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규칙(3)
“후······.”
벤자민 팔머가 자신의 미간을 꾹 눌렀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잠도 못 자가면서 일에 전념했지만 뾰족한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대형 FA도 아니고, 국제 아마추어 계약에 한도액은 뻔한데 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쟤 신입이잖아.”
신입.
그 한 마디로 충분했다. 지금 벤자민 팔머를 비웃는 그들 역시 수년 전에는 비슷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메이저리그.
연예계도 마찬가지지만 이쪽 업계는 여러모로 특별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는 단순히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그 강렬한 빛. 혹자는 그것을 꿈이라 부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인간을 유혹하는 헛된 희망이라 부른다.
“신입, 뭐가 좀 잘 안되나 봐?”
“아, 네. 조금······.”
“NPB는 죽어도 싫다고 그랬다며. 게다가 투타 겸업 아니면 안 된다고 그랬고. 그러면 오클랜드 아니면 탬파베이뿐이지 뭐.”
“스읍······, 그게 뭔가 수가 있을 것 같기도 해서요.”
“에휴, 그래. 뭐 열심히 해봐. 혹시 알아? 네 정성을 봐서 겨울에 CBA 협정에서 커미셔너랑 노조가 어? 국제 아마추어 규약 개정이라도 해줄지?”
“그러면 좋겠습······. 근데 이거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어. 국제 아마추어 관련해서 지금 드래프트 제도로 바꾸자 뭐하자 말 나오는 상황에서 선수한테 유리하게 뭐가 풀릴 리가 있겠냐? 구단이건 사무국이건 노조건 다들 자기 이익대로 움직이는 집단이야. 결국 누군가한테는 유리해야 그 방향으로 가는 건데 국제 아마추어 유망주 계약은 제한 풀어봤자 유리한 집단이 아무도 없잖아. 물론 그거 풀어주면 아마추어 선수야 당연히 유리해지지만, 걔들은 뭐 아무 힘도 없잖냐. 안 그래?”
!?
벤자민 팔머가 마치 머리를 한 대 강하게 맞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리한 집단?”
***
-뻐엉!!
“이거 이전보다 훨씬 좋은데요? 폼은 여전히 좀 불안하긴 한데 그래도 공이 워낙 좋아서······. 2군에서 좀 두들겨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질 겁니다.”
“계약 대신에 미국 피칭 랩으로 튀었다고 할 때 어린놈이 돈만 밝히는 것 같아서 영 별로였는데 진짜 좋아져서 나타난 걸 보니 뭐라고 하기도 좀 그러네요.”
8억 5천만 원.
작년 최민혁과 서규탁이 각각 10억 5천만 원과 10억 원이라는 역대급 계약을 한 덕분에 조금 빛이 바랜 감이 있었지만 KBO 역사상 다섯 번째에 자리매김하는 거액. 이번에 마린스에 1라운드 전체 1번으로 드래프트 된 백하민의 계약금이었다.
“그래서, 바로 써먹을 수는 없겠어?”
“글쎄요. 아무리 그래도 일단은 시즌 치르는 법 같은 것도 좀 익혀야 할 테고 솔직히 폼도 화려하긴 한데 좀 위험해 보이잖습니까. 쓸데없는 부분 쳐낼 거 쳐 내고, 가다듬을 거 가다듬고. 제가 몇 달만 잘 주무르면 충분히 원하시는 만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네, 그리고 슬라이더는 아무래도 조금 손을 봐야 할 것 같군요. 고속슬라이더랑 슬라이더 두 개를 던지는데 고속슬라이더는 괜찮은데 슬라이더가 영······.”
“그래, 그건 이 코치한테 전적으로 맡길 테니까, 다음 달에 합류하면 잘 좀 해줘. 이 코치 현역 시절 슬라이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절반만 해도 그게 어딘가.”
“어휴, 요즘 애들 상태 보십쇼. 구속부터가 우리 때랑은 완전 다르잖습니까. 그냥 제 코칭 똑바로 만 따라오면 절반이 뭡니까. 제 전성기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
“머신들은 잘 도착 했습니까?”
“그래. 고맙다. 덕분에 저렴하게 구매했네.”
“아닙니다. 모교인데 이런 거라도 도와야죠.”
현재 전국 모든 고등학교의 경계 1순위는 단연 최수원이었다.
타자로서, 그리고 투수로서.
사실 타자 최수원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물론 상대하기 쉽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상대 자체가 불가능하니 그냥 상대를 포기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의미다. 때마침 야구에는 고의 사구라는 대적 불가능한 타자를 상대하기 위한 아주 좋은 제도적 장치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투수 최수원은 어떠한가.
타자야 1/9이다. 그냥 그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 명을 상대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투수 최수원은 달랐다. 물론 투수 최수원이 타자 최수원만큼 언터쳐블인가를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초고교급 투수 정도다. 제구가 잡히지 않는 날에는 가끔 두들겨 맞기도 하고 좀 제구가 잡힌 것 같은 날조차도 볼넷으로 주자를 쑥쑥 내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컨디션이 별로이기를 바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특히 중앙고와 같은 권역으로 묶이는 학교라면 더더욱. 백하민을 비롯한 3학년들이 졸업하고, 2학년 위주로 개편된 천남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답을 구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답안은 바로 최수원의 강속구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피칭 머신이었다.
물론 그들이 본래 사용하던 머신 역시 그리 떨어지는 머신은 아니었다.
최근 프로선수를 몇이나 배출한 서울 소재 학교다. 대당 천만 원에 가까운 머신들이 두 대나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들이 새롭게 구매한 머신은 거기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됐다.
최고 구속 170km/h까지. 릴리즈 포인트의 높낮이는 물론이거니와 컴퓨터와 연결하여 변화구의 변화 역시 세밀하게 세팅할 수 있었다.
물론 최수원의 구속은 최고 157로 기존에 160까지 나오던 머신보다 느렸지만 머신에서 쏘아내는 공과 사람이 던지는 공 가운데 후자가 더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더 빠른 공으로 배팅 타이밍을 조절한다.
그것이 천남고 감독의 결정이었다.
9월 말.
전국체육대회.
본래 1920년에 ‘전조선 야구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됐던 이 대회는 100년이 넘는 시간을 통해 모든 아마추어 스포츠인들의 축제로 발전했다.
전국체육대회의 19세 이하 야구 서울 지역 대표 선발전.
천남고는 전국에서 손에 꼽는 야구 명문답게 다른 학교들을 콜드게임으로 격파해가며 쭉쭉 달려 나갔다.
물론 그럼에도 이번 대회 탑독은 천남고가 아니었다.
전반적인 선수단의 구성만 본다면 천남고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명.
단 한 명의 선수로 인하여 그들은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중앙고등학교.
하나의 시즌.
혹은 연이은 토너먼트라면 몰라도 단판 승부에서만큼은 명백한 전국 최강.
전국체육대회 서울 지역 대표 선발전.
천남고가 준결승에서 중앙고를 만났다.
선발 투수는 최수원.
그것도 마지막으로 공을 던진 것이 무려 일주일 전인 쌩쌩하기 짝이 없는 최수원이었다.
“하민 선배한테 이야기 들었지?”
“어, 최수원 걔 더 강해졌다고. 하, 진짜 미친 재능충새끼. 아니, 그렇게 야구 할 거면 우리 천남이나 오지. 중앙은 대체 왜 간 거래?”
“기숙사 살기 싫어서 통학하려고 그랬다잖냐.”
“아니, 걔네 집 어차피 현대 아파트라며 천남이랑 한 정거장밖에 차이 안 나잖아.”
“그냥 중앙고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 왜 그런 애들 있잖아. 자기 실력에 자신 있어서 무슨 만화주인공처럼 약체 고등학교 멱살 잡고 우승까지 이끄는 거 상상하는 그런 애들.”
에이스급 투수라면 누구나 한 번 정도는 해봄 직한 달콤한 상상이었다.
물론 그 달콤한 상상이 현실로 이뤄지는 것은 불가능에 한없이 가까운 일이었기에 다들 현실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누군가가 그 상상을 현실로 이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처지에서는, 심지어 자신이 그 반대편에 선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야, 너무 쫄지 마. 최수원이라고 별거냐? 걔라고 뭐 팔 네 개 달리고 그런 거 아니잖아. 그리고 걔가 미국에서 훈련하는 동안 우리도 훈련 졸라 했어. 솔직히 지금 팀에서 165 못 치는 애 없잖아. 어? 영인이 너는 어제 165짜리 공쳐서 담장도 넘겼잖아. 그것도 두 개나. 안 그래?”
“맞아. 최수원이 아무리 미국에서 훈련했다고 해도 뭐 구속이 갑자기 확 치솟아서 165 던지고 그러겠냐? 157킬로 던지던 거 강해져봤자 158, 159킬로겠지. 우린 그것보다 훨씬 빠른 공으로 훈련했어.”
선수들이 서로를 다독였다.
-뻐엉!!!
“스트라잌!!!”
마운드의 최수원이 던진 공이 홈플레이트를 통과했다.
완벽한 로케이션이었는가를 묻는다면 아니다. 오히려 복판에 가까웠다.
타자가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방금의 타이밍을 되새겼다.
두 번째.
-딱!!!
타구가 제자리에서 하늘 높은 곳으로 치솟았다.
조유진이 마스크를 벗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타악.
“아웃!!”
타이밍도, 타격 포인트도 모두 터무니없이 빗나갔다.
천남고의 1번 타자가 덕아웃으로 향했다.
“좀 어땠어?”
돌아가는 길.
대기 타석에서 타석으로 걸어가던 타자가 짧게 물었다.
“그러니까······.”
뭐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평소 어휘구사력과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종종 듣던 그로서는 도저히 적절한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할 수 있었던 말은 그저 “타이밍이 좀 달라 .”뿐이었다.
마운드의 최수원이 가볍게 호흡했다.
윌리엄 워싱턴은 그에게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피칭을 뜯어고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겨울방학 때 꼭 다시 오도록 해. 적어도 삼 개월은 진득하니 해야 뭘 건드려라도 볼 수 있으니까. 아, 그리고 기회가 되면 백도 꼭 함께 데리고 오고.”
“손님 유치를 너무 적극적으로 하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솔직히 여긴 너무 비싸다고요. 차라리 스튜디오를 어디 근교로 옮기세요. 대체 누가 뉴욕에 피칭 랩을 둡니까? 이 쓸데없이 임대료만 더럽게 비싼 곳에.”
“대신 선수들 접근성이 좋잖아.”
하지만 한 가지.
최수원의 왼쪽 다리가 높게 치솟았다.
어떻게 보면 백하민의 그 과감한 폼을 조금 닮은 격렬한 레그 리프팅이었다. 들어 올린 다리가 그대로 쭉 뻗어나갔다. 마찬가지로 거대한 스트라이드.
아마 모 구단의 코치가 봤다면 쓸데없이 긴 스트라이드라며 수정을 요구할만한 폭이었다.
하지만 그 과감한 스트라이드 폭에도 불구하고 최수원의 타고난 신체밸런스와 균형감각이 그의 몸을 안정적으로 이동시켰다.
글러브에서 손이 빠져나왔다. 마치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 것처럼 스트라이드가 완료된 하체와 아직 회전이 이뤄지지 못한 상체가 완벽한 균형을 이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한 달 내내 윌리엄 워싱턴이 최수원의 몸을 붙잡고 주물럭거린 효과가 빛을 발했다.
초기 코킹 단계(early cocking phase)에서 후기 코킹 단계(late cocking phase)까지. 어깨와 팔에 가장 큰 부하가 걸리기에 가장 부상을 당하기 쉬운 그 상황에서 최수원의 팔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물론 그렇다고 그 공이 이전보다 더 빠르고 강한 속도로 공이 날아갔는가를 묻는다면 절대 그렇지는 않았다.
타석에 서 있던 천남고의 2번 타자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시원한 헛스윙.
앞선 타자보다 조금 더 표현력이 좋았던 그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이거 공이 더 빠른데? 아니, 계속 빠른 건가?”
초속과 종속.
그 케케묵은 논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윌리엄이 말했던 6인치.
모든 것은 바로 그 6인치에서 시작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그리하여 전국체육대회의 서울 대표팀 선발전.
천남고는 6이닝 동안 단 하나의 타자도 출루시키지 못했다.
[전국체전 19세 이하부 서울 선발전!! 중앙고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