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규칙(2)
“최수원 선수, 이건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실 게 아닙니다. 물론 하루라도 빨리 빅리그에 데뷔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NPB를 거쳐 가는 것은 결코 나쁜 전략이 아니에요. 실제로 작년 드래프트 1라운드 17위였던 더스틴 나이트 선수도 5년 750만 달러 조건으로 NPB에 갔습니다.”
통상적으로 17번째 픽 정도 되면 계약금이 400만 달러가 좀 안 된다. 빠르게 2년 정도만 마이너 구르고 메이저 올라간다고 치더라도 3년간 최저 연봉 받으면 150만 달러. 합계 550만 달러 정도 기대 수입에 이후로 연봉협상 3년을 거친 뒤 FA임을 고려하면 NPB에서 5년간 750만 받고 곧바로 FA 자격을 얻는 것은 분명 금전적으로 이득이겠지.
“5년인 걸 보니 얼리 드래프트였나 보네요.”
“어? 생각보다 잘 아시네요. 최근에 국제 아마추어 연령이 25세로 올라가는 바람에 고졸은 7년, 얼리드래프트는 5년을 기준으로 하는 추세입니다. 이전에야 구단에서 계약금을 깎으려고 할 때나 하던 선택이었습니다만, 최근 1라운드들도 마이너에서 2, 3년씩 담금질하는 추세를 고려할 때 어중간한 재능이라면 NPB를 거쳐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 중론이라서요. 보라스 영감님 회사가 또 한 건 해낸 거죠. 뭐, 이것도 조만간 CBA에서 제제를 가할 것 같긴 하지만요.”
“그렇군요. 그런데 뭐가 됐건 NPB는 싫습니다.”
“잠시, 잠시만요. 최수원 선수. 들어보세요. NPB는 KBO와 다릅니다. 꼭 일곱 시즌을 뛰지 않아도 괜찮아요. 단 1년을 뛰더라도 포스팅으로 다시 MLB에 진출할 수 있으니까요. 단지 지금 저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MLB의 국제 드래프트 사정이 내년에 별로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최수원 선수가 아예 드래프트였다면 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국제 드래프트는 보너스풀이 적은 대신 여러 가지를 따져볼 수 있다는 점이 강점 아니겠습니까? 투타 겸업, 계약금, 적절한 팀의 로스터 사정과 빠른 콜업까지. 어차피 마이너에서 뛰어야 할 기간을 NPB에서 뛰는 겁니다. NPB의 두둑한 계약금과 다시 MLB 진출할 때 넉넉한 계약금은 보너스고요.”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분명 가장 합리적인 방향이다.
NPB와 KBO의 포스팅 제도는 매우 흡사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NPB의 경우 포스팅 제도를 적용받기 위해 자국 리그에서 필수적으로 뛰어야 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의 이야기처럼 MLB의 모든 구단이 나를 얻기 위해 경쟁할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게다가 지금 당장 내가 미국에 진출을 한다고 해도 설사 그것이 전업 타자로 빅리그를 노린다고 해도 빅리그 데뷔가 곧바로 이뤄질 수 없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내 현재 실력은 당장 빅리그에 데뷔해도 될만하다. 하지만 과거 보너스베이비 사건 이후, 빅리그의 구단들은 유망주들의 마이너를 필수라고 본다.
실력의 문제도 있지만, 그건 리그를 치러내는 요령 등을 익히는데 마이너는 꼭 필요한 시간이다. 아무리 짧아도 3개월, 보통이라면 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역대 최고의 유망주 소리 듣던 브라이스 하퍼가 리그를 박살 냈는데도 콜업 되는데 1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 했다.
심지어 나의 경우는 투타 겸업을 목표로 했다. 타자로서는 괜찮다. 하지만 투수로는? 5, 6일에 한 번씩 등판하는 요령과 기량이 올라오는 데 필요한 시간까지 생각해본다면 그보다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합리적인 선택이라도 세상에는 종종 합리성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래도 그건 싫습니다.”
그건 바로 그 선택을 해야 하는 나의 기분이다.
“혹시 방사능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한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관계 때문인가요?”
“뭐, 그런 것들에 영향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보다는 그냥 제가 왜 일본을 가야하나 싶어서요.”
“그건······.”
“아니, 제가 제임스 코퍼레이션과 계약한 이유는 말씀하신 여러 가지 점들을 신경쓰지 않으려고 한 거잖아요. 그냥 제가 원하는 건 심플 합니다. 투타 겸업. 그리고 최대한 빠른 메이저 데뷔. 그리고 그 과정이 가장 효율적이었으면 좋겠고, 일본은 싫습니다. 뭐, 비슷한 조건으로 한국에서 1, 2년 정도 뛰고 가는 거라면 생각해볼 여지도 있을 것 같군요.”
“······.”
벤자민 팔머의 눈그늘이 더 진해진 것은 아마 내 착각은 아니었으리라. 사실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KBO에서는 7년 이상을 뛰지 않은 선수를 절대 외국 리그로 절대 내보내 주지 않는다. 설사 구단과 선수가 은밀하게 짬짜미를 해서 완전 방출로 내놓는다고 해도 협회 차원에서 철저하게 막아버린다. 결국 그에게 나의 말은 알아서 투타 겸업도 시켜주고 메이저 콜업도 제일 빨리 해주는데 계약금까지 빵빵하게 주는 팀 구해두라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벤자민 팔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제 거의 다 왔네. 그러면 잘 들어가고. 앞으로도 종종 얼굴 보자.”
“과연 그럴 여유가 있을까요?”
“너 중앙동 현대 아파트 산다며. 우리 집에서 버스 타면 세 정거장인데 여유는 무슨 여유야.”
“형은 이제 부산 가야 하잖아요. 마린스랑 계약 안 할 거예요?”
“아······.”
하민이 형의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머릿속에서 마린스를 지우고 살아온 듯 싶었다. 하긴 나라도 싫을 것 같다. 서울에서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부산을 가야하고, 심지어 그 부산 팀이 성적이······.
37승 89패 2무.
승률 0.294
어······. 음······.
“형, 힘내요. 그래도 부산 마린스 돈이라도 많이 주잖아요. 이번에도 리그 전체 통틀어서 연봉 총액이 세 번째인가 그렇다던데.”
“아······.”
백하민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하긴, 같이 지내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 인간 승부욕 진짜 장난 아니다. 나도 어디가서 승부욕이 뒤지는 편은 아닌데 그래도 타자라는 게 원래 3할만 쳐도 좋은 타자 소리 듣는 직업이다 보니 작은 승부 하나하나에는 조금 초연해진 면이 있었는데, 이 인간은 정말 작은 거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게 무서울 정도다. 그리고 그런 인간한테 위닝 시리즈보다 스윕이 더 많은 팀이 기다리고 있으니 힘이 날 리가 없다.
무엇보다 마린스의 진짜 무서운 점은 미래가 딱히 현재보다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꼴찌를 밥 먹듯이 하면서 괜찮은 선수를 계속 수급하는데도 미래가 나아질 것 같지 않다니 참으로 미스테리한 팀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러한 예측이 정말 현실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더 뭐라 마땅히 위로할만한 말이 없었다.
“어? 저 도착했네요. 그러면 형 저 정말로 이만!!”
후다닥 공항 리무진 버스에서 내렸다.
거의 한 달 만에 돌아온 집은 여전히 삭막하게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것 때문에 괜히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다른 집은 엄마가 뜨신 밥 해 놓고 기다린다는데 나는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와도 아버지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거랑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가며 이혼을 해보니까 알겠더라. 어른도, 아니 어른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버지라고 한 달 만에 돌아오는 아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을까.
간단하게 짐을 정리하고 감독님과 코치님. 그리고 아이들의 선물을 챙겼다.
학교 수업은 슬슬 끝날 시간이었으니 이제 오후 훈련을 시작할 시간 즈음 됐을 것이다.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딱!!!
저 멀리 조유진이 쳐낸 공이 높게 솟구쳤다. 깔끔한 장타였다. 하여간 연습 때는 정말 스윙 폼이 기가 막힌다.
“어? 저거 최수원 선배님 아닙니까?”
“뭐? 최수원? 걔 분명 내일 온다고······. 어? 진짜네?”
누군가가 나를 발견한 듯싶었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오는 나를 향해 야구부 애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선배님 이게 다 뭡니까?”
“자자, 다들 진정하고. 별 건 아니고 그냥 기념품이야. 양키 스타디움에서 사 왔으니까 나눠 가져.”
“우와!! 감사합니다!!”
대단한 선물은 아니었다. 내가 빅리거, 아니 하다 못 해 프로선수만 됐어도 좋은 선물을 사왔겠지만, 체류비부터 모든 것을 아버지 돈으로 해결하는 처지에 비싼 선물을 사는 것은 무리였다.
“왔냐?”
아이들 사이.
조유진이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대회 기간을 포함해서 두 달이 좀 안 되는 시간. 녀석은 제법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오, 조 주장. 출국 할 때만 하더라도 영 별로였는데 이제 좀 주장 태가 나는 것 같다?”
“주장 태는 무슨. 그러는 너야말로 몸이 좀 단단해진 느낌이다?”
“어, 한 달 사이에 3kg이나 증량했다. 죽는 줄 알았어. 아, 그리고 이건 네 선물.”
“오, 뭐야. 내 거는 또 따로 챙겨 온 거야?”
친구 선물은 따로 챙겨야지라는 말은 너무 오글거리는 말이었다.
“내 소중한 공 받이인데 당연히 챙겨야지.”
“뭐 인마?”
녀석에게 미리 챙겨둔 선물을 휙 던졌다.
“저지?”
등번호 8번이 마킹된 핀스트라이프.
양키스의 한자리 등번호는 0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구결번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8번은 공동 영구 결번이었는데 그 두 선수 모두 조유진과 같은 포수 포지션이었다.
하나는 여덟 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기록한 양키스 레전드 1세대 포수이자 역사상 최고의 포수를 키워낸 코치였으며 또 하나는 야구 역사상 최고의 포수였다.
빌 디키 그리고 요기 베라.
양키스는 전통적으로 유니폼에 이름을 새기지 않는다. 물론 관중들에게 판매하는 유니폼에는 당연히 그런 것 없지만 나는 일부러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유니폼을 사 왔다.
“고맙다. 오 이거 어센틱이네? 와, 자수 꼼꼼한 거 봐라.”
“마음에 드냐?”
“당연하지. 아, 맞다. 감독님이랑 양세준 코치님은 지금 원광중 가셨어. 아마 좀 있어야 오실거다.”
“그래? 애들 보러 가셨나 보네?”
“어, 넌 어쩔 거냐? 오래 쉬었는데 몸 좀 풀어야지.”
“내가 쉬긴 뭘 쉬어. 뉴욕에서 양키스랑 에인절스 경기 한 경기 본 거 제외하고 죽어라 훈련만 했는데. 거기다가 비행만 14시간 해서 시차 적응도 안 되고 죽겠다. 죽겠어.”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공 한 번 안 던지고 그냥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어?”
조유진이 씨익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얼른 가서 장비나 착용해. 미국물 먹은 공이 얼마나 무서운지 한 번 보여 줄테니까.”
“오케이!!”
***
박 감독의 얼굴이 펴질 줄을 몰랐다.
“감독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오늘 애들 컨디션이 좀 많이 안 좋기는 했지만 그래도 금방 올라 올 겁니다.”
“양 코치, 애들 계속 알아는 보고 있지?”
“네, 그렇기는 한데······.”
최근 봉황대기에 이어서 대통령배까지. 중앙고의 성적은 영 좋지 못했다.
프로야 개인 자질이라고 하지만 대학입시는 결국 연줄과 출전 기록. 그리고 성적이다. 특히 투수의 경우는 2025년 지금 시점에서도 가산점에 승리를 넣는 학교가 대부분이었다. 강한 학교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수원이 돌아오면 전국체전만 제대로 치러보고, 혹시라도 마음 바뀌는 아이들 있을지 계속 찾아보자고.”
“네.”
-뻐어엉!!!!!!!
차에서 내리자마자 들려온 중앙고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포구음.
바보가 아닌 이상에서야 모를 수가 없었다.
“뭐야? 수원이 오기로 했던 날이 오늘이야? 내일 아니었어?”
한층 단단해진 몸.
마운드의 최수원이 뿌린 공이 정확하게 조유진의 미트를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