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75화 (75/305)

75화. 끝의 시작(1)

본래의 역사에서 보자면 지금으로부터 9년 후, 그러니까 2034년 가을 한미선수협정개정 때 포스팅 제도가 변경된다. 내가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느냐면 2034년이 바로 내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해이기 때문이다.

팀이 한참 시즌 막판 순위 경쟁 중이었고, 나 개인적으로는 각종 타자 타이틀 경쟁에 MVP 후보로까지 오르락내리락하던 때에 터졌던 그 뉴스에 잠시 벙쪘던 기억이 있다. 덕분에 생각이 많아져서 그다음 날 경기를 조금 망치기도 했었고.

당시에는 내가 워낙에 1년 차부터 잘했던 터라 솔직히 좀 억울한 마음이 있었다. 국제 아마추어 규약이고 뭐고 몰랐던 덕분이다.

아무튼 간 이후에 나왔던 협상 과정의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보면 사실 2026년이나 30년에 관련 규약이 개정되지 않았던 것은 딱히 MLB에서 그걸 요구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그들이 2034년 개정에 그걸 요구했던 것은 역시 나의 활약 때문이었고.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역사가 조금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

“이게 가능하겠어? MLB 사무국에서 협약할 때 조건 내밀게 하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KBO 입장에서는 자국 선수 유출이잖아.”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반?”

“네, 사실 이번에 국제 유망주가 25세 미만, 여섯 시즌의 프로활동으로 변경된 이상, KBO에서 유지 중인 7년의 포스팅 규정은 조금은 유명무실해진 경향이 있으니까요.”

결국 선수가 해외로 나오는 데는 그만한 이득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25세 미만 6년 이하의 프로활동을 한 선수가 MLB에 진출하는 것은 금전적인 부분에서 요인이 매우 떨어진다.

만약에 그런 선수가 있다면 오타니 쇼헤이와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할 것인데, 보통 그런 마음을 품은 선수라면 애당초 곧바로 미국에 직행하지, 금전이나 가능성 편의 등을 따져가며 자국에 남지 않는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KBO가 바보도 아니고 규정 자체가 자국 리그 보호를 위한 규정인데 그걸 자기 손으로 내줄 리가 없잖아.”

“그래서 일차적으로 KBO의 현행 포스팅 제도가 자국 리그 보호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는 점을 홍보할 생각입니다.”

“자국 리그 보호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고?”

“네.”

현행 국제유망주 계약의 가장 큰 피해자로 꼽히는 선수는 오타니 쇼헤이다.

그는 이전 규정 대로였다면 포스팅에 FA자격으로 메이저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MLB에 진출하기로 했던 2017년의 가을. 하필 국제유망주의 기준이 25세 이상으로 변경됐고 그 결과 오타니 쇼헤이는 일억 달러 이상의 연봉 총액 대신 최저 연봉을 받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야만 했다.

“만약 돈을 원하는 선수라면 애초에 자국 리그에 남을 겁니다. 거기서 7년 뛰고 미국에 진출하는 게 훨씬 큰돈이 되니까요. 그게 아니라 메이저리그 자체를 꿈꾸는 선수라면 무조건 미국으로 건너오겠죠. KBO에서는 1년도 뛰지 않고요. 하지만 만약 포스팅 규정이 개정된다면? 자국에 있는 더블A 수준의 리그에서 안정적으로 연봉을 받으며 기량을 숙성시키고 언제라도 MLB에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본인의 기량이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면 그대로 주저앉아도 괜찮은 안정적인 리그에서요. 선수 입장에서는 MLB 직행을 택할 이유가 그만큼 줄어드는 거죠.”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제임스는 벤자민 팔머의 이야기에 커다란 허점이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늦게 터지는 선수라면? 만약 2군을 전전하다가 25세, 26세쯤에 터진 선수가 MLB에 가겠다고 한다면 구단 입장에서, 그리고 KBO 전체를 봤을 때는 손해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안 보내면 그만이죠. 어차피 포스팅의 권리는 구단이 갖고 있잖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건 구단이 항상 리그 전체의 이득을 위해 움직일 때나 맞는 이야기지. 구단에는 합리적인 것이 리그 전체에 항상 이득이 되는 건 아니잖나. 예컨대 구단 하나가 계속 빅리그에 판매하고 하위권을 유지하면서 좋은 유망주만 끌어들일 수도 있지. 만약 이런 이유라면 KBO 협회 차원에서 반대를 할 수도 있어.”

“아······.”

“거기까진 생각을 못 해봤나 보군.”

“그러니까······.”

“진행시켜.”

“네?”

방금 전까지 반대 의견만 내놓더니 갑자기 진행하라고?

“만약 정말로 그런 셀링 구단이 있다면 아주 적극적으로 이 포스팅 개정을 찬성하겠지. 어차피 협회야 구단주들의 입김을 벗어날 수 없을 거고. 여론만 따라준다면 구단주들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는 사안이야. 조앤이랑 척 붙여 줄 테니까 같이 한 번 머리 맞대고 보고서 다시 작성해서 제대로 올려봐. 리스크에 비해 리턴이 큰 사업이 될 것 같은데 안 할 이유가 없지. 아, 하는 김에 현지에 제휴할만한 에이전트도 좀 알아보고. 한국은 에이전트 법이 조금 까다로울 거야.”

“네, 네!! 알겠습니다.”

***

11월의 어느 날.

이상하게 추운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 두툼하게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거리였지만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그것은 마치 드래프트 날의 우리를 닮아 있었다.

“야, 최수원!! 여기야. 여기.”

“어.”

조유진을 비롯한 아이들이 뭔가 이것저것 잔뜩 챙겨 든 채 크게 손을 흔들었다.

학교는 학교였지만 우리 학교는 아니었다.

“일찍 왔네?”

“평소에 새벽 훈련을 이것보다 훨씬 일찍 하잖아. 경석이랑 다른 애들은?”

“세원중에 갔지. 거기서 시험 보는 선배들도 있으니까.”

“아, 맞다. 그랬지?”

수능.

보통의 학생이 태어나 맞이하는 가장 큰 이벤트.

이미 드래프트로 프로 구단에 뽑혀간 규혁 선배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하지만 규혁 선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선배가 오늘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수능을 쳐야만 했다.

교문 가까운 곳.

낡은 SUV 한 대가 멈춰 섰다. 익숙한 모양새였다.

“어? 저기 저거 진우 선배네 아버님 차 아니야?”

“뭐? 벌써? 아직 시험 시작까지 한 시간도 넘게 남았잖아.”

“야. 맞네. 맞아. 진우 선배네. 와, 저 선배는 시험도 일찍 나오는구나.”

차에서 내린 진우 선배는 고작 몇 달 못 봤을 뿐인데 인상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운동선수가 은퇴하면 몸이 불어나는 경우야 많다지만, 그래도 고작 삼 개월 만에 저만큼 불어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정말 앉아서 공부만 한 것 같다는 느낌이 확 전해졌다.

“오랜만이네.”

“선배님, 자자 일단 이것들부터 받으세요. 별 건 아니지만 저희가 준비한 것들입니다.”

초콜릿을 비롯한 각종 간식.

카페인이 포함되지 않은 음료.

우리가 어제 미리 준비했던 물건 한 세트를 진우 선배에게 건넸다.

“훈련하느라 바쁠 텐데 뭘 이런 것까지 다.”

“아닙니다. 진우 선배님 수능 대박 나서 꼭 2호선 타십쇼!!”

“그래, 고마워.”

굳이 긴 말은 섞지 않았다.

대충 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다른 수험생들에 비해 필요한 점수의 크기는 다를 것이다. 어쨌거나 진우 선배도 체육 특기자 전형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 하지만 필요한 점수가 다르다고 그 긴장이 어찌 다를까.

진우 선배를 시작으로 선배들이 하나씩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와, 그래도 2년이나 같이 굴러서 그런가. 진짜 기분 이상하네.”

조유진이 감성에 젖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뭐, 그럴 만도 하다. 열일곱 청소년에게 2년은 매우 긴 시간이었으니까.

나야 17년 전에 2년 같이 뛰고 다시 돌아와서 고작 4개월 같이 뛴 서른다섯 살 아저씨였으니 그런 감성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진우 선배의 뒷모습만큼은 조금 선명했다.

그때 기숙사 문을 열고 나가던 모습이 은퇴하던 서른여덟의 노장 그렉 올슨의 뒷모습과 비슷했다면, 오늘 모습은 처음으로 프로 마운드에 올라가던 애송이들의 뒷모습과 비슷했다.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그라운드를 내려가던 그렉 올슨의 뒷모습보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그 애송이들의 뒷모습이 더 보기 좋았던 것처럼 진우 선배의 뒷모습 역시 기숙사 문을 열던 그 모습보다 오늘 시험장에 들어가는 저 펑퍼짐한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았다.

“어? 병영 선배?”

“오래간만이네.”

수능 시작까지 약 십 분 정도 남은 시간. 진우 선배와는 반대로 많이 여윈 얼굴의 안병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도 오늘 여기서 수능이에요?”

“어.”

조유진의 얼굴에 보기 드문 당황이 감돌았다.

‘야, 왜 선물 개수가 안 맞는 건데.’

‘아······, 세원중에 하나 더 간 것 같은데?’

‘미친!! 이거 누가 챙겼냐? 야, 1학년. 너희 똑바로 안 하냐? 아, 하필 마지막이 병영 선배냐. 이거 진짜 엿 됐네.’

아무래도 초콜릿을 비롯한 각종 주전부리를 하나 덜 챙겨 온 모양이었다.

“선배, 시험 늦겠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듣자 하니 동호대 노리신다면서요.”

“어, 거기 조병준 코치님이 유명해서.”

“수능 준비는 잘하셨어요?”

“4과목 중에서 잘 나온 과목 두 개 합계로 7등급 이내 들어가야 해서 좀 빡빡하기는 한데 사탐이랑 국어 최근 모의고사에서 두 번 연속으로 3등급이랑 4등급 나왔으니까. 망치지만 않으면 될 거야.”

“응원합니다. 꼭 붙으세요.”

“고맙다. 아, 근데 간식은?”

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간식을 챙기기로 했던 1학년 아이들의 등허리가 얼마나 축축해졌을지. 그들의 눈동자가 얼마나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고 있을지.

병영 선배가 아이들을 한 번 바라봤다.

막을까?

“아니다. 괜히 뭐 먹으면 집중하는 데 방해만 되고 그러지. 너희도 추운데 나와 있느라 고생했다. 나중에 훈련할 때 간식이라도 한 번 사갈 테니까 그때 보자. 어차피 내가 마지막일 거 같은데 다들 들어가 봐.”

어라?

이게 뭐지?

안병영은 분명 자신이 실수해도 남에게 전가해버리는 제법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형의 쓰레기였다. 그리고 그런 쓰레기들의 공통점은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안병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배려’였다. 내가 얼마나 놀랐냐면 정말로 순수하게 그냥 주전부리가 먹기 싫어서 가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다.

하지만 녀석이 지금까지 보여줬던 인성질을 생각해보면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더라도 애들이 실수한 것을 눈치채는 순간 내놓으라고 지랄을 함이 마땅했다. 게다가 한순간 애들을 스쳐 간 눈빛을 생각해보면 눈치를 못 챈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안병영이 후배들의 실수를 감싸준 것이었다.

맙소사.

안병영이 아이들에게 손을 한 번 흔들고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

‘야, 난 진짜 와. 날이 그렇게 추운데 등에 땀이 줄줄줄 흐르는데. 죽는 줄 알았다.’

‘아니, 솔직히 그럴만하지. 그것도 하필 병영 선배였잖냐. 진우 선배라면 또 몰라도.’

일학년 애들이 뒤에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쪼유, 병영 선배 좀 변한 것 같더라? 오늘 수능이라서 그런가?”

“에이, 그 선배 변하기는 진즉에 변하고 있었잖아. 그때 네가 한 번 들이박은 이후부터 쭉.”

“그래?”

하긴 나한테 야구 알려달라고 고개도 숙이고, 반성문도 쓰고······.

아니, 아니다.

내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차피 앞으로 볼 일도 없을 양반인데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십 년쯤 후에 내가 안병영 하면 떠올릴 모습이 ‘너, 송구 똑바로 못하냐?’가 아닌 ‘너희도 추운데 나와 있느라 고생했다.’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볼 예비 신입생 애들도 전지 훈련 같이 간다고 그랬지?”

“어, 우리 전국 대회 나갔던 게 크긴 컸는지 짠돌이 교장도 이번에 지원금 팍팍 쓴다고 그러더라.”

“잘됐네.”

“너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야, 봤잖아. 한 달 교정받고 피칭 확 좋아진 거. 워싱턴이 그러더라. 지금 나 기초라도 잡으려면 적어도 삼 개월은 붙들고 해야 한다고.”

“아니, 지금도 애들 죄다 패고 다니는데 무슨 기초를 잡는다고······.”

조유진의 얼굴에 아쉬움이 그득했다.

“뭐, 정 내가 보고 싶은 거면 미국 놀러 오든지. 어차피 숙소는 내가 빌린 아파트에서 있으면 되니까 비행기 티켓값만 내면 되잖아.”

“오······. 좋은 생각인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버스가 학교 앞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세원중학교가 조금 더 멀었던 만큼 거기에 응원을 나갔던 애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야, 저기 쟤들이냐?”

“어, 그런 듯.”

과연 강백호와 서태웅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 1, 2가 될 것인지.

“안녕하십니까!!”

두 녀석이 크게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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