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끝의 시작(5)
미국 스포츠에서 2월은 NFL의 결승전인 슈퍼볼. 그리고 3월은 3월의 광란이라는 대학 농구의 계절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 3월은 야구를 기다려온 모든 야구팬들을 위한 시범 경기의 계절이었다.
“미친······. 야, 올해 진짜 뒤졌다.”
“아니, 넌 뭐 매년 이맘때쯤만 되면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어차피 한 달만 지나면 또 시무룩해질 거면서.”
“이번에는 다르거든?”
“어, 그 소리는 작년에도 했고, 재작년에도 했어.”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올해 역시도 봄의 마린스는 강력했다.
“봄린스는 솔직히 이쯤 되면 과학 아니냐? 내가 볼 땐 이거 부산은행의 음모임. 봄에 기대심리 부추겨서 적금 졸라 들게 만들고 이자율 짜게 주는 거지. 대국민 이자 사기극.”
“야!! 이번에는 진짜 다르거든? 백하민 못 봤냐? 구속 153km/h까지 나오는 거? 지금 갤에서 금테 안경 조공하고 난리 났거든?”
“아, 그놈의 안경 에이스는 진짜. 에이스 팔 갈이 역사 그만할 때도 안 됐냐? 거기다가 백하민은 얼굴이 포인트인데 대체 안경을 왜 씌운다는 거야. 눈도 안 나쁜 애한테. 그것도 그 촌스러운 안경을.”
***
“야, 청소 똑바로 못하냐?”
“너나 좀 똑바로 하지? 네 자리가 제일 더럽거든? 그리고 선배 자리 치우는 건 같이 해야하는 거 아니냐?”
“야, 나 어제 공 던졌잖아. 원래 선발 투수라는건 섬세한 케어가 필요하거든? 아, 하긴 주니어부 출신이라서 그런 거 잘 모르나?”
“야!! 내가 모르긴 뭘 몰라. 졸라 어이 없네?”
“알면 좀 치워라. 어? 내일이 선배 들어오는 날인 거 모르냐?”
백석중 출신의 고한결이 주지민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빌어먹을.’
주지민이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뺨이 부르르 떨릴 만큼 화가 났지만 움켜쥔 주먹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어찌 됐건 고한결은 중학 야구 때부터 제법 이름을 날렸던 투수로 이제 막 입학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의 두세 번째를 다투는 선발 투수였다.
게다가 비록 한 학기라지만 인근 원광중에서 학교를 다녔던 터라 원광중을 졸업하고 중앙고에 다니고 있는 2, 3학년 선배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중학 야구가 아닌 주니어 클럽에서 야구를 했던 주지민 자신과는 팀 내 입지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네 자리는 네가 치우라고.”
“새끼, 어차피 할 거면서 앙탈 부리기는. 야, 가는 길에 이 쓰레기도 좀 버려주고. 내가 어제 공을 던져서 무거운 거 들고 다니기가 좀 그렇네?”
쓰레기 봉투 두 개를 양쪽에 들고 기숙사 뒤편으로 향했다. 저 멀리에 오래전에 세워졌지만,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쓰레기 소각장이 보였다.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 보면 야구부인 거 같은데? 맞지? 못 보던 얼굴인데 신입생이야? 체격이 괜찮은데? 투수인가?”
“최······, 최, 최, 최수원 선배님?”
“야구부 맞네. 쓰레기 버리러 가는 거야?”
“네, 네!! 저 투수, 투수 맞습니다!!”
“그래, 고생하고. 내일 보자.”
많이 망설였었다.
야구를 앞으로 계속 해야 할까? 아니, 계속 한다고 해서 가능성이 있기는 할까? 아니, 그보다 야구를 계속 할 수 있긴 한 것일까?
물론 지금은 망설이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에 서있다는 것 자체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으니까.
쌀쌀한 날씨.
주지민이 빠르게 쓰레기봉투를 내려놓고 다시 기숙사로 향했다.
***
“선배님 오셨습니까!! 내일 오신다고 들어서 아직 정리가 좀 덜 됐는데······. 아!! 짐은 이리 주십쇼. 제가 들겠습니다.”
“어, 그래, 네가 그러니까······.”
“신입생 고! 한! 결! 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그래, 한결이. 쪼유한테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최근에 많이 늘었다던데?”
“네!! 모두 양세준 코치님의 지도와 선배님들의 배려 덕분입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농축된 사내의 냄새? 환기를 아무리 시키고 페브리즈를 아무리 뿌려도 사라지지 않는 냄새가 기숙사 건물 전체에 배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 나름대로 냄새를 없애보겠다는 의지였는지 타들어간 인센스 스틱의 흔적이며 디퓨저에도 스틱이 다섯 개나 꽂혀 있었지만 소용 없었다.
“야야, 정리는 하지 말고. 이 침대랑 농을 내가 쓰면 되는 건가?”
“아뇨!! 편하게 저 시키셔도 됩니다. 그리고 자리는 혹시 다른 곳이 더 편하시면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냐, 진짜 누가 내 짐 풀고 그러는 거 좀 싫어서 그래. 그나저나 재철이는?”
“재철 선배는 지금 잠시 실내 연습장 갔습니다. 지금 가서 불러 올까요?”
“아냐, 그럴 필요는 없고. 그러면 이 방은 재철이랑 너랑 나랑 또 누가 쓰는 거지?”
“아!! 주지민이라고 신입생 투수 하나 있습니다. 주니어 출신인데 이번에 입부 시험 보고 들어왔습니다.”
“그래? 주니어 출신 애가 들어왔어?”
주니어라니. 흔치 않은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아마야구는 크게 두 갈래로 볼 수 있다.
프로 선수를 지망하는 학원 야구와 취미로 즐기는 리틀 야구가 그것이다.
사실 초등학교 레벨에서는 학원 야구를 하나 리틀 야구를 하나 크게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중학 레벨은 좀 다르다. 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했건 리틀 야구에서 야구를 시작했건 재능이 좀 있으면 자연스럽게 중학교 야구부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당연한 일이다. 학교에서 수업받을 거 다 받고 방과 후에 하는 야구로 실력이 늘어봐야 얼마나 늘겠는가. 결국 리틀 야구 나아가 주니어 야구는 취미의 영역일 수밖에 없었다.
“신기하네. 주니어 하던 애가 고교야구를 다 오고. 실력은 좀 어때?”
“그냥 딱 주니어 하던 애들 수준입니다.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
“네, 주니어가 다 그렇죠. 뭐. 그보다 선배님, 미국에서는 피칭 랩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이야기 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그냥 뭐. 찬찬히. 어차피 앞으로 1년은 같이 생활해야 하는데 시간은 많잖아.”
“아,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에 팬이라서.”“아냐, 아무튼 짐은 그대로 놔두고 쪼유 방은 그대로지? 걘 지금 방에 있나? 아니면 실내 연습장?”
“지금이라면 실내 연습장에 있을 겁니다. 제가 가서 선배님 오셨다고 말씀드릴까요?”
“됐어. 그냥 내가 한 번 가볼게. 쉬고 있어.”
확실히 이전에 한 번 봤을 때도 느꼈듯이 애가 좀 여우 같은 구석이 있지만, 싹싹하긴 싹싹하다.
문을 열고 실내 연습장으로 가려는 찰나, 아까 쓰레기를 들고나오던 녀석을 또 마주쳤다.
“어? 너는?”
“주······, 주지민입니다 선배님!!”
“주지민? 아, 네가 나랑 같은 방 쓰게 된 신입생이구나. 주니어 출신이라는.”
“네!!”
“그래, 앞으로 1년 잘 부탁한다. 아, 방에 내 짐은 건드리지 말고.”
“네? 아, 네, 네!! 알겠습니다.”
밝은 데서 다시 봐도 확실히 덩치는 나쁘지 않았다. 성격은 조금 답답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지만 원래 이맘때 즈음에는 선배를 보면 위축되기 마련이니 특별히 이상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저 고한결이라는 녀석이 너무 지나치게 싹싹하다고 봐야겠지. 당장 나도 1년 선배였던 안병영에게 제대로 말도 못 하지 않았던가.
-퍼억!!!
-부웅!!!!!
피칭 네트에 야구공이 꽂히는 소리와 방망이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최수원?”
“어? 수원 선배?”
“선배님!!!”
녀석들이 문을 열자마자 나를 격하게 반겼다.
“야, 뭐야? 내일 오는 거 아니었어?”
“시차 적응이 안 돼서 그런가? 잠도 안 오고 어차피 내일 등교는 해야 하니까 그냥 좀 일찍 왔지.”
“감독님한테는?”
“어, 전화로 말씀드렸어. 그나저나 이 시간까지 훈련을 하는 거야? 너무 오버 트레이닝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이제 슬슬 끝내려던 차였어. 오늘 연습 경기 있었는데 거기 못 나간 애들 위주로 몸 좀 푸는 거지.”
“너도 연습 경기 못 나간 거야?”
“내가 못 나가면 공은 누가 받냐.”
“그런데?”
“그냥 나는 주장이잖아.”
고작 석 달.
서른다섯 아저씨의 눈에 열여덟의 야구 소년은 여전히 앳돼 보였다. 하지만 리더의 묵직함이랄까? 그 앳됨 얼굴 위에는 이전에는 없던 약간의 묵직함이 느껴졌다.
“얘들아, 그러면 오늘 훈련은 여기서 끝내자.”
“네!!”
2학년 애들이 1학년을 데리고 연습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우리는 먼저 씻는다. 수원아, 이따가 보자.”
“어.”
티몬과 품바를 비롯한 3학년들이 먼저 자리를 떴다.
조유진은 여전히 실내 연습장에 남아 아이들을 지켜봤다.
“쪼유, 넌 안 가냐?”
“어? 난 애들 치우는 거 확인하려고.”
“잠깐만, 너 설마 지금까지 매일 이렇게 남아 있었던 거야?”
“당연하지. 난 주장이잖아.”
어······, 음······.
내가 조유진의 팔을 슬쩍 잡아끌었다.
“야, 책임감도 좋은데 그건 에바야. 애들 부담스럽게 그게 뭐 하는 짓이냐. 너 인마 생각해봐. 네가 애들 데리고 뒷정리하는데 안병영이 남아서 지켜보고 있다고.”
“야, 그건 아니지. 무슨 나를 병영 선배랑 비교하고 있냐. 으, 말만 들어도 끔찍하네.”
“쟤들한테는 그게 그거지. 대충 가라로 좀 정리하고 할 것도 너 있으니까 FM으로 해야 하잖아.”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엄청 그래.”
확실히 봤다. 내가 쪼유를 잡아 끌 때 나를 바라보던 2학년 녀석들의 시선이 감사로 가득하던 것을.
내가 다년간 프로 생활을 경험해본 결과 느낀 점은, 나를 너무 신경 안 써주는 선배도 좀 그렇지만, 너무 귀찮을 만큼 이것저것 신경 써주는 선배도 좀 그렇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언제나 적당히가 최고다.
물론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전지 훈련은 좀 어땠냐? 보니까 못 보던 애들도 많던데. 아, 그리고 그 한결이랑 유준이는 좀 어땠어?”
“둘 다 괜찮더라. 고한결이 좀 까불거리기는 하는데 그래도 절묘하게 선은 잘 지키고, 박유준은 그냥 훈련 열심히 하고 있고.”
“재철이랑 2학년 투수 애들은?”
2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매우 큰 기대를 받던 유망주였다. 뭐랄까? 채치수도 송태섭도 없던 북산에 떨어진 서태웅이었달까? 과장이 아니다. 당시 나는 2학년과 3학년을 모두 통틀어도 가장 빠른 공을 던졌었다.
당장 프로만 하더라도 트레이드나 FA로 자기 포지션 위협하는 선수 들어오면 날이 선다. 하물며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한 고등학생이라면 어땠을까? 물론 그때와 달리 지금은 팀에 나라는 절대적인 에이스가 있긴 하지만, 2학년에게는 갑자기 들어온 자기보다 공 잘 던지는 1학년들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힘들어 죽을라고 그러지. 자기들도 후배한테 후달리는 모습 보일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네가 전화로 걱정하던 것처럼 막 음습하게 괴롭히고 그런 건 없는 것 같더라.”
“그래? 다행이네.”
“걔들도 보고 자란 게 있잖냐.”
“보고 자란 거?”
“병영 선배랑 진우 선배. 걔들도 둘 중 어느 게 더 선배다운지 잘 봤잖냐.”
“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반면교사라 이건가?
확실히 안병영은 반면교사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기는 했다.
“아, 그리고 최수원.”
“어?”
“고맙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 기숙사 들어와 줘서 고맙다고.”
“뭐래, 너 때문에 들어온 거 아니거든? 그냥 통학하는데 버스 타기 귀찮아서 온 거거든?”
***
뉴월드 빅마트배 전국 고교야구대회는 예선이 없다. 전국 90여 개 고등학교 팀이 모두 참가하여 18일 동안 토너먼트를 벌인다. 시드를 받을 경우 여섯 경기, 그렇지 못하면 총 일곱 경기를 연달아 승리해야 하는 가혹한 일정이다. 너무 당연히 위로 올라갈수록 팀의 숫자가 줄어드는 만큼 경기의 텀은 촘촘해진다.
그리고 이번 대회 역시 중앙고의 뽑기운은 여전했는지, 간발의 차이로 시드를 받지 못했다.
“이번에도 운이 없나 싶었는데 이건 오히려 좋은데요?”
“그렇군.”
지난 하반기 왕중왕전과 전국체전.
분명 중앙고는 매우 운이 없었다. 하지만 운의 총량이라는 것이 정말로 실재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번 대회는 조금 달랐다.
부전승이 예정된 시드 고교가 인원수 부족을 이유로 불참을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중앙고는 2차전이나 다름없는 1차전을 끝내고 꽤 긴 휴식을 갖게 된 셈이었다.
그리하여 그 첫 번째 경기.
105개의 투구수를 꽉 채우더라도 무조건 다음 경기에 또 올라올 수 있는 넉넉한 일정을 등에 업고 최수원이 마운드에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