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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78화 (78/305)

78화. 끝의 시작(4)

사실 알렉산더 맥도웰의 이야기 대부분은 들어볼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하지만 한 가지.

‘야구의 신이 내려준 사명’이라는 말 만큼은 나에게 콕 틀어박혔다.

어쩌면 정말로 녀석의 말처럼 약물로 더럽혀진 야구의 대기록들을 경신하라는 목적을 위해서 테드 윌리엄스 이후 가장 위대한 타자 소리 듣던 나를 다시 열일곱의 어린 몸으로 돌려보낸 것 아닐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미친 소리다. 아니, 한 시즌 73홈런이라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린가? 내가 60홈런 도전하던 당시 언론에서 워낙에 떠들어 대서 어렴풋이 기억 나는데 그 양반 73홈런 친 시즌에 볼넷만 180개가량을 받았으니 타수가 480타수도 안 됐을 거다.

타율이 3할만 나와도 좋은 타자 소리 듣는 게 이 바닥이다. 근데 이 양반은 그 안타 가운데 거의 절반을 홈런으로 때렸다는 이야기다. 그냥 미친 거다.

야구의 신이 아무리 대단한 걸 바랬다고 해도 그걸 갱신하는 걸 바라지는 않았을 거다. 솔직히 그 정도 시키려면 ‘쳐내는 모든 타구의 속도가 10마일 상승합니다.’ 같은 어디 게임에나 나올법한 스킬 정도는 줘야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다만 한 가지.

야구의 인기라는 이야기는 조금 솔깃하긴 했다. 솔직히 한국을 기준으로 하면 나는 슈퍼스타였다.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야구였고 나는 한국이 배출한 역대 최고의 야구 스타였으니까.

다만 이게 내가 활동하는 미국 본토를 기준으로도 그랬는가를 묻는다면 글쎄······. 물론 나는 한 번도 메이저리그 최정상, 그러니까 MVP를 밟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위대한 2등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세상은 1등만 기억한다고 하지만 2등도 많이 하면 사람들이 기억해주더라고요.’

그거랑 비슷한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인터넷에서 ‘203x년에 MVP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2등은 최수원이었을 거다.’ 같은 밈으로 제법 유명하기도 했다. 물론 그래봤자 NFL은 물론 NBA나 심지어 MLS의 슈퍼스타보다도 SNS 팔로워가 더 적었지만 말이다.

“스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아니, 그냥 뭐 이런 거, 저런 거 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나저나 워싱턴 씨는 야구 언제부터 좋아하신 겁니까?”

“글쎄요······. 아주 어릴 적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네요. 다만 어릴 적에 형이랑 서로 마크 맥과이어를 하겠다고 싸웠던 기억은 있습니다. 그러다가 배리 본즈가 나온 이후에는 서로 마크 맥과이어를 하라고 싸웠었죠.”

“약물 사건 이후로는 좀 어떠셨습니까?”

“아무래도 좀 그랬죠. 좋아하고 응원하던 슈퍼 히어로가 사실은 빌런이었다. 뭐 그런 느낌? 아마 형은 그때 배리 본즈 굿즈들 전부 불태웠을 겁니다.”

워싱턴 형제가 야구를 사랑한다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당초 아이비리그를 나와서 글로벌 유통 기업에서 시니어 다음 단계까지 나갔던 사람이다. 한국식으로 따지자면 사십대 초반에 부장급까지 올랐던 인재들이라는 의미다. 그런 사람들이 월세를 걱정해가면서까지 야구에 집착하는 것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아, 그래도 한 가지는 다행이었죠.”

“다행이었다니 그게 뭡니까?”

“배리 본즈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우승시키지는 못했잖습니까. 개인적으로 정말 신의 도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배리 본즈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우승시키지 못했던 게 신의 도움이었다고요?”

“네, 약을 빨고 야구의 신을 뛰어넘었던 배리 본즈조차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 수 없었다는 아이러니. 그리고 고작 몇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장발의 에이스와 가을의 남자가 만나 마침내 56년 만의 우승을 차지한 스토리까지. 바로 그때였을 겁니다. 형도, 저도 투수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요.”

“아······. 그러면 설마?”

“네, 형이 하민이 방문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사실 팀 린스컴이야말로 저희가 투수에게 관심을 두게 된 가장 큰 이유였고, 그의 영 좋지 못했던 말년이 저희가 언젠가 이런 일을 시작하겠다 결심하게 된 이유였으니까요.”

“그렇군요. 역시 가끔 하민이 형이랑 통화하는 게 단순한 고객관리가 아니었군요.”

어쩐지, 윌리엄은 하민이 형이 함께 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단순히 돈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힘들 정도로 눈에 띄게 실망하는 태도를 보이기는 했었다.

“헌데 갑자기 저희가 야구를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대체 왜?”

“아뇨, 그냥 야구의 대중적인 인기에 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와서요.”

“야구의 대중적인 인기라면 요즘 꽤 괜찮아지지 않았나요? 화끈한 젊은 타자들도 많이 나온데다가 양키스도 많이 올라왔으니까요.”

“양키스요?”

“네, 아무래도 양키스에는 특별한 게 있으니까요. AMERICAN’S TEAM 아니겠습니까.”

미국의 팀.

NFL이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지금에 와서도 NFL최고의 인기 팀인 댈러스 카우보이스에게 내주지 않은 영광스러운 이름이다. 덕분에 혹자는 미국에서 야구의 인기가 다시 올라갈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데릭 지터의 후계자를 꼽기도 했다. 뭐, 전생의 나로서는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는 놈들이 영 아니꼬웠었지만 말이다.

“자, 이제 충분히 쉬었으면 다시 운동 시작하죠.”

지난 한 달간의 훈련으로 스트라이드 폭의 조정이 끝났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최근 KBO의 유행과는 크게 다른 형태였다. 최근 KBO는 스트라이드 폭을 좁히고 신체의 밸런스를 잡는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보통이라면 그랬겠죠. 하지만 최수원 선수의 균형감각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효과는 지난 전국체전만으로 충분히 증명됐다. 나는 대회를 치르는 동안 볼넷이라고는 고작 두 개밖에 내주지 않았다. 게다가 공을 끌고 나오는 거리가 더 길어진 만큼 타이밍에서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다시 3개월.

윌리엄은 나에게 디셉션을 요구했다.

“물론 굳이 고교 레벨에서는 필요 없는 부분입니다. 당장 고교야구를 폭발시키고 싶다면 이런 숨김 동작을 넣는 대신 변화구나 하나 더 장착하는 게 이득이겠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고교야구 제패 정도는 지금 스완 수준이면 충분합니다. 중요한 건 그 이후죠. 최고 98마일의 속구는 강력하지만, 빅리그에서 뛰기 위해서는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98마일짜리 속구가 진짜 강력할 수 있는 타이밍은 지금 들어올 공이 98마일짜리 속구일지 85마일짜리 체인지업일지 고민이 될 때죠. 그리고 그 첫 시작은 훌륭한 디셉션입니다.”

그것은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오른팔이 미세하게 안쪽으로 틀어졌습니다. 그렇게 하면 부상 위험이 있어요.”

“커맨드가 흔들리는군요. 아무래도 팔을 숨겼다가 나오는데 마음이 너무 급한 것 같습니다. 이론적으로 스완의 핸드 스피드는 충분합니다. 조급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디셉션을 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존재했다.

워싱턴 형제가 나에게 권유한 것은 기존 나의 폼에서 마지막 공을 던지는 자세를 살짝 수정한 형태였다.

“좋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지만 마찬가지로 조급합니다. 마지막에 충분히 공을 채지 못하고 있어요. 회전수가 200이나 떨어졌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시간은 충분해요. 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딱히 조급한 게 아니었다.

솔직히 본래 던지던 폼에서 뒤로 꾹 공을 누르는 느낌으로 있다가 갑자기 빠르게 팔을 휘두르는데 팔의 각도는 그대로 움직여야 하고 마지막에 공을 채는 것까지 모조리 신경 쓰라니. 심지어 아무 생각 없이 몸이 가는대로 하면 부상 위험이 있다고 또 뭐라고 그런다.

-하하하하하

“이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당연하지, 무슨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던 야구의 초천재 최수원이 야구로 고전하는 꼴이라니. 나는 네가 미국에 가서도 시키는 대로 그냥 쑥쑥 다 돼서 석 달까지도 필요 없었다. 뭐 그런 이야기 할 줄 알았는데, 이거 보니까 너도 사람은 사람이네.”

하민이 형이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했다.

“형은 좀 어떤데요. 보니까 윌리엄이랑 종종 통화하시는 것 같던데.”

“어, 근데 그렇게 오래 하지도 못해. 보통 훈련 끝나면 저녁인데 그러면 거기는 아직 너무 이른 아침이고, 시간 조금만 늦어지면 잠 들기 바빠서.”

“훈련 빡센가 봐요?”

“뭐, 훈련이 다 그렇고 그렇지.”

옛날부터 느꼈지만, 하민 형은 사람이 참 투명하다. 지금도 목소리만 들어도 훈련이 다 그렇고 그런 게 아니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형, 몸 관리 잘 해요. 우린 결국 몸이 재산이니까. 괜히 힘든데 억지로 하지 말고요. 부상 안 입는 게 최우선인 거 잘 알죠?”

“나도 다 알아. 너 뭐 윌리엄 씨가 시키기라도 한 거야? 안그래도 매일 들어서 귀에 딱지 앉을 지경인데 너도 같은 말을 하고 있네. 안 그래도 잘 먹고 잘 쉬고 운동 잘하고 있으니까 너나 잘하고 돌아와. 내년에는 나도 없고 우승 한 번 해야지.”

“어디 한 번 뿐입니까? 내년 전국대회는 아주 전부 다 휩쓸 생각입니다.”

“야야, 나 이제 아침 식사 시간 끝나간다. 이만 끊는다?”

“네.”

13시간의 시차.

한국의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이봐, 스완. 내가 지인들을 통해서 알아봤는데 포스팅이라는 제도가 있더군. 그걸 활용하면 1년만 뛰고도 바로 빅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것 같아. 어차피 마이너에서 뛰나 거기서 뛰나 그게 그거잖아. 그렇게만 하면 우리 메츠도 패널티가 끝나니까 너에게 500만 달러 정도는 계약금을 제시할 수 있을 거야. 물론 만족스러운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와 같은 팀에서 뛸 수 있는 건데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하잖아. 안 그래?”

“응, 안 그래.”

샌드위치가 괜찮아서 매일 아침을 해결하는 집 앞의 한 카페.

오늘도 출근 도장을 찍은 알렉산더 맥도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해주며 스마트 폰을 펼쳐 밤 사이 있었던 한국의 뉴스들을 대충 훑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도 해보지 않고 거절부터 하지 말고. 들어보니까 어차피 본래 드래프트 된 팀에서도 계약금을 받고 다시 한번 더 계약금을 받는 형태라고 하더만. 그 정도면 총액 기준으로 거의 나랑 비슷하지 않겠어?”

“응, 아니야. 그리고 가서 네 지인들 한테 난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고 우리나라의 리그는 NPB가 아니라 KBO라고도 좀 전해주겠니?”

“어? 어?”

점심에 먹을 샌드위치까지 야무지게 포장해서 피칭랩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미세한 자세의 교정.

다람쥐 챗바퀴 돌아가는 것 같은 일과가 반복됐다.

-짝!!

“그래!! 스완 좋았어!! 바로 그거야!!”

그런 시간이 약 두 달.

마침내 윌리엄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뼉을 두들겼다.

“자자, 한 번 더 해보자고.”

조금 전의 그 자세를 정확하게 기억했다.

묘하게 불편했지만, 윌리엄의 말에 따르자면 내가 불편한 것 이상으로 상대방은 더 불편해질거라는 바로 그 타이밍.

팔이 나오는 타이밍이 살짝 늦춰졌다.

약간의 부하가 더 걸렸지만 덕분에 정면에서 봤을 때, 오른손이 몸통에 완벽하게 가려졌다. 그리고 늦춰진 타이밍만큼 더 빠르게 움직이는 오른팔. 힘차게 뻗어 나온 손끝에서 야구공이 뽑혀 나갔다.

-퍼억!!

야구공이 연습용 네트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아, 잘했어!! 거의 비슷해. 이제 감을 좀 잡은 것 같네. 몇 개만 더 던져 보자.”

그러니까 약 두 달.

슬슬 윌리엄의 화법도 익숙해지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리고 내가 익숙해진 윌리엄의 화법에 따르자면 방금 말은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아주 그른 건 아니다.’ 정도였다.

그렇게 3개월이라는 시간이 쏜살처럼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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