상대하는데 굳이 공이 잘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었으니까. 심지어 그것이 전국 레벨이라고 하기에는 살짝 부족한 청암IT인터넷고등학교라면 더더욱.

당연히 오늘 공이 좋은 것은 유준이 쪽이다. 거의 스트라이크 존의 중심을 기준으로 가로로 선을 하나 긋고 위쪽으로는 거의 공이 들어가지 않는 수준이었다.

-딱!!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두들겨 맞는 일이 아예 없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하지만 청암고의 많은 타자가 보여주는 다운스윙으로는 이렇게 완벽하게 낮게 제구된 공을 장타로 연결할만한 힘을 싣기 쉽지 않았다.

결국 단타로 출루에 성공하더라도 내야 땅볼로 병살이 만들어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몇 개지?”

“44개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저 정도 던지고 있는 애를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

박유준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저 녀석 지금 상당히 우쭐하고 있다는 것을.

준결승.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청암고를 박살냈다. 걔들이 썩은 동태 눈깔로 징크스니, 뭐니 중얼거렸지만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우 선배가 그렇게 비장하게 이야기했던 전국대회 우승까지 이제 고작 한 걸음. 생각보다, 아니 생각 이상으로 너무 쉬웠다. 그래서 조금 우스웠다. 생각해보면 월드시리즈 우승도 아니고 심지어 KBO 우승도 아닌 고작 고교야구 전국대회 우승인데 뭘 그리 비장했는지.

하지만 그 비장했던 순간이 부끄럽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순간, 진우 선배가 말했던 전국대회 우승은 난이도와는 상관없이 분명 월드 시리즈 우승에 버금가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고작 열여덟의 어린 소년이 말하는 평생의 소원과 팔십 노인이 말하는 평생의 소원이 같은 무게일 수는 없다. 하지만 열여덟의 평생이라고 어찌 마냥 가벼울 수 있을까.

기숙사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스탠드에 앉아서 멍하니 운동장을 바라봤다.

어쩌면 인생 최초일지도 모르는 전국대회 결승전이라는 단어에 흥분한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옆으로 조유진이 음료수 캔 두 개를 들고 다가와 나에게 하나를 내밀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한 경기 남았네?”

“그러게.”

“솔직히 1학년 때부터 종종 상상은 했거든. 전국대회 결승 나가서 결승타 치는 거. 그렇게 해서 천남고부터 해서 나 안 데리고 갔던 고등학교들 다 땅을 치고 후회하게 하는 거. 근데 그게 이렇게 현실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결승타? 현실? 음······. 뭔가 결승전에 나가는 거 제외하고는 여전히 현실로 다가올 것 같지 않은 상상 같은데?”

“그래, 뭐 그러면 결승타는 네 몫인 걸로 하고 난 선두타자답게 그 결승타에 홈을 밟는 주자 정도로 해두자.”

“글쎄다. 그러려면 넌 지금 내 옆에서 이거 마실 게 아니라 가서 방망이 휘둘러야 하는 거 아니야?”

“나 오늘 경기 내내 공 받았거든? 하여간 이래서 투수 놈들은······. 자기 공 받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고된지를 몰라요.”

“야, 상식적으로 던지는 게 힘들겠냐, 받는 게 힘들겠냐. 프로도 포수는 매일 뛰는데 투수는 닷새에 한 번 뛰는 거 모르냐?”

“아니, 그건······.”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 실없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이왕이면 음료수 대신 맥주라도 한 캔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

결승전 당일.

다른 고교 대회들의 경우 결승전이 열리는 곳은 언제나 목동이다. 하지만 뉴월드 빅마트배는 조금 달랐다. 2021년 뉴월드그룹이 야구구단을 인수하면서 협회장기에서 뉴월드 빅마트배로 이름을 갈아치운 이 대회는 후원자인 뉴월드 그룹의 홈구장인 인천의 빅마트 필드에서 열린다. 덕분에 우리는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유준이를 바라보는 재철이의 표정이 조금 복잡해 보였다. 하지만 굳이 뭐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운동을 하다 보면 종종 보게 되는 표정이었다.

단순히 고교야구에서만이 아니다. 프로에 가서도. 아니, 빅리그에 간다고 해도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널렸다. 심지어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저런 표정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요즘 1, 2학년 애들 사이는 좀 어때?”

“어렵지. 아무래도 이번에 들어온 1학년 애들이 수준이 좀 더 높잖아.”

고교야구는 드래프트 제도가 있는 프로야구와는 다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둘 가능성이 높고, 더 많은 지원이 가능한 학교가 더 좋은 인재를 끌어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의 경우 작년에 들어온 아이들과 올해 들어온 아이들의 수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재작년의 우리가 전국대회 2차전 돌파가 목표인 수준이 그저그런 팀이었다면 작년의 우리는 진지하게 우승을 노렸던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세진이랑 재철이는 좀 괜찮지 않나?”

“세진이는 괜찮은데 재철이는 썩 괜찮지 않은 것 같아. 그제 경기에서 유준이 던지는 거 보고 충격 좀 먹은 것 같더라고.”

“그래? 그 정도야? 어차피 내가 던지는 거 매일 보잖아.”

“그건 경우가 좀 다르지. 솔직히 너한테 라이벌 의식 불태웠던 병영 선배가 좀 이상한 거고, 애들한테 넌 뭔가 좀 규격 외의 느낌이잖아. 반면에 유준이는 후배인데다가 구속도 자기랑 크게 차이 안 나는데 성적이 그렇게 나와버리니까. 내년에 너 졸업해도 에이스 자리는 답 없겠다 싶은? 뭐 그런 느낌 아닐까?”

하긴 선배보다 못 하는 것과 후배보다 못 하는 건 좀 느낌이 다르긴 하다. 특히나 아직 한참 성장기라고 볼 수 있는 이맘때에는 더더욱.

“그렇군. 쪼유 그러면 신경 좀 잘 써줘.”

“어? 투수끼리 문제잖아. 네가 관리할 거 아니었어?”

“네가 주장에 포수잖냐. 게다가 차라리 선배들한테 들이박는 건 하겠는데 재능의 벽을 느껴서 좌절하는 애를 격려하는 건 쫌······. 아무래도 이런 건 공감대 형성이 어렵지. 그런 건 비슷한 걸 경험해본 네가 하는 게 아무래도 낫지 않겠냐?”

“와······. 이 새끼 이거. 엄청 재수 없는데 뭐라 할 말이 없네.”

오늘 결승전 상대는 대일 고등학교.

경기 지역팀 가운데 제법 강호로 분류되는 고등학교로 얼마 전에 U-18대회 끝내고 인스타로 사건 일으켰던 양힘찬이 졸업한 학교이기도 했다. 다만 결승에 오를만한 전력인가를 생각해보면 살짝 고개를 갸웃할 전력이기는 했다.

“자, 그러면 맡겨둔 트로피 가지러 가보자.”

1회 초.

대일고의 마운드에 2학년 투수 강주현이 올라왔다. 그 녀석이 대일고의 에이스인가를 묻는다면 아니다. 녀석은 분명 좋은 투수이기는 했다. 내년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로 프로에 가고 2군에서 1년간 담금질을 거친 뒤 그다음 해에 제법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펼치며 신인왕 2등까지 차지하는 재목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3년 후의 일이다. 지금은 그냥 2학년 투수 가운데 가장 유망한 투수 정도에 불과하다. 녀석이 지금 마운드에 올라온 것은 작년 대회에서 우리가 번번이 슬램덩크 엔딩을 맞이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준결승에서 대일고의 에이스는 폭풍같은 피칭으로 총 105개의 공을 던졌고 그 결과 팀을 결승에 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금은 저렇게 벤치에 앉아 초조한 눈빛으로 경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마치 작년의 나처럼 말이다.

타석에 조유진이 올라갔다.

특유의 요상한 타격폼은 그대로다. 최근 인터넷에 짤방으로 올라갔는데 내가 봤을 땐 조롱이 분명한 그 짤방에도 낄낄거리며 좋아했었다.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나? 내가 경험해본 바로는 악플보다는 무플이 나았는데, 확실히 10년이나 1할대 타율로 프로에 생존했던 포수다운 비범한 멘탈이었다.

마운드의 강주현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전국대회 결승. 자리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는 팀의 에이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을 조유진은 놓치지 않았다.

-딱!!

초구 타격!!

정상적이라면 제대로 힘이 실리기 힘든 폼이지만 원래 폼 자체가 워낙 정상적이지 않았기에 그것보다는 타구에 힘이 실리는 역설.

상하체가 분리되는 속도가 한 박자 늦어진 만큼 힘이 실린 타구가 1, 2루 간을 꿰뚫었다.

조유진이 포수라고 믿기 힘든 속도로 성큼성큼 1루를 향해 달려 나갔다. 굳이 심판의 외침을 들을 필요도 없는 여유로운 타이밍이었다.

“세이프!!”

대일고 투수 강주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빅마트 필드. 2만 3천여 관중석에 모인 약 6천 명의 관중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봤다. 어쩌면 지금이 그의 17년 인생에서 가장 많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이 아닐까?

단언하건데 저런 순간에 평소와 완전히 같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무언가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단지 평소에 몸에 얼마나 자신의 동작을 새겨 넣어놨느냐에 따라서 그 폭에 차이가 생길 뿐이다.

과연 강주현은 저기서 더 좋아질까? 아니면 나빠질까?

-뻐엉!!!

그의 손끝을 떠난 공이 미트를 꿰뚫었다.

144.7km/h

마운드에 선 그의 얼굴이 조금 상기됐다.

조금 전까지 녀석이 던지던 공이 고작 141km/h 내외였음을 생각해보면 분명 지금 이 공은 그가 던진 공 가운데 가장 빠른 공이었을 것이다. 결승전의 기적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유감스럽게도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던진 공은 바깥쪽 코스로 스트라이크 존을 완벽하게 벗어난 공이었으니까.

녀석이 공을 던졌다

그리고 또 던졌다.

볼 세 개.

포수가 마운드 위로 올라갔다.

“······.”

“······.”

글러브와 미트로 얼굴을 가린 두 배터리가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포수가 투수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들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게 효과가 있긴 했던 것일까? 공이 조금은 사람이 봐줄만한 곳으로 빨려 들어왔다.

-뻐엉!!!

물론 그래봤자 아직 스트라이크 콜을 받기에는 부족했지만.

스트레이트 볼넷.

주자가 1루로 걸어 나갔다.

방망이를 챙겨서 대기 타석에 섰다.

대기 타석에 놓인 배트링을 내버려 둔 채 마운드의 투수가 휘두르는 타이밍에 맞춰 방망이를 한 차례 휘둘렀다.

-부웅

배트링을 끼우고 스윙한 뒤 타석에서 그냥 배트를 돌리면 배트 스피드가 더 빨라진 느낌이라는 녀석들도 많았지만, 나의 경우는 그냥 이 상태 그대로 타이밍을 맞춰보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두 번 정도의 스윙.

슬슬 감이 왔다.

그리고

-부웅!!!

“스트라잌!! 아웃!!!”

마운드의 애송이가 상기된 표정으로 웃었다.

당연하다. 평소 던질 때보다 훨씬 힘있게 뻗어나가는 공이 슬슬 존에도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어찌 즐겁지 않을까. 적어도 녀석은 오늘 여기 모인 스카우트들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다.

1사 주자 1, 2루.

내가 타석에 들어갔다.

***

최수원이 타석에 선 순간 경기장의 분위기가 변했다.

마운드에 선 강주현은 명백하게 그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뻔했다.

고의사구.

타석에 선 타자도 당연히 그것이 오리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야, 하나 이쪽으로 최대한 붙여보자.’

‘네?’

하지만 덕아웃에서는 고의사구가 아닌 까다로운 승부를 주문했다. 어제 경기에서 중앙고의 5번 타자인 박경석이 5타점이나 올린 것 때문인가? 하지만······.

불안감을 애써 억눌렀다.

오늘 던지는 이 공은 강주현 자신이 지금까지 던진 모든 공 가운데 가장 좋은 공이다.

주자를 신경쓰지 않았다. 오직 제구.

커다란 와인드업. 그리고 공이 날아갔다.

-딱!!

저 먼 하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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