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규칙(4)
공인(公人)
사실 정치인과 달리 연예인들이나 프로운동선수가 공인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사회 문화에 대한 영향력만 따져볼 때 연예인이나 프로운동선수는 충분히 공인이라고 불릴만한 위치인 것도 사실이다.
그 증거가 바로 연예계 운동계가 갖는 특수함일 것이다.
자본주의사회.
결국, 모든 것이 돈이라는 것으로 계량되는 이 사회에서 이쪽 업계는 조금 더 몽글몽글하고 특수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리고 김태근씨 역시 그런 존재 중 하나였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을 1217점. 4등을 기록했고 결과적으로 대형 로펌에 취업했다. 그리고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변호사로 근무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돈도 제대로 되지 않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으리라.
그는 KBO 에이전트 자격을 취득했고 실제로 한 선수를 대행하고 있었다. 비록 그 선수가 대형 FA와는 거리가 제법 먼 선수였지만 그는 자신의 시간 가운데 상당 부분을 쪼개 그 선수를 위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대형 로펌의 변호사라는 것이 얼마나 시간에 쫓기는 직업이며, 그 시간이 얼마나 큰 돈이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사실 그 선수가 벌어들이는 연봉 전체를 그가 받아도 손해일 정도였다.
“네? 제임스 코퍼레이션이요?”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그저 기업 관련 업무를 위해 연락이 온 것인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는 야구의 광팬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KBO에 한정된 것이었다. 물 건너 메이저리그. 심지어 선수도 아닌 선수를 대행하는 에이전트 회사까지 일일이 기억 할 수는 없었다.
“잠깐, 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선수가 KBO에서 1, 2년 정도 단기간 뛰고 곧바로 MLB로 진출할 방법을 찾고 싶으시다는 겁니까?”
전화기 너머로 뭐라 뭐라 이야기가 들려왔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듣던 그가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그 말에 반박했다.
“아니, 무슨 KBO가 무슨 멕시코나 도미니카에 교육리그도 아니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 네. 일본이요? 아니, 그거야 거기 사정이고······. 아, 네. 네. 그건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또한 이성적으로도 그게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가능성이 제로일까?’
자신도 모르게 든 생각에 김태근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고민해볼 시간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아, 네. 물론 시간이 없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저도 입장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네, 네. 나흘 내로 다시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형 축하해요. 뭐 역대 다섯 번째로 큰 계약금인가? 그렇다고 아주 난리던데요? 규찬이 형보다 2억이나 더 받았다면서요.”
“어, 그렇지 뭐.”
“뭡니까? 그 시큰둥한 반응은?”
“아니, 그 왜 네가 겨울에 같이 뉴욕 가서 다시 배워보자고 그랬잖아. 그게 문제가 좀 생겨서.”
“왜요? 어차피 계약금도 두둑하게 받았으니 3개월 정도 다녀오면 괜찮지 않아요?”
백하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그게 10월에 바로 합류해서 2군 훈련장에서 훈련을 받아야 할 것 같아. 최정식 코치님이라고 2군 투수 코치님이 있는데 이것저것 알려주시겠다고······.”
“최정식이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어, 혹시 알아?”
“아뇨, 저야 모르죠. 근데 그 분이 뭘 알려주시겠다고요?”
“아니, 내 슬라이더가 고속 슬라이더랑 너무 쉽게 구분이 된다고 그 부분을 좀 수정하자고 그러시네. 그러면 프로에서 바로 던질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생각났다.
최정식.
증량 성애자.
“저기 선배. 혹시 그분이 선배한테 증량 이야기는 안 했나요?”
“그거야 뭐 대부분 코치님들이 나 보면 하는 이야기잖아. 워싱턴 코치님도 나한테 일단 몸부터 불리자고 하셨고.”
“아, 그건 그렇죠.”
물론 그렇다. 하지만 워싱턴 형제가 요구했던 증량의 경우 백하민의 몸이 그 격렬한 폼을 견뎌낼 만한 내구성을 갖추기 위한 근성장이었다면 최정식은 조금 달랐다.
‘뱃살? 투수는 어차피 한 순간 큰 힘을 내는 보직이야. 살 좀 붙어도 괜찮아. 오히려 덩치가 커지면서 디셉션이 더 좋아지는 효과도 있다고. 한 경기 뛰면 4, 5kg씩 빠지는 것도 다반사인데 일단 몸부터 불려야지.’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그게 맞는 투수도 있긴 있다. 하지만 이 양반, 아니 이 양반뿐만 아니라 한국 투수 코치 대부분 문제가 자기 현역 시절에 경험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투수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하기보다는 모든 투수를 자신의 그러한 경험에 맞추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 형 그것보다 그냥 미국에 피칭랩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코치님이 2군에서 같이 만들자는데 어떻게 그러냐. 괜히 찍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안 그래도 계약서 늑장 부리고 미국에서 귀국 안 하는 돌출행동 했다고 고깝게 보는 선배들 있는 것 같단 말이야.”
확실히 나도 저맘때는 저런 고민들을 했던 것도 같다.
특히나 팔이 망가지고 타자로 전향했던지라 야수 수비를 실수한다거나 그럴 때마다 눈치가 보였었다. 하지만 14년이 흘러 후배가 아닌 선배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저런 고민들은 참 쓸모가 없는 고민이었다.
“형, 그거 자의식 과잉이에요.”
“뭐? 자의식 과잉? 그게 뭔데?”
“그러니까 형 그거 주인공병이라고요. 남들은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형한테 관심이 없어요.”
물론 나도 선배가 됐을 때, 팀 성적에 도움이 될만한 후배에게는 관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 관심은 지금 백하민이 하는 고민들처럼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싹수 보이는 놈이 괜히 위축돼서 실력 발휘 못할까 봐 배려해주는 것에 가까웠다.
“결국 프로는 다 개인사업자고 실력이 최우선이에요. 형이 팀 생활 파이팅 넘치게 아무리 잘해봤자 실력 안되면 나가리고, 어지간히 싹수 없어도 실력 되면 대우 받는다고요.”
“그러면 역시 미국을 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이야기지?”
“에이, 제가 형한테 뭐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죠. 그냥 피칭랩 가는 게 나을지, 아니면 2군에 남아서 그 최정식 코치님 코칭 받을지는 형이 결정할 문제고요.”
“······.”
“다만 한국에 남는다면 형 진짜 무턱대고 살찌우지는 마세요. 시즌 치르려면 지방이 좀 필요한 건 맞는데 무턱대고 찌우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적어도 잭이 짜준 식단 정도는 지키세요.”
***
“타자로서야 원래 두말할 것도 없었고 투수로서도 더 좋아졌습니다.”
“미국 피칭랩이 효과가 있던 건가? 뭐가 정확히 어떻게 달라진거지?”
“네, 카메라로 찍힌 각도가 다르고 아무래도 정확한 자료가 아닌지라 오차가 좀 있긴 하겠습니다만 스트라이드 폭이 6인치 정도 늘어났고 그만큼 릴리스포인트가 상당히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게 좋은 건가? 예전에 그 최진웅이때는 스트라이드폭이 너무 넓어서 좀 문제라고 하지 않았었나? 얼핏 봐도 지금 최수원이 스트라이드폭은 진웅이보다 넓은데?”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고, 선수 개개인의 역량 차이도 있으니까요. 최수원의 경우는 저 스트라이드 폭이 상당히 잘 맞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흐음······. 스트라이드폭이 넓어졌으니 몸이 더 끌려 나오겠고, 릴리스포인트가 더 앞에서 형성되겠군.”
“네, 덕분에 릴리스 포인트가 좀 더 낮아지긴 했지만 그게 오히려 더 선수들을 헷갈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구위가 워낙 좋아서요.”
종속이론이 혁파된 지는 오래됐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이론의 영역이다. 선수 개개인이 느끼는 주관을 보자면 투수의 종속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한다.
물론 그것이 어떤 투수의 공은 날아가는 동안 구속이 더 천천히 감소하고 어떤 투수는 더 빠르게 감소하는 그런 판타지의 영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포물선.
모든 공은 결국 포물선을 그린다.
그리고 인간의 뇌는 같은 속도의 공이라고 해도 그 포물선의 크기에 따라서 더 크게 떨어지는 공을 ‘느리다’고 인지하고 덜 떨어지는 공을 ‘빠르다’고 인지한다. 다른 변화구들이 실밥으로 인해 공기저항이 생기고 그에 따른 마그누스 효과로 종적 횡적 움직임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속구 역시 마찬가지다.
회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포심 패스트볼은 덜 떨어지게 된다. 구위가 좋은 공이 타자입장에서는 더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게다가 끌고 나오는 거리가 8센티만 늘어나도 구속은 거의 1km/h정도 빨라지는 효과가 나타나는데 최수원은 바뀐 투구폼으로 최소 10센티는 더 끌고 나오고 있으니······.”
“거의 체감구속은 160이상이다. 뭐 그런 이야기로군.”
“네.”
“KBO에서는 투수로도 거의 용병투수급 위력이다. 뭐 그런 소리겠고.”
“그건 뛰어봐야 알 것 같긴 합니다만······. 적어도 3선발급 정도는 되지 않을지······.”
이번 시즌 2위를 달리고 있는 돌핀스의 단장 신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아무리 봐도 최수원이라는 선수를 담기에 KBO는 너무 작은 물이로구만. 그래, 큰 물고기는 큰 물에서 놀아야지. 브레이브스 김단장이랑 미팅 준비해줘. 이야기 좀 해봐야겠어.”
“네.”
***
2025년 전국 체전.
경하고는 103기. 역대 최고의 황금세대가 은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훌륭한 선배 아래에서 단련된 후배들. 탄탄한 전력. 우승을 밥먹듯이 해본 경험이라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다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것이 부족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그것은 다름 아닌 ‘행운’이었다.
지난 후반기 왕중왕전인 청룡기 때도 그랬다. 만약 중앙고를 준결승에서 만난 상대가 천남고였다면 우승은 경하고였을 것이다. 천남고가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경하고가 천남고보다 한 발자국 먼저 중앙고를 만났다는 이유뿐이었다.
그리고 현재.
-뻐엉!!!
“스트라잌!! 아웃!!!”
경하고는 또 한 번 그들의 불운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체전 1차전.
경남대표팀 경하고 vs 서울대표팀 중앙고.
중앙고의 유일한 약점은 얇은 뎁스였다.
특히 선발진의 얄팍함은 매우 심각했는데 전국 대회가 모두 토너먼트라는 점을 생각하면 도저히 우승은 불가능한 전력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긴 레이스에서 최종 우승을 차지하기 힘들다는 뜻일 뿐이었으니 적어도 단 한 경기.
그들이 내미는 필승카드와 다퉈볼만한 학교는 황금세대를 자랑하던 6개월 전의 경하고 정도를 제외한다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KKK 삼자범퇴.
마운드 한 복판.
최수원이 담담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
좋아하는 팀의 경기 직관도 자주 못 가는 불쌍한 변호사가 담담한 최수원을 대신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수원.
모르는 이름은 아니었다.
아니, 한국 프로야구의 팬으로서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하지만 영상으로 지켜본 그와 이렇게 경기장에서 직접 보는 그는 완전히 달랐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제구력으로 사람들을 불안 불안하게 만든다는 평가는 너무나도 부당했다. 지금 마운드에 선 최수원은 도저히 공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1시간 42분.
8이닝 14삼진 무실점.
그 모든 경기를 지켜본 변호사 김태근이 확신했다.
이 녀석은 애당초에 그 싹수부터가 KBO 레벨이 아니다.
“네, 접니다. 한번 해보시죠.”
[중앙고등학교 전국체전 아쉬운 2차전 패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