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82화 (82/305)

82화. 통과점(3)

최근 프로야구계에서는 묘한 소문이 솔솔 나돌고 있었다.

신인 계약금 20억.

그야말로 억 소리 나는 소문이었다.

마린스가 재작년 최민혁에게 신인계약금으로 10억 5천만원을 내주기 전까지 무려 20년 가깝게 신인 계약금 10억은 통곡의 벽이었다. 심지어 작년, 역대급 유망주로 꼽혔던 백하민 역시 10억의 벽은 넘어서지 못했다.

헌데 10억을 훌쩍 넘어 갑자기 20억이라고?

“잠깐, 잠깐만!! 작년에 마린스에서 최고연봉 받았던 노형욱 연봉이 20억 아니었어?”

“4년 총액 110억 중에서 계약금이랑 옵션이 40억이었으니까 연봉은 17억5천이었지. 아, 근데 타석이랑 홈런 옵션 달성했다니까, 총 수령액은 20억 맞네.”

“그러면 지금 신인한테 팀내 최고 연봉자랑 같은 대우를 해준다는 말이야? 에이, 그럼 그거 완전 헛소문이잖아.”

“엄밀히 말하자면 같은 대우는 아니지. 일단 계약금 받고 당장은 최저연봉으로 뛰는 거니까.”

“아무리 그래도 신인 계약금 20억이라니······. 여기가 무슨 메이저리그도 아니고. 메이저리그도 1라운드 아니면 20억은 못 받아.”

“그 메이저리그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최수원 정도 되면 20억씩 안 주면 도저히 잡아둘 만한 견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지.”

“쟨 진짜 억 소리 나는구나. 시작부터 어지간한 월급쟁이 생애 연봉을 깔고 가버리네.”

그들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경기장 곳곳의 야구 관계자들 입에서 마린스, 최수원, 그리고 20억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 맞다. 그 소식 들었어? 이번에 미국에서 드래프트 전체 1위. 계약금만 150억 받은 걔 있지? 걔가 그렇게 최수원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고 하더라.”

“미국 드래프트 1위면 알렉산더 맥도웰? 걔가 최수원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고?”

“그래, U-18대회에서 만난 이후로 그렇게 언론이며 방송에서 최수원 이야기를 한다네. 이번에 최수원이 국제 아마추어 평가 전체 2위인 거 알고 있지?”

“최수원이 2위라고? 1위가 아니라? 그건 그거대로 또 놀라운데?”

“도미니카에 최고 168km/h던지는 애가 있다네.”

“168km/h?”

“어, 뭐라더라? 110마일을 던질 재능이라나?”

“110마일이면······. 177km/h? 미쳤네. 미쳤어. 와, 근데 진짜 이야기 하면 할 수록 최수원 쟤는 뭔가 스케일이 다른 느낌이네.”

마운드의 최수원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쉽게 보기 힘든 와일드한 폼. 그의 손끝에서 야구공이 뽑혀 나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2.1이닝 동안 경하고 타자들을 상대로 벌써 삼진만 네 개째.

“오늘 경하고 타자들이 아예 건드리지를 못하는데?”

“쟤들도 작년에 황금세대 다 졸업하고 좀 쭉정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경험이 다르잖아. 지난 2년간 쟤들이 전국 대회 우승을 몇 번을 했는데.”

“그러니까. 바로 그 경험이 문제라는 거지. 워낙에 선배들이 출중해서 제대로 기회를 받질 못했으니 경험치를 먹을 수가 없었잖아. 다른 학교라면 1학년 때부터 기회 받을 애들도 거의 기회를 못 받았고, 특히 3학년쯤 됐으면 야구로 프로 가는 거 포기하고 실적 채워서 대학 가려고 공부에 좀 집중하는 애들도 가끔 나오는데, 작년에 경하고는 그런 것도 아예 없었잖아.”

“하긴, 또 그렇긴 하네. 근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중앙고 3학년 애들이 경험치는 좀 잘 먹은 거 아니야? 특히 저기 배터리는 1학년 때부터 거의 팀의 첫 번째 옵션이었잖아.”

최수원이 던진 공이 바깥으로 애매하게 살짝 빠졌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컨트롤을 잡았다고 해도 투수가 던지는 모든 공이 자신이 원하는 곳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뻐엉!!

그리고 조유진이 자연스럽게 그 공을 받았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글러브를 옮긴 것은 아니었다. 고교야구에서는 종종 미트로 그런 짓을 해도 통할 때가 있긴 하지만, 요즘 프로에서는 얄짤없다. 안과 밖, 살짝살짝 박자를 타던 몸이 공이 들어오는 그 순간에 맞춰, 스르륵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 덕분에 안그래도 애매하던 공이 훨씬 더 애매해졌다.

0.1초 정도의 망설임.

“스트라잌!!!”

심판의 입에서 스트라이크 콜이 나왔다. 최수원이 입꼬리를 씨익 들어 올렸다. 확실히 그딴 상, 하체 분리 타격을 들고 프로에서 10년을 버틴 포수다운 실력이었다.

“스읍······. 이거 오늘 경하고가 좀 어렵겠는데?”

“이 사람이? 누구나 알 만한 소리를 뭐 그리 진지하게 하고 있어.”

0:4

이제 3회 초인데 벌써 4점 차이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무엇보다 2.2이닝. 여덟 개의 아웃카운트 가운데 삼진만 다섯 개. 오늘 경하고의 타자들은 최수원에게 영혼까지 탈곡 당하는 중이었다.

‘아, 진짜 무슨 마라도 낀 건가? 작년부터 대체 왜 이래?’

경하고 감독 조병구가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아니, 지난 왕중왕전에 전국체전으로 모자라서 또 이번 뉴월드 빅마트배까지. 최수원 쟤는 무슨 경하고 킬러도 아니고, 하필 왜 매일 경하고랑 붙을 때만 선발로 등판해서 이런 피칭을 보여주는 건지.

-딱!!

“아······.”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탄이 튀어나왔다.

투수 정면으로 날아간 힘없는 땅볼을 최수원이 가볍게 잡아 1루에 톡 던졌다.

“아웃!!”

또 삼자범퇴였다.

‘아무래도 역시 굿이라도 해야······.’

황금세대가 모두 졸업했고, 현재 3학년들 다수가 큰 대회에서 주전으로 뛴 경험이 많지 않다고 해도 경하고는 여전히 전국 최강을 노릴만한 강팀이었다. 적다고는 해도 작년 전국 무대를 경험한 아이들도 다수였고, 그 가운데 둘은 붙박이 스타팅 멤버였다.

이건 그저 상대가 나빴을 뿐이다.

마운드에 현재 경하고의 에이스 투수인 최현우가 올라왔다.

3이닝 동안 4실점. 하지만 분명 좋은 투수였다, 그의 눈에 실린 투쟁심은 여전했으니까.

작년 경하고의 황금세대는 준결승에서 중앙고의 최수원을 만남으로써 그 위대한 도전이 좌절됐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마음을 이어받은 최현우 자신이야말로 그 미완의 전설. V29라는 숫자에 가장 오래된 2를 갈아치울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적어도 현재 고교야구 전체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만한 투수인 최현우가 최선을 다해 공을 뿌렸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삼진 하나를 포함하여 1피안타 무실점.

깔끔하게 중앙고의 9번 타자인 임지민에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

이번 경기가 있기 전, 감독님과는 꽤 오랜 대화를 나눴다.

“어깨는 좀 어떠냐?”

“많이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다행이구나.”

솔직히 회귀 이전 2학년 때 대회에서 미친 듯이 던지는 바람에 어깨가 박살이 나서 인생이 잠깐 힘들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미친 듯이 박 감독님을 미워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적어도 박 감독님은 규정에 어긋나는 형태로 나를 사용하진 않았다. 딱 고교리그에 보통 있는 감독의 수준이었달까? 게다가 우승이 코앞에 보였는데 욕심을 부린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 감독님이 비범한 지도자가 아니었음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리그 평균 수준의 지도자였던 것을 미워할 만한 이유는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어깨가 박살이 났던 나를 붙잡고 ‘네 재능을 생각해라. 지금 와서 야구 안 하면 뭐 할 생각이냐. 공을 못 던진다고? 그러면 공을 치면 그만이지. 방망이를 들어라.’ 같은 어디 만화에나 나올법한 대사를 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했다, 물론 당시에는 좀 사이코패스 같았지만 어쨌든 결과는 좋았으니까······.

“이번 대회에서 나는 진지하게 우승을 노려볼 생각이다. 아니, 나는 우리 팀이 이번 대회뿐만 아니라 남은 대회까지 모두 우승을 노려볼만한 전력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생각해봤다. 가능한 플랜일까?

1년 162경기, 혹은 144경기를 치르는 풀리그라면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토너먼트 전이라면?

“8강전 이후로 다른 아이들의 역할이 크겠군요.”

“그래, 준준결승과 준결승. 그 아이들이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나겠지. 물론 거기에는 네가 기본 전제로 깔려있지만.”

“맥시멈 59개로군요. 일단 선발로 등판해서 던지고 일루수로 뛰다가 상황 봐서 다시 마운드 올라가는 형태입니까?”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하지. 투구 수로는 같은 59개더라도 일단 던지고 식어버린 어깨를 다시 쓰는 건 이야기가 다른 문제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선발로 뛰는 날에도 일루수로 계속 경기를 뛰어야 한다는 거였다. 게다가 어차피 네가 이후로도 계속 투타겸업을 하려면 이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니까······.”

어?

솔직히 지금 박 감독님의 이야기에는 조금 놀랐다.

뭐랄까? 분명 박 감독님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비범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딱 시대적인 한계에 맞춰가는 평범한 감독. 그게 바로 박 감독님이었다.

그런 만큼 내가 생각한 박 감독님은 고교야구에서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에이스의 운용법(혹사)을 특별히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양반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이런 선수 보호적인 말씀을 하신다고?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설마 내가 그런 터무니 없는 걸 시킬 거로 생각한 거냐?”

“아, 아뇨. 그냥 보통 다들 그렇게 하니까요.”

한차례 피식 웃은 박 감독님이 나의 오른팔을 끌어다 잡았다.

“수원아. 이 팔은 말이다. 국보다.”

“네?”

“난 절대 고교야구가 목적지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얼마나 기냐. 특히나 요즘처럼 100세 시대니, 뭐니 하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물론 고교야구에서 멈춰서는 아이들이 대부분일 거다. 하지만 그건 고교야구가 목적지이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아이들에게는 저 먼 목적지까지 갈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게 그 아이들의 타고난 힘의 크기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아이들을 지도하는 나의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지.”

“감독님······.”

“하지만 수원이 넌 달라. 더 멀리, 더 높은 곳. 그러니까 모두가 진짜 목적지로 삼는 그곳까지 나갈만한 힘을 갖고 있어. 그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한 번도 없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없을 힘일지도 모른다.”

어디 고전 만화에 나오는 것 같은 오글거리는 대사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그래, 지금 박 감독님이 보여주는 눈빛은 어깨가 결딴나서 야구 때려치워야 하나 고민하던 나를 붙잡던 그때와 같지 않았다.

그때의 눈빛이 미안함과 동정이었다면, 지금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강렬한 기대였다.

“다시 말하지만 수원아, 네 팔은 국보다. 미국으로 가라. 남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 정 미안하면 이번 대회 우승하면 그만 아니냐. 솔직히 우승상금 5천만 원이면 어지간한 프로선수 몇을 배출해도 받을 수 없는 금액 아니냐. 게다가 5년간 받을 지원금? 그것보다 팀에서 메이저리거 하나 배출했다는 영광이 더 클 거다. 그러니까 괜히 우리 걱정 때문에 굳이 KBO에서 7년이나 뛸 필요 없다.”

어······. 음······.

나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

경하고 감독 조병구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시발, 이 새끼들이?”

경기에 패배하는 것은 화는 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여기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4회,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

최수원이 마운드를 내려갔다.

투구 수 47개.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 것일까?

아니,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마운드를 내려가 투수 글러브 대신 1루용 미트를 들고 1루에 서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부웅!!

“스트라잌!! 아웃!!!”

마운드에 올라온 토실토실한 인상의 1학년 투수가 삼진을 잡아냈다.

그리고 다시 또 중앙고의 공격.

상, 하체 분리 타법에서 한 단계 진화하여 침대 타법을 보여주는 조유진의 선제 안타가 터졌다. 마운드에 선 최현우의 기분이 묘하게 나빠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야 땅볼, 아니 내야 안타.

빠르게 달려 나온 이루수의 글러브에 공이 살짝 튀었다. 고교야구이기에 나올 수 있는 작은 실수. 중앙고의 주자들이 최선을 다해서 빠르게 달렸다. 하지만 그래도 아주 크게 늦지는 않았다. 야구공을 수습한 경하고의 이루수가 이루로 커버를 달려온 유격수를 향해 공을 뿌렸다.

벤트 레그 슬라이딩.

유격수가 조유진의 발을 피했다.

-뻐엉!!

비슷비슷한 타이밍.

심판이 양손을 치켜든다.

“세이프!!”

슬라이딩을 피하느라 흐트러진 몸을 수습하며 일루로 송구했다.

-뻐엉!!

“세이프!!”

주자들의 빠른 발과, 미숙했던 수비가 만들어낸 내야 안타. 만약 프로였다면 마린스, 피닉스 정도를 제외하곤 무조건 병살이었을 타구였다.

그 형편 없는 수비에 감히 경하고를 상대로 다음 경기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에이스를 내리다니. 아주 혼쭐을 내주겠노라 벼르던 조병구 감독은 뒷목을 움켜쥐었다.

“오늘 펑고 준비하겠습니다.”

조병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 1, 2루 상황.

멘탈이 조금 타격을 입은 투수가 공 여덟 개만에 타자를 볼넷으로 출루시켰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 투수를 내려야 하냐는 질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은 누가 올라가도 결국 고의사구를 던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무사만루에서 고의 사구?

사실 상대가 최수원이라면 아무도 욕할 수 없었다.

마치 73개의 홈런을 치던 배리 본즈를 고의사구로 거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3루의 조유진이 걸어서 홈에 들어왔다.

0:5

이길 수 있을까?

조병구 감독의 시선이 1루에 선 최수원을 향했다.

크다.

터무니없이 크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경기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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