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통과점(4)
본래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중견수를 보던 품바, 그러니까 경석이 녀석은 2학년인 이세진에게 중견수 자리를 물려줬다. 어떻게 보면 중견수에서 밀려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유격수가 2루수나 3루수보다 어려운 자리인 것처럼, 중견수 역시 코너 외야수보다 어려운 자리였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이세진을 갈구지 않았다.
“이건 다 안병영 효과라고 볼 수 있지.”
조유진이 그게 뭔지 되물어 달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하여간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친다더니 죽은······, 아니 졸업한 병영 선배가 재학 중인 병영 선배보다 훨씬 낫다. 아, 근데 그러고 보니 이 경우는 저 고사성어 보다는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 뿐이다.’ 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아무튼 품바 녀석은 자신의 글러브가 중견수 자리에서는 돌맹이 라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코너로 물러난 김에 몸을 매우 크게 키웠다. 증량에 어려움을 겪는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부러울 정도로 수월한 증량이었다. 그 덕분일까? 안 그래도 멧돼지를 닮았던 녀석이 덩치까지 키우니까 그 꼴이 참으로 볼만했다.
하지만 더 볼만해진 것은 그 방망이였다.
-따악!!!
내 뒤를 이어 타석에 들어온 경석이가 공을 두들겼다.
우중간 빠른 타구.
선행 주자들이 빠르게 달렸다. 이루수와 우익수 중견수도 빠르게 달렸다.
그리고 나는 ‘매우’ 빠르게 달렸다.
수비 위치를 살짝 뒤로 잡고 있던 이루수가 타구에 가장 가까웠다. 기회였다. 앞선 수비에서 실수했던 것을 만회할만한 순간이다. 거의 메이저리그에서나 볼 법 한 수비 장면이 그의 머릿속에 이미지됐다. 그리고 그의 몸이 그 이미지대로 움직였다. 하나, 둘, 셋. 빠르게 뒤로 달려 나가 그 달리던 움직임 그대로 크게 점프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경하고 이루수의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는 메이저리그의 골글급 수비의 운동능력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이미지였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더 유감스러운 점은 그의 운동능력이 아예 어림없는 수준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쭉 뻗은 글러브. 머리 위를 넘어 날아가던 야구공이 그 글러브 끝을 톡 두들겼다. 차라리 어림 없는 운동 능력이었다면 그냥 가던 길 그대로 갔을 타구가 굴절됐다. 그것도 공을 향해 달려오던 중견수와 우익수를 마치 피해나가는 것처럼.
3루에 서 있던 양세준 코치가 힘차게 팔을 돌렸다.
3루 주자는 이미 홈까지. 2루 주자는 3루를 지나 홈을 향해 쇄도했다.
그나마 굴절된 공에 가까웠던 중견수가 서둘러 공을 쫓았다. 마음이 다급했다. 데구르르 굴러가던 공을 맨손으로 낚아챘지만, 손안에서 공이 돌았다.
이 타이밍에서 나는 뒤에서 벌어지던 대환장 파티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양세준 코치의 힘차게 돌아가는 오른팔만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솔직히 1루에서 2루로 달려갈 때 잠깐 봤던 것만 생각했을 때는 ‘여기서 더 달린다고? 이거 좀 뇌절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에 각인된 반응 그대로 코치의 신호에 맞춰 홈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생생한 18세의 몸에 프로밥 17년이나 먹으면서 늘어난 주루 센스까지. 분명 내가 2루와 3루를 돌아 홈까지 쇄도하는 시간은 메이저에서 한참 활약하던 전성기 시절보다 훨씬 빨랐다.
힘겹게 공을 다시 움켜쥔 경하고 중견수의 마음이 급했다.
그라운드의 상황은 이미 개판이었다. 그나마 자신이 서 있는 곳과 홈의 사이. 유격수가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이렉트 송구는 늦다. 그가 빠르게 유격수에게 공을 던졌다.
-뻐엉!!
연습한 그대로의 물 흐르는듯한 중계 플레이.
포수가 미트를 내밀었다.
등 뒤에 눈이 달리지 않은 만큼 거기서 벌어지는 상황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포수의 동작과 뒤집어쓴 마스크 아래 드러난 표정만으로도 그들의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슬라이딩.
헤드 퍼스트와 벤트 레그.
당연히 조금이라도 빠른 것은 헤드 퍼스트다. 하지만 회귀 이전 지난 십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나는 헤드 퍼스트를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워낙에 비싼 몸이기도 했고, 오른쪽 어깨가 나간 이후로 이상하게 거길 먼저 들이미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몸에 익은 그대로 벤트 레그 슬라이딩이 펼쳐졌다.
홈플레이트 주변의 흙이 비산했다.
포수는 홈플레이트 앞으로 나가서 미트를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마치 슬로우 화면처럼 공이 꽂히는 것이 보였다.
-뻐엉!!
하지만 아직이었다. 포스 아웃이 아닌 태그 아웃 상황. 포수의 미트는 아직 내 몸에 닿지 않았다. 녀석이 오무려진 미트를 휘둘렀다. 나의 발이 홈플레이트에 닿았다.
잠깐의 정적.
심판의 양손이 쫙 벌어졌다.
“세이프!!!”
너무 들어 익숙한 환호성이 귀청을 때렸다.
일루에 선 품바가 나를 향해 엄지를 척 치켜 들었다.
아, 잠깐만.
일루?
“고생했어.”
조유진이 나에게 다가와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줬다.
“쪼유, 품바 쟨 왜 아직 1루냐?”
“서민우 코치님이 좀 애매했다고 판단하신 모양이야.”
“1루 주자가 홈까지 들어오는데 2루에 가는 게 애매했다고?”
아마 내가 홈까지 살아온 것은 수비에서 뭔가 엄청난 아사리판이 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홈까지 달리는데 품바가 1루에 멈춰 선 것도 명백한 작전 미스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나는 살았으니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기 유격수가 홈 승부 대신 안전하게 2루 태그 아웃을 선택했다면 경석이가 아웃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2루로 달려서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주는 게 맞았다. 혹시라도 곧바로 홈 승부를 선택한다면 본인이 살아나갈 확률도 생기는 거니까.
“아무튼 살았으니까 됐지 뭐. 수고했다.”
“그래, 싹쓸이 3타점 1루타라니 참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하네.”
3타점 1루타라니.
이건 회귀 직전, 메이저에서 활동할 당시 1루까지 4.81초로 평균보다 0.2초가량 느렸던 나도 세워본 적 없는 대기록이었다.
1루에 선 품바가 뭐가 그리 좋은지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웃겨서 그냥 나도 씩 웃어줬다.
4회 말. 노아웃에 0:8
경하고 투수의 눈이 썩은 동태처럼 변했다.
최현우라고 했던가? 분명 나쁜 투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고작 열여덟살 짜리 투수에게는 너무 가혹한 상황인 건 사실이다.
경하고의 에이스가 고작 4이닝 만에 마운드를 내려갔다.
뒤를 이어 올라온 투수가 15개 정도 연습구를 뿌렸다.
“금방 끝나겠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 타자들이 3개의 아웃카운트로 1점을 더 뽑아냈다. 솔직히 더 뽑아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선행 주자인 품바가 너무 똥차였다. 중견수 볼 때도 발이 빠르진 않은 편이었는데 최근에 몸을 급격하게 불리더니 이제는 빠르지 않은 정도를 넘어 확실히 느리다. 저건 코너 외야수가 아니라 1루를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수준이다.
0:9
그리고 5회 초. 마운드에 올라가는 1학년 박유준의 표정이 참으로 편안했다. 9점이나 등에 업었기 때문일까? 뭐, 그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유준이 저 녀석이 이상할 만큼 낙천적인 것도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졸업하고 프로에는 가지 못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생각보다는 공이 괜찮았다.
-뻐엉!!
“스트라잌!!”
134km/h의 속구가 존의 복판을 꿰뚫었다.
실투였던 것 같다. 하지만 표정에 흔들림이 없다. 이어지는 두 번째.
-부웅!!
“스트라잌!!”
111km/h의 서클 체인지업.
국내 고교야구에서는 딱히 사용하는 투수가 많지 않은 공이다. 사실 프로에서도 제대로 구사하는 투수들이 많지는 않다. 그나마 피닉스 투수들이 좀 구사하는 편인데 박유준의 중학시절 은사가 거기 출신이라더니 비교적 제대로 배워왔다.
하지만 조금 아쉽다.
-딱!!
2, 3루간을 가르는 타구.
타자가 가볍게 1루를 밟았다.
“세이프!!”
나였다면 다른 공을 조금 더 보여주고 저걸 결정구로 썼을 것이다. 111km/h짜리 서클체인지업은 134짜리 속구를 기다릴 때는 마구에 가깝지만 그걸 염두에 두고 있으면 그냥 치기 쉬운 공일 뿐이니까. 유준이는 저 느긋한 얼굴과 달리 공을 폭급하게 욱여넣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지금 상황에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뭐 그 정도다. 실제로 공에 위력만 있다면 피해 가는 피칭을 하는 투수보다는 자기 공을 믿고 과감하게 던지는 쪽이 더 좋은 결과를 내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바로 이렇게.
-딱!!
내야 땅볼.
티몬이 가볍게 공을 잡아 2루에. 그리고 다시 그 공을 나에게.
6-4-3 병살.
유준이가 2.1이닝을 3실점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그사이 우리는 1점을 더 따냈다.
7회 초에 마운드를 이어받은 재철이는 1.1이닝 동안 4점을 내줬다. 1이닝은 잘 막았는데 두 번째 이닝에서 연달아 안타를 허용했다. 특별히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냥 오늘의 재철이는 평소의 재철이였고 평소의 재철이에게는 경하고의 상위 타순을 막아낼 만한 힘이 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4점을 내주는 동안 우리 역시 1점을 추가했고 그 결과 점수는 아직 11:7로 우리가 제법 앞서 나가고 있었으니까.
재철이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올라온 것은 한결이였다. 1사 2루의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온 녀석은 매우 침착하게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애들 사이에서는 여우 같다느니, 너무 건방진 거 아니냐느니 하는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투수가 저 정도 성질머리를 갖는 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뭐, 그것도 어디까지나 실력이 받쳐줄 때의 이야기겠지만.
그렇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경하고는 우리를 매섭게 추격해왔다.
특히 9회에 2점을 추가했을 때는 가슴이 조금 철렁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결국 경하고는 6.1이닝 동안 11점을 다 따라오는 데 실패했다.
작년, 내가 회귀한 이후로 오늘까지 우리는 경하고와 총 세 번 싸웠다. 그리고 그 세 번을 모두 이겼다. 하지만 오늘의 승리는 조금 달랐다. 지난 두 번의 싸움에서 경하고를 상대로 승리한 것은 중앙고등학교가 아닌 나 최수원이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만큼은 최수원이 아닌 최수원이 이끄는 중앙고가 경하고를 상대로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9회 초.
마지막 타자를 외야 플라이로 잡아낸 한결이가 마운드 위에서 멋지게 포효했다. 바로 직전에 2타점짜리 안타를 내준 것 치고는 제법 멋진 모습이었다.
***
스포츠 선수들이 징크스에 예민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야구 선수는 특히 징크스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최근 중앙고에는 한 가지 징크스가 존재했다.
전국대회에서 경하고를 만나면 꼭 승리하고, 그다음 경기에서 꼭 패배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경하고와의 사투에 모든 힘을 쏟아낸 중앙고는 이어지는 경기에서 거짓말처럼 참패를 당하는 슬램덩크 엔딩이었던 탓이지만 어쨌거나 두 번이나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세 번째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 적어도 오늘 중앙고를 상대하는 청암IT인터넷고등학교의 생각은 그러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1회 초에 깔끔한 삼자범퇴.
그리고 2회에 1안타 무득점.
3회에 또다시 삼자범퇴.
“······.”
“······.”
이대로는 곤란했다.
그 축 처진 덕아웃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청암IT인터넷고등학교의 주장이 애써 크게 떠들었다.
“야야, 다들 힘내자!! 어차피 쟤도 우리랑 같은 고등학생이야. 아까 재현이 안타 치는 거 봤잖아. 우리도 할 수 있다니까?”
물론 2회에 안타 친 재현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과연 제대로 된 안타였을까? 누가 봐도 손끝에서 빠졌던 실투를 간신히 두들긴 힘 없는 타구가 절묘하게 내야를 굴러간 것을 자신의 실력이라고 소리치기에 그의 안면 두께는 너무 얇았다.
그리하여 4회 초.
첫 번째 타자를 공 다섯 개만에 삼진으로 돌려세운 최수원이 1루로 내려갔다.
3.1이닝 1피안타 5삼진 무실점.
“야!! 됐다, 됐어. 저기도 최수원만 비정상적으로 잘 던지는 거지 다른 투수들은 별 볼 일 없어. 니들도 알잖아. 얼마 전까지 중딩이던 애들이 팀에서 두 번째 세 번째 투수인 거. 그저께 경하고 애들도 6.1이닝 동안 9점이나 뽑았잖아. 안 그래?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청암고 학생들의 시선이 1루에 내려간 최수원에게로 향했다.
큰 키, 하지만 그 큰 키 이상으로 압도적인 아우라가 그들을 위협했다.
언제라도 마운드에 다시 오를지 모르는 에이스.
청암고의 학생들은 도저히 주장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