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통과점(2)
“오, 전 단장님.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공 단장? 자네야말로 여긴 어쩐 일인가?”
“하하, 저야 워낙에 박 총재님과 각별한 사이 아닙니까. 이번에 녹용이 괜찮은 게 좀 들어와서 겸사겸사 인사도 할 겸 이렇게 찾아 왔지요. 원래 좋은 건 나눠 먹고 그래야 힘들 때도 서로 돕고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40대 중후반? 멀끔한 인상의 사내가 전상익을 향해 인사했다. 그는 서울 브레이브스의 단장인 공병준으로 전상익이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재작년에는 트레이드로, 작년에는 FA관련으로. 저 인간 때문에 먹은 욕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능력이 있는 인간임은 분명했다. 게다가 구단의 특성상 자신의 능력을 윗선의 개입 없이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점 역시 무서운 부분이었고.
“최수원 때문이시죠?”
“뭐?”
“그 녀석 솔직히 KBO가 담기엔 좀 큰 그릇이죠. 그래서 제가 평소에 그렇게 포스팅 시스템 개편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애당초 메이저 성공할만한 싹수들을 굳이 한국에서 최소 7년을 뛰게 한다는 건 낭비라니까요. 게다가 진짜 자신 있는 애들은 그냥 아예 안 뛰고 가버리잖습니까. 그리고 아무도 관심 없는 마이너에서 소모돼버리고요. 솔직히 2010년대 이후로 미국 직행했던 애들 가운데 KBO 뛰고 갔으면 MLB에서 쏠쏠하게 활약했을 애들도 제법 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뭐, 그랬을지도 모르지. 덤으로 공 단장이 돈도 제법 크게 벌었을 테고 말이야.”
“에이, 큰돈은 무슨 큰 돈입니까. 계약금에 연봉에, 게다가 그만큼 키우는데 들어가는 비용까지. 본전치기 간신히 하는 거죠.”
“최근에도 160억인가 벌었던 것 같은데. 그게 본전치기라고?”
“하하, 걔 하나만 보면 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걸 위해서 저희가 들인 기간 설비며 인건비까지. 딱 본전치기죠. 아무튼 그것보다 어떻습니까? 포스팅 시스템 개편안 제가 준비해둔 자료들 공유해드릴까요?”
전상익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에 자네가 원하는 그 육성형 용병 개편안도 끼얹고?”
“그러면 저야 감사하죠.”
“됐네. 일없네. 드래프트 제도하에 있는 KBO가 셀링리그가 된다니.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자네 도움 없이, 자네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할 테니 자네는 자네 일이나 보게.”
드래프트는 하위권 약팀에 좋은 자원을 분배해주는 제도로 리그의 경쟁력을 위한 제도다. 하지만 만약 거기에 빠른 포스팅이 추가된다면? 최악의 경우 하위권을 꾸준히 유지하며 유망주를 주워다가 적당히 키운 뒤 비싸게 팔아먹는 짓을 무한히 반복하는 기형적인 팀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전상익이 등을 휙 돌려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공병준이 소리쳤다.
“하하하, 거참. 셀링 리그라니.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그런 거 다 오해입니다. 아무튼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쇼. 전 언제나 전 단장님 편인 거 잊지 마시고요.”
저 녀석이 여기저기 눈과 귀를 깔아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총재실까지 손이 닿아있을 줄이야······.
‘아니, 잠깐만. 설마 총재실이 아니라 우리 팀 프런트에 깔아 둔 거 아니야?’
***
-따악!!!
어제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던 아이들 위주로 진행되는 연습 경기.
상대는 천남고등학교였다.
“야, 우리 진짜 많이 강해지긴 강해졌네.”
“쪼유, 넌 지금 저걸 보고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냐?”
8:3
물론 여기서 8은 우리가 아닌 천남 쪽이다.
“아니, 물론 점수는 좀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우리 때 생각하면 진짜 장족의 발전이지. 그 때, 천남이 우리 상대나 해줬냐? 쟤들 맨날 연습 경기한다고 그러면 뭐 백원고나 저기 대덕고 같은 애들만 불러서 했었잖아.”
“체급 차이가 좀 있긴 했지. 뭐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딱!!!
9:3.
이재철이 고한결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명문고와 그렇지 못한 팀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아무래도 명문은 뎁스가 두터울 수밖에 없다. 천남고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들 역시 주전 선수는 1차전에 전부 나갔지만, 1차전에 출전하지 못한 3학년과 2학년들이 우리 주전들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고한결이 삼진을 잡아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타자를 기다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표정하려고 애쓰는 얼굴이었다.
“확실히 한결이 공이 좋긴 좋아. 너 1학년 때 보는 것 같네.”
“에이, 그 정도는 아니지. 기억 안 나냐? 나 입학하자마자 144까지 던졌었잖아. 그리고 8개월 만에 150 찍었고. 그때 너 내 공 제대로 못 잡아서 코치님이랑 매일 남아서 연습했었으니까 기억이 안 날 리가 없는데?”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1학년이 135 던지는 거면 그래도 손에 꼽을 수준이지. 병영 선배도 3학년 여름 지나서야 135 던졌잖아.”
“그건 그렇지.”
안병영이 의문의 1패를 적립하는 사이, 천남고의 타자가 고한결의 초구를 잡아 당겼다.
-딱!!!
높게 치솟은 타구.
고한결이 손가락을 들어 적극적으로 타구를 가리켰다.
중견수를 맡은 2학년 이세진이 성큼성큼 달려가 타구를 받아냈다. 어제 경기에 출장했던 야수들 가운데 유일하게 오늘 연습 경기에 스타팅으로 뽑힌 녀석이었다. 확실히 작년에 중견수 보던 품바 녀석보다 수비가 훨씬 좋다.
“선배님 나이스 캐치입니다!!”
고한결이 이세진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호수비에 나이스 캐치라니. 구속에 이어 인성까지 안병영의 완패였다.
그날 연습 경기.
우리는 11:7로 패배했다. 각오했던 것보다는 훨씬 양호한 결과였다.
***
“야, 재철아. 니네 방쫄 기강 좀 잡아야 하는 거 아니냐?”
“방쫄? 한결이? 그리고 기강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어, 3학년 선배들이야 별 말 안 한다지만, 1학년 새끼가 야구 좀 한다고 태도 존나 건방지잖아.”
“건방지다니? 뭐가?”
“아니, 마운드 넘겨 받을 때부터 해서 시발 선배가 호수비 했다고 나이스 캐치입니다? 완전 미친 거 같던데?”
“아니, 마운드 넘겨 받는데 건방진 건 또 뭐냐. 왜? 마운드 오는 길에 뭐 삼보일배라도 하면서 올까? 그리고 호수비에 나이스 캐치입니다면 됐지, 뭐 큰절이라도 바란 거냐?”
“큰절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 뭐 그거야 그렇다고 치자. 근데 너도 걔 강판당할 때 표정도 봤잖아. 개 썩은 거.”
“투수는 원래 마운드 내려올 때 표정 썩게 돼 있어. 그리고 한결이 평소에는 싹싹하고 괜찮잖아.”
이세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이재철. 하여간에 착해빠져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야, 그런 애가 나중에 선배 잡아먹는 거야. 걔가 싹싹해서 지금 그러는 거 같냐? 선배가 안 무서우니까 그러는 거라고. 자기가 야구 좀 하는데 뭐 어쩔 거냐 그런 거지. 그거 초장에 안 밟아두면 나중에 골 아파진다.”
“그래서, 나중에 골 아프기 싫으니까 지금 밟아둬야 한다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이재철. 흘려듣지 마라.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나야 야수니까 뭐 별 상관없는데, 넌 같은 투수잖아. 그러다 나중에 너도 안병영 꼴 난다. 수능 날 너도 들었지? 아니다, 너는 직접 봤구나. 자기 간식도 없는데 수원 선배한테 찍소리도 못하고 그냥 들어가는 거. 말년에 후배한테 설설 기는 거 솔직히 졸라 추하지 않았냐?”
“글쎄다. 난 그렇게 추해보이지는 않던데. 그리고 안병영이 어디 잘해주다가 그렇게 된 거냐? 선배들이 말하기를 수원 선배가 1학년일 때 지랄 제일 많이 한 거 안병영이라고 그러더라. 그나마 잘해준 게 진우 선배고. 그것만 봐도 애들한테 잘해줘야 할지 지랄 해야 할지 답 나오지 않냐? 아무튼 헛짓거리 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 쉬어라. 내일 아침에도 훈련 해야지.”
돌아선 재철의 귓가에 ‘아, 새끼 생각해줘도 지랄이네. 그 새낀 아무리 봐도 밟아 줘야 말을 들어 먹을 타입인데.’ 같은 투덜거림 들려왔다.
재철의 가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투덜거리는 세진 때문이 아니었다. 재철 자신이 그 투덜거림에 혹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돌아 ‘그러면 그럴까?’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 너무 화가 났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더러운 질투심이다.
선배인 최수원이 더 잘 던질 때는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선배는 선배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막 고등학교에 들어온 어린놈이 자신보다 좋은 공을 던지는 것을 참기란 너무 힘들었다.
이재철은 평소 최수원을 존경했던 만큼 안병영을 싫어했었다.
대체 선배가 돼서 왜 후배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확실하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재능 있는 후배를 받고 보니, 안병영의 마음이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짜증나.’
그렇기에 재철은 자신의 비루함을 직시할 수밖에 없는 그 이해되는 마음이 너무나도 싫었다.
오늘 연습 경기 투구수 32구.
1.2이닝 5피안타 2실점.
재철이 실내 연습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참 마무리 운동 중인 최수원이 있었다.
“어? 재철이 왔네? 너 오늘 공 던졌잖아. 무리하지 말지?”
“괜찮습니다. 선배님!!”
“야, 야구 정신력으로 하는 거 아니다. 부상은 정신력 만땅 찍는다고 안 오는거 아니고. 그래도 정 그러면 같이 몸만 가볍게 풀자. 오케이?”
“넵!!!”
***
2차전 부전승.
그리고 3차전.
너무나도 당연하게 중앙고는 완승을 거뒀다. 심지어 박감독은 4회에 최수원을 1루로 돌리고 마운드에 2학년 투수들을 올렸다.
-딱!!!
“마이볼!!!”
당연히 실점은 있었다.
하지만 고작 1, 2점의 실점으로 경기가 뒤집히기에 앞선 3이닝 동안 중앙고가 만들어낸 점수는 너무 컸다.
심지어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 점수는 점점 더 벌어져서 마침내 7회가 끝났을 때 중앙고는 끝끝내 10점의 점수 차를 만들어내며 콜드게임으로 3차전을 마무리 지었다.
14:4
중앙고 승리.
“이거 좀 익숙한 패턴인데?”
“에이, 아직 익숙한 패턴은 아니지. 중앙고는 최수원이 공을 던질 수 없는 상황이 됐을 때 망하잖아. 오늘 최수원 꼴랑 37개 던졌어. 내일 하루 쉬면 모레 다시 던질 수 있고. 내가 보기엔 한 5차전? 그쯤에서 또 최수원이 완투하고 ‘OO과의 사투에 모든 힘을 쏟아낸 중앙은 이어지는 6차전에서 거짓말처럼 참해를 당했다.’ 엔딩 나지 않을까?”
“아냐, 그래도 최수원이 은근히 준우승은 잘 챙겨 오거든. 내가 보기엔 6차전에서 완투하고 7차전 패배할 것 같은데.”
“그럴라나?”
본래 고등학교 야구에 기자가 찾아오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최수원의 경기에 기자들이 몇 명 정도 찾아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졌다.
“야, 근데 오늘 어째 애들이 좀 많아 보인다? 저기 저거 동후 일보 아니야? 쟤들 스포츠 섹션 이번에 축소하지 않았나?”
“뭐야, 너 혹시 이야기 못 들은 거야?”
“이야기? 무슨 이야기?”
“아, 기자라는 새끼가 소문 참 느리네. 너 요즘 프로 야구쪽 애들이랑은 아예 밥도 안 먹냐?”
“야, 누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냐? 안 그래도 사람은 없는데, 위에서 아마야구까지 나한테 다 떠넘겨서 프로 야구쪽 애들이랑 밥을 안 먹는 게 아니라, 혼자서도 밥을 먹을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어. 근데 대체 소문이 뭔데.”
“아······, 이것 참······.”
“알았어. 이따가 커피 내가 살게.”
“아메리카노 말고 아인슈페너. 크림 단단한 걸로.”
“알았으니까 빨리 말해봐. 대체 뭔데 그래.”
“그게 그러니까······.”
작은 속삭임.
파마머리를 한 뚱뚱한 기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20억?”
***
4차전과 5차전.
대진운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팀의 컨디션이 좋았던 것일까? 어쩌면 그 둘 모두일지도 몰랐다.
나는 4차전에 고작 27개의 공을 던졌고 5차전에는 아예 등판하지 않았다.
그리고 6차전 준결승.
상대는 황금세대가 모두 졸업한 경하고.
내가 마운드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