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80화 (80/305)

80화. 통과점(1)

올해 2학년에 올라온 이재철이 기억하는 최수원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야구의 화신 그 자체였다.

어릴 적부터 누누이 야구는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라왔다. 등 뒤에 야수들을 믿고 공을 던져야 한다고.

그리고 그날 있었던 노히트 노런.

처음이었다. 야수의 힘을 빌리지 않은 투수가 승리하는 것은.

분명 그날 경하고등학교와의 준결승 경기에서 승리한 것은 중앙고등학교가 아니었다.

최수원이었다.

그리고 오늘.

마운드의 그가 또 다시 공을 뿌렸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지난 전국체전 때 강하게 느꼈었다.

‘폼이 더 와일드해지셨는데 컨트롤은 오히려 더 좋아지셨어.’

-딱!!!

높게 뜬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웃!!”

그리고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점이 있다면 안정감이 생겼다는 점 정도다. 사실 참 기이한 일이었다. 아니 저런 역동적인 폼으로 공을 던지는데 안정감이 느껴진다고?

“쯧, 저 녀석 저거 미국 갔다 오더니, 완급조절이 전혀 안 되네. 하체 저렇게 끌어다 쓰면 금방 퍼질 텐데.”

양세준 코치가 혀를 찼지만, 솔직히 공감하기 힘들었다.

최근 기숙사 같은 방을 쓰던 터라 최수원이 얼마나 열심히 하체를 만들고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하체가 얼마나 우람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160에 가까운 공이란 얼마나 위력적인가.

물론 오늘 그들의 1차전 상대인 세민고는 명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녀석들도 짧게는 4, 5년. 길게는 10년 이상 야구만 해온 녀석들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재철 자신과 비교해도 그리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선수들을 상대로 삼자범퇴까지 고작 공 여덟 개.

최수원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변함없이 강력했다.

***

“크게 변했네.”

상전벽해, 일신우일신, 괄목상대. 뭐 무슨 말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마운드의 최수원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런 말에 딱 어울렸으니까.

“네? 크게 변했다고요?”

새로 들어온 신입 김성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김 대리, 아니 이번 인사평가에서 과장으로 진급한 김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크게 변했지.”

“하지만 구속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요. 구위가 좋아진 건가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입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신입이다. 적어도 작년까지 같이 다니던 팀장처럼 상사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신입이 아무것도 모르는게 백 배는 낫다. 적어도 신입은 자기가 잘못 아는 게 맞다고 박박 우기지는 않을 테니까.

“내 눈이 초고속 카메라도 아니고 구위 좋아진 걸 여기서 알 수는 없지. 뭐 감이라는 것도 있긴 하지만 지금은 그걸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아!! 혹시 컨트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거라면 확실히 좀 안정적인 느낌이 있긴 합니다. 공이 일정하게 존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네요. 로케이션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155 왔다갔다 하는 공이 이렇게 들어오면 고교 레벨에서는 절대 못 치는 공이죠.”

“그건 지난번에 전국체전 때도 꽤 잡혀 있었고. 성철아, 우리가 오늘 최수원 공을 보러 온 거냐?”

“어······, 그것만 보러 온 건 아니죠. 조유진도 어떻게 변했나 좀 봐야 하고, 1학년에 그 고한결이랑 박유준도 한 번 체크는 해봐야 하고요.”

김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하는 말은 그게 아니라. 공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공을 던지는 투수잖아. 안 그래?”

“네?”

김성철이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떴다.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얼굴에서 너무 확연하게 드러났다.

“내가 너 입사했을 때 말했었지. 스카우트는 결과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과정을 보는 사람이라고.”

“네!! 대회의 결과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던졌는지가. 최종 성적도 중요하지만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얼마나 발전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피칭도 마찬가지야. 날아온 공도 중요하지만, 투수가 어떻게 던졌는지. 그 과정이 더 중요해. 자 여길 잘 보라고.”

카메라와 연동된 태블릿 속 최수원이 공을 뿌렸다.

왼쪽 화면에는 6개월 전의 최수원이, 그리고 오른쪽 화면에서는 바로 오늘 경기의 최수원이.

“아······.”

그리고 김성철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이거 최수원 완전히 미쳤네요. 고등학생이 겨울방학만으로 이렇게 바뀌어서 온다고요?”

“뉴욕에 피칭 랩에 있었다고 하니 거기서 만들어 준 거겠지. 뭐, 그걸 감안 해도 터무니없어. 솔직히 작년 수준만 생각하면 타자로는 KBO 당장 폭격할 만큼 완성도가 있었지만, 투수로는 불펜이나 가능할 정도였었거든. 하지만 이거라면 이제 변화구만 하나 제대로 장착하고 체력만 증명되면 진짜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과장님. 그거라면······. 설마?”

“그래, 투타 겸업.”

***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물론 고등학교 선수 레벨. 그것도 프로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아이들을 상대로는 이전 그대로 던졌다고 해도 지금과 크게 다른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공을 던지는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두 번째 타순임에도 불구하고 상대 타자들은 타이밍을 전혀 잡지 못하고 있었다. 조유진이 타석에 선 타자와 뭔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3학년이 되고 주장까지 맡더니 안 그래도 좋던 친화력이 더 좋아졌다.

-딱!!!

낮게 깔린 포심 패스트볼.

타자의 방망이가 간신히 공을 건드렸다. 하지만 단순히 방망이를 가져다 대기에 급급한 타격이었다. 타구에 힘이 실릴 리 만무하다.

유격수인 임지민이 빠르게 뛰어나와 타구를 주워들었다.

충분히 맨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한 공이었지만 굳이 무리하지 않는 점이 녀석다웠다.

-뻐엉!!!

“아웃!!!”

일루 포스 아웃.

5회 초 세민고의 공격이 끝났다.

그리고 5회 말.

조유진이 타석에 섰다.

타순은 1번. 변한 것은 타순만이 아니었다.

뒤로 무게 중심이 살짝 쏠린 넓은 스탠스.

앞으로 숙인 상체. 치켜든 방망이.

오늘 나를 보기 위해 모여든 스카우트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그들이 보기에도 조금 우스꽝스러운 자세이긴 할 것이다.

‘아니, 타격하면서 상체가 1루로 빠지는 경향이 있다고 아예 상체를 앞으로 눕혀버리다니······.’

‘나쁘지는 않지. 슈퍼소닉도 저걸로 말년에 재미 좀 봤으니까.’

‘근데 그건 할 만큼 해보고 안 돼서 한 거였잖아요. 이제 고등학교 3학년에, 장타 포텐도 제법 되는데 벌써 저런 짓을······. 게다가 저 친구는 외야수도 아니고 포수 아닙니까. 지금이야 아직 젊어서 무릎이 쌩쌩하니까 저걸 한다고 쳐도 몇 년 지나서 주력 떨어지면 어쩌려고······.’

아마도 대충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지 않았을까?

조유진의 문제점은 방망이를 휘두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이 1루를 향해 빠르게 열린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끝까지 방망이에 힘을 실을 수 없었고, 당연히 힘이 실리지 않은 타구가 제대로 날아갈 리 만무했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의 투수가 공을 뿌렸다.

살짝 빠지는 공.

조유진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딱!!!

지금도 여전히 몸은 빠르게 일루를 향하려 애썼다.

하지만 일루와 정확하게 반대쪽으로 위치한 상체가 그 시간을 늦췄다. 아니, 오히려 1루를 향한 그 강한 열망이 수그렸던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스윙을 제대로 완성시켰다.

오직 연습 때만 나오던 제대로 힘이 실린 타구.

물론 그때처럼 호쾌한 타구는 아니었다. 저런 엉거주춤한 폼으로 거기까지 바라면 그건 도둑놈이다. 하지만 충분했다. 1, 2루 간을 꿰뚫는 타구. 조유진의 몸이 일루를 향해 질주했다.

“세이프!!!”

1루에 서서 보호대를 풀고 배팅 장갑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는 녀석의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작년 겨울만 하더라도 자세가 우스꽝스럽네 뭐네 하면서 잔뜩 투덜거리던 녀석이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내 앞에 밥상을 차려줄 만한 타자가 하나 생겼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기도 했다.

“나이스!!!”

서민우 코치님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 3개월. 타격폼을 바꾼다고 고생한 것은 쪼유만이 아니었다. 코치님도 자료들 찾아가며, 쪼유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오늘 첫 실전에서 이만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기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어지는 안타.

그리고 내야 플라이.

원아웃에 주자 1, 2루.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익숙한 시선들이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앞선 타석에서는 볼넷 하나와 담장 근처까지 날아가는 희생플라이.

‘겨울 내내 투수 훈련만 했다고 하더니 타격감은 조금 떨어진 거 아닌가요?’

‘뭐, 어쩔 수 없지. 투타겸업은 그래서 힘든 거니까.’

내가 들은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스카우트들이 저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추측해보는 것뿐이다. 실제로 뉴욕의 NBM센터에서 훈련을 할 때 워싱턴 형제들도 나에게 그런 경고를 했었다.

“미리 경고 했던 것처럼 투수가 사용하는 근육과 타자가 사용하는 근육은 겹치는 부분도 많지만 다른 부분도 많아. 데카슬론 선수들이 던지기 종목 훈련을 하면 높이뛰기 종목들의 기록이 줄어드는 것처럼 피칭 훈련만 하다 보면 타격할 때 불편한 부분이 생길 수도 있을 거야.”

기본적으로 투수는 미는 힘, 타자는 당기는 힘을 ‘더’ 필요로 한다. 실제로 지난 세계대회 이후로 나의 몸을 살펴보면 어깨 관절을 보조하는 근육들과 팔의 삼두근, 그리고 전완근 쪽이 확연하게 부풀어 올랐다. 반면 가슴의 대흉근과 팔의 이두근은 조금 줄어들었고 그만큼 하체가 더 튼실해졌다.

마운드의 투수가 셋업 포지션에서 빠르게 공을 뿌렸다.

-뻐엉!!

존을 벗어나는 공.

-뻐엉!!

또 존을 벗어나는 공.

그리고 세 번째.

느낌이 달랐다.

살짝 비틀린 팔목.

우리 나라 고등학교 투수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변화구.

슬라이더였다.

투수가 던진 공이 살짝 존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나를 유혹했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오늘 처음 보는 투수였다. 변화량이 얼마나 될지는 예측하기 힘들었다.

살짝 들어 올린 왼발을 강하게 내디뎠다.

한층 강력해진 하체가 그 동작을 단단하게 받아냈다. 상체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단단한 코어가 막대한 전진 에너지를 회전에너지로 무사히 전환했다. 5개월 전과 비교해 타격에서 한층 더 강력해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더 강해지지 않았어도 괜찮았다. 나의 타격은 이미 고교레벨을 아득하게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딱!!!

스윗스팟에서 아주 살짝 벗어난 방망이의 끝. 하지만 움켜쥔 방망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70구가 넘는 공을 던졌음에도 아귀힘은 아직 충분했다.

높게 솟은 타구.

더 볼 것도 없었다.

3점 홈런.

대회 첫 홈런포였다.

***

“그래서 김 과장이 판단하기에는 좀 어떤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 하는 선수입니다. 특히 발전 속도가 정말 터무니없는 수준입니다. 작년에 판단하기로는 타격이야 당장 프로 1군 무대에 오더라도 상위 타순에 설 만했지만, 피칭은 좀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이야 빠르지만 컨트롤도 그렇고, 좀 너무 정직한 감이 있었거든요.”

그래 분명 그랬었다.

하지만 오늘은 완전히 달랐다. 김 과장이 말을 이어갔다.

“물론 고작 오늘 한 경기로 판단하기에는 많이 이르긴 합니다만, 이런 발전 속도라면······. 쓸만한 변화구 하나 정도만 장착한다면 당장 필승조, 경기 운영이랑 체력만 검증되면 하위 로테이션 선발로도 써먹을 만할 겁니다.”

“그 정도라고?”

전화를 끊은 마린스의 단장 전상익이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벌써 3년째 매년 겨울 선수의 연봉 협상을 할 때마다 얼굴을 맞대왔던 어느 변호사의 이야기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제가 제임스 코퍼레이션 쪽에 조금 아는 친구가 있는데, 최수원 선수가 포스팅 시스템이 개정되지 않으면 그대로 미국에 진출할 생각이 있는 것 같던데요?’

작년 그 장대한 병림픽에서 꼴찌를 했음에도 비교적 욕을 덜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최수원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만약 그를 놓친다면? 심지어 녀석이 미국에 가서 순식간에 날아다닌다면?

실로 끔찍한 상상이었다.

그가 곧바로 책상 위의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삐

“어, 난데 지금 당장 총재님 좀 연결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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