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끝의 시작(2)
“어, 왔냐? 나랑은 구면이지?”
“네!! 유진 선배님.”
“그래, 이쪽은 수원이. 알지?”
“네!! 너튜브로 많이 봤습니다!! 최근에 157까지 던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여기 대답 씩씩하게 잘하는 놈이 고한결. 너처럼 되고 싶다더라. 그리고 이쪽에 좀 과묵한 애가 박유준.”
까까머리에 쌔까맣게 탄 피부. 아직 젖살도 다 빠지지 않은 전형적인 야구 소년들이었다. 물론 소년이라고 하기에 키는 좀 컸다. 185 전후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그에 비해서 둘 다 체격은 조금 왜소하다. 아직 성장기라 키가 자라는 속도에 다른 게 못 따라간다는 느낌이다.
“둘 다 중딩 치고는 공 제법 던지더라. 최고 구속이 한결이가 134, 유준이가 137이었지?”
“유준이는 얼마 전에 비공식으로 139까지 던졌습니다. 선배님!!”
“오. 그래? 유준이는 그새 구속이 더 늘었어? 근데 감독님이 당분간 공 던지는 거 금지라고 하지 않았냐?”
“그게······, 몸이 너무 근질거려서. 딱 몇 개만 던졌습니다. 죄송합니다.”
박유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묵직한 중저음.
“아냐. 아냐. 뭐 죄송할 필요까지는 없지. 근데 몸 생각하면 쉬라고 할 때 쉬는 게 좋아. 나중에 되면 지겹게 던져야 할 테니까.”
“네.”
흐음······.
실수일까?
“어? 빨리 왔네?”
때마침 세원 중학교에 선배들 응원 갔던 아이들이 돌아왔다.
“야, 니네 초콜릿 안 가져 간 거 어떻게 됐냐? 병영 선배가 제일 늦게 왔다면서. 아니, 왜 답톡을 안 해.”
“그냥 잘 넘어갔어. 감독님이랑 코치님은?”
“오늘 열 시에 훈련 시작이라고 하셨으니까 이제 조금 있으면 오시겠지. 어? 예비 신입생들이네? 야, 이세진, 네 후배 왔다.”
지금 일학년들 가운데 가장 실력이 좋은 이세진이 슬금슬금 걸어왔다. 중견수를 보던 품바 녀석이 우익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를 차지한 녀석으로 빠따는 경석이보다 시원찮은 대신 발이 빠르고 타구 판단도 괜찮다.
“스트레칭은 했어?”
“네, 날이 좀 추워서 미리 몸 데워놨습니다. 선배님.”
“그래, 거기 너, 그러니까······.”
이세진이 박유준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런 이세진에게 대답한 것은 박유준이 아닌 그 옆에 서 있던 고한결이었다.
“아, 저는 고한결, 얘는 박유준입니다.”
“그래, 유준이. 너도 스트레칭은 했어?”
“네.”
“그래?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몸이라도 움직이는 게 더 좋을 테니까 같이 몸이나 풀자. 너무 힘 빼지는 말고 좀 설렁설렁 해.”
이세진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와 조유진이 실내에 있는 연습장으로 향했다.
“좀 어때 보이냐?”
“글쎄, 뭐 곰이랑 여우?”
“최수원 니 눈에도 그렇게 보였냐?”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일걸?”
“하긴······. 거기서 유준이 구속 이야기한 거 좀 티 많이 나긴 했지?”
“어쩔 생각이냐. 주장?”
“한 번 이야기 하기는 해야겠지?”
“뭐냐? 나랑 안병영 트러블 때는 그냥 조용히 있는 게 정답이라더니?”
쪼유가 살짝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거 마음에 담아뒀냐?”
“어, 엄청.”
“그러면 이따 햄버거 하나 사줄까?”
“쉑쉑?”
“야!! 내가 재벌도 아니고. 지금 버거킹 와퍼 행사 하더라. 대신 감튀도 사줄게.”
“됐어. 근데 뭐 때문에 마음 바뀐거냐? 주장 달아서?”
“뭐 그것도 있고. 그냥 긁어 부스럼 안 만드는 게 최선이다. 뭐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까 내 생각이 틀렸나 싶더라고.”
“병영 선배?”
“어. 난 그 선배는 아무리 말해도 안 통하는 사람일 거라고 확신했거든. 왜 그런 사람 있잖아. 잘못했을 때 사과하는 걸 싸움에 지는 거라고 생각해서 자기보다 아랫사람이다 싶으면 절대 사과 안 하는 그런 사람.”
“병영 선배가 좀 그런 사람이긴 하지.”
솔직히 안병영이 나에게 반성문 쓰고 무릎 꿇고 한 것도 결국 그 사건 자체의 자잘못이 아닌 나의 ‘실력’에 굴복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 안병영이 보여준 태도는 분명 달랐다.
물론 그 달라진 행동이 그의 과거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 있을 그의 행동을 바라보는 나의 색안경이 조금은 옅어지지 않을까?
“근데 네가 한 번 들이박고 사람이 바뀌었잖아. 그거 보고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어쩌면 지레짐작으로 그런 사람이라고 포기하고 내버려 뒀던 게 잘못된 게 아니었을까. 만약 병영 선배가 진즉에 바뀌었더라면, 그래서 팀 분위기가 조금 달랐더라면 어쩌면 우린 더 좋은 성적표를 받아들 수 있지도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
“어······. 음······. 글쎄다.”
“아무튼 겸사겸사. 난 주장이기도 하니까 이전처럼 방관하는 것도 좀 웃기잖아. 게다가 걔들은 선배도 아니고 후배니까.”
“그래. 파이팅해라. 주장.”
“아······. 뭔가 강 건너 불구경하는 그 말투 좀 킹받네.”
***
-헉헉
고한결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괴물들이었다.
솔직히 중앙고의 투수진은 최수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별 볼 일 없다고 알고 있었다. 경쟁자는 함께 투수를 지망하는 박유준 정도다.
폴앤폴.
1루와 3루 사이를 왕복하는 달리기. 평소에도 자주 해왔던 운동이었다. 하지만 강도가 달랐다. 약 210m. 한번 왕복하는데 30초에서 맥시멈 35초 페이스. 그리고 약 30초 정도의 휴식을 하고 다시 달려 나가는 것의 반복이었다.
처음 두세 번까지는 할 만했다. 하지만 네 번 다섯 번으로 넘어갈 때는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아예 한 조씩 뒤로 밀려가면서 달리기를 뛰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세트.
“너희들은 그냥 이번 한 번 통으로 쉬어라. 자, 출발.”
굴욕적이었다.
보통 어린 시절 야구를 시작할 때 투수를 하는 선수는 덩치 좋고 운동 능력도 좋은 선수가 투수를 하기 마련이다. 고한결 역시 마찬가지였다. 팀에서 뒤처진 적이 없었다. 그것은 리틀야구에서 중학 야구로 올라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1년 위의 선배들보다 더 나은 모습도 종종 보여줬었다.
‘짜증나······.’
숨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함과 동시에 출발했던 선배들이 반환점을 돌아왔다.
17초.
한차례 쉬었다 하라는 코치님의 이야기가 고마웠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신의 옆에 박유준이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다섯 번째 세트에서는 자신이 미묘하게 몇 발자국 더 빨랐다는 점도 그의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됐다.
선배들이 거의 다 도착했다.
다음 조 출발.
한 세트를 통으로 거르라고 했으니 아마도 지금 돌아온 선배들과 같이 출발하겠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호흡을 고르고 힘이 빠져가는 다리를 슬쩍 풀어주었다.
‘어?’
가장 먼저 달려 나가는 사람은 역시 최수원이었다.
긴 팔다리로 성큼성큼 달려가는 그 모습은 과연 초고교급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고한결의 시선이 머문 곳은 최수원이 아니었다.
박유준.
바로 직전까지 옆에서 같이 거친 숨을 몰아쉬던 녀석이 다짜고짜 달려나갔다.
코치님이 한번 쉬라고 그랬는데······.
고민은 짧았다.
아니, 정확히는 고민 따윈 하지 않았다. 경쟁자가 튀어 나가는데 자리에 앉아 있는다? 고한결의 사전에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몇 걸음 늦은 출발.
고한결이 이를 악물었다. 선배들에게 뒤처지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박유준에게 뒤처질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박유준을 따라잡았다. 저 먼 곳 최수원이 벌써 3루쪽 폴을 톡 찍고 돌아오고 있었다.
빠르다.
그와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어째서일까? 고한결은 그가 웃고 있다고 느꼈다.
열 세트.
비록 1조로 출발해서 2조까지 전부 뛰고 따로 뛰는 굴욕을 경험했지만 고한결과 박유준은 열세트를 모두 무사히 끝냈다.
***
“재작년에 수원이 이후로 처음이군.”
“그 녀석이야 워낙에 난 놈이잖습니까. 애초에 그 녀석한테는 한 번 쉬라는 말도 안했으니까요.”
“하긴······. 뭐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안병영이 이후로 처음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한결이는 조금 아슬아슬했습니다만 그래도 승부욕이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힘든 와중에도 유준이한테는 지기 싫다는 욕심으로 끝까지 따라오더군요. 유준이는······.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맘때 애들 생각이야 뻔하지. 고한결이 박유준에게 지기 싫어서 이 악물고 달렸다면, 박유준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보니까 달리기 자체는 고한결이 조금 빠른 것 같던데 말이야.”
“아!!”
박 감독이 씨익 웃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시너지가 날지도 모르겠어.”
***
결국 하민이 형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지 못했다.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단장은 약간이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감독부터 해서 코치진 쪽의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다. 뭐라더라? 뜻은 가상하지만 특혜를 허용할 수 없다나?
“아니, 자기가 알아서 자기 돈 쓰면서 훈련하겠다는데 그게 특혜라고?”
“뭐, 단독행동은 단독행동이니까. 게다가 이제 막 입단하는 신입이잖아. 팀 분위기도 익히고 해야지.”
“단독행동은 무슨!! 그런 말 할거면 유망주를 좀 제대로 키워내기나 하던지!!”
박은진이 하민이형 이야기에 살짝 흥분했다. 내가 보기에는 마린스의 2군 상황이나 하민이형의 상황에 분노했다기보다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인 피닉스와 마린스가 너무 겹쳐보여서 나온 분노인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너 이렇게 통화하는 건 괜찮아? 너네 회사 이번에 또 데뷔조인지 뭐인지 꾸려진다고 엄청 바쁘다며.”
“아냐, 이 시간대에 잠깐 짬내서 통화하는 정도는 괜찮아. 점심시간은 한 시간 주는데, 주는 음식량은 3분 컷이라서. 그보다 귀국하고 얼굴 한 번도 못 봤는데 출국이 벌써 내일이라고?”
“어.”
“이번에는 3개월?”
“아마 그쯤?”
“그러면 개학식에도 안 나오겠네?”
“응, 뉴월드 빅마트 배 전국대회 일정 맞춰서 돌아오려고.”
“근데 수원이 너 성적 과락 받으면 대회 출전 못 하는 거 아니야? 성적은 괜찮아? 이번엔 나머지 공부나 재시험 안 보고 바로 출국해도 돼?”
“가채점 해보니까 괜찮더라.”
“수학도?”
“당연하지. 중간고사 때 교훈을 얻어서 이번에는 좀 잘 봤어.”
“교훈이라고?”
“어, 확률상 3번으로 다 찍고 주관식은 다 0으로 찍으면 25점은 나오겠더라고.”
우리 학교의 평균 점수는 60점에서 70점 사이. 그 말은 24점에서 28점만 받으면 기준은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몇 점 나왔는데?”
“가채점 결과로는 37점. 수학쌤이 숫자 3을 좀 좋아하시는 듯.”
“······.”
박은진의 묘한 침묵.
나는 그 침묵을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었다.
“은진아······.”
“어?”
“다음부터는 너도 그냥 3번으로 찍어.”
“응······.”
***
미국은 한국과 달리 9월 2학기 제도로 6월에 모든 학기가 끝난다. 그 말인즉 7월에 드래프트 된 자원들은 이미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 혹은 학기를 끝낸 자원들로 곧바로 교육리그나 루키 리그 등에 투입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1210만 달러의 주인공 알렉산더 맥도웰 역시 마찬가지로 그는 WBSC U-18 Baseball World Cup 경기가 끝난 직후 곧바로 이곳 애리조나 가을 리그에서 뛰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 리그에서도 세 번째로 어린 나이였는데, 국제 유망주가 아닌 정상적인 드래프트를 치른 선수 가운데서는 가장 어린 나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학교를 중퇴하고 전문대에 입학하는 꼼수로 드래프트에 응시한 덕분에 그의 나이는 이제 고작 만17세. 정상적이라면 아직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딱!!
시원한 스윙.
방망이에 두들겨 맞은 타구가 담장을 아득하게 넘어갔다. 30개 구단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들만이 모인 이곳에서도 그의 재능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시즌 일곱 번째 홈런.
이번 시즌 가장 적은 홈런을 친 ‘팀’과 타이기록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그리 기뻐보이지 않았다.
‘최수원.’
조만간 메이저리그에서 만날 것이 확실한 인생의 라이벌.
결승전은 너무나도 불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멀지 않았다. 녀석의 재능이라면 메이저에 콜업되는 것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일 테니까. 비록 자신이 1년 먼저 프로 생활을 시작하긴 했지만 어쩌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신인왕은 MVP와 달리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 가질 수 있잖아?’
알렉산더 맥도웰.
그의 중2병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