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63화 (63/305)

63화. 답답하면?(5)

마운드에서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지금 상황에서 나를 마운드에 세운다는 것은 어떻게든 오늘 경기를 가져가겠다는 의미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최수원!! 오늘 경기 홈런 2개를 기록한 타자죠. 최수원 선수가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아, 갑자기 지명 타자가 마운드에 올라와서 놀라는 분도 계실 텐데 이 선수 투타 겸업입니다. 앞선 일본전에서도 1.2이닝 동안 삼진 2개 무실점으로 완벽한 피칭을 보여준 바가 있어요.]

그리고 나는 그 기대에 온전하게 부응해줄 생각이었다.

2아웃에 주자 1, 3루.

1루 주자가 네 걸음을 걸어 나갔다. 제법 발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장타라면 홈까지 들어가 보겠다는 뜻이겠지. 혹은 도루를 노리고 있거나.

주자 1, 3루와 주자 2, 3루는 느낌이 다르기는 하다. 특히 지금처럼 1점 차이 박빙의 승부를 벌이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전자는 어지간히 커다란 이루타가 아니면 1점으로 끝나겠지만 후자는 단타라도 조금만 깊숙하면 2점을 헌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트 포지션 따윈 없었다.

기본적으로 세트 포지션은 와인드업 포지션에 비해서 공의 위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물론 피칭은 단순히 공이 빠르고 강하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트 포지션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방식이었고.

하지만 나에게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열일곱으로 돌아와서 이제 고작 오 개월. 피칭을 하지 않은 세월만 십칠 년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러한 활약이 가능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내 공이 빠르고 강했기 때문이다. 다른 장점을 추가하고자 나의 장점을 깎아 먹을 수는 없었다.

도루 저지?

그냥 정병철에게 모두 일임한다.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은 가장 좋은 공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일이었다.

-뻐엉!!

“스트라잌!!!”

156km/h의 속구가 스트라이크 존 복판을 갈랐다.

***

워싱턴 형제의 동생 잭 워싱턴이 혀를 내둘렀다.

“와, 형 저거 봤어?”

“어.”

약간 상기된 잭 워싱턴과 달리 윌리엄 워싱턴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임스 코퍼레이션에 투자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동생과 달리 윌리엄은 투자 자체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마존을 퇴사하고 꿈에 그리던 피칭 아카데미를 차릴 때만 하더라도 그들 형제는 성공이 눈앞에 있다고 확신했었다. 분명 그들의 모델은 완벽했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명예와 명성 그리고 돈방석뿐이었으니까.

그리고 1년 하고 2개월.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과 이론을 확신했지만, 야구계는 생각 이상으로 보수적이었다. 각 구단 프런트의 전략을 담당하는 핵심 부서는 아이비리그의 젊은 재원들을 빨아들이고 있었지만, 적어도 현장의 선수를 지도하는 코치와 인스트럭터 자리는 여전히 선수 출신을 선호했다. 특히 이곳 동부지역에서는 더더욱.

결과적으로 워싱턴 형제는 여전히 대학리그의 별 볼 일 없는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었으며 아카데미를 창업할 때 사용한 막대한 비용은 빚으로 남아 그들을 옥좼다.

“지분 투자하죠. 50만 달러. 49%.”

솔직히 도둑놈 같은 제안이었다. 그들이 아카데미를 차리기 위해 투자한 장비값만 근 200만 달러. 게다가 매달 나가는 월세도 2만 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당장 투자를 받지 않으면 망할 판국이었다. 게다가 투자의 주체가 최근 젊은 재능들을 다수 보유한 제임스 코퍼레이션이라는 점이 더욱 그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형, 받아들여야 해.”

“그걸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정리하고 지금이라도 월마트에 가는 게 낫겠다. 뭐? 50만 달러에 49%? 내가 고작 그거 하자고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한 것 같아? 매튜가 그러더라. 월마트 싱가폴 부사장 자리 주겠다고.”

“그래서, 야구 포기하자고? 그때처럼? 그때는 차라리 낫지. 팔이 아작나서 그만둔 거니까. 지금은? 돈 없어서 그만두자고? 그깟 돈 때문에?”

“그깟 돈?”

동생 잭 워싱턴의 말에 윌리엄 워싱턴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미안. 내가 너무 흥분해서. 하지만 형, 이건 정말 기회라고. 뭐 다른 곳의 투자라면 모르겠지만 제임스 코퍼레이션이라면 요즘 한참 새로 떠오르는 에이전시잖아. 거기서 우리 지분에 투자하는 게 무슨 의미겠어. 자기들 선수를 맡기려는 거잖아.”

“글쎄, 우리 시설들을 싼값에 꿀꺽하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지.”

많은 다툼이 있었다.

홀몸인 잭과 달리 4살짜리 딸을 책임져야 하는 윌리엄은 더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놈의 야구란 대체 무엇인지. 결국 워싱턴 형제는 제임스 코퍼레이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번 대회 이후 그들의 고객이 될 젊은 선수를 직접 보기 위해 이곳 올버니까지 직접 찾아왔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마운드의 최수원이 여섯 번째 공으로 기어코 삼진을 잡아냈다. 오늘도 타자로 뛰는 모습밖에 못 보고 가는 건가 싶었는데, 방문한 보람이 있었다.

“다음 이닝에도 올라오겠지?”

“한국팀이 생각이 있으면 그렇겠지.”

자세한 것은 정밀한 측정을 해봐야 알겠지만 이렇게 대략 눈으로 봤을 때 그들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앞선 한국의 투수처럼 어딘가를 뜯어고쳐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는 없다는 정도다.

경기가 계속됐다.

***

삼루에 서 있던 알렉산더 맥도웰이 아쉬운 마음으로 덕아웃에 들어왔다.

볼넷으로 출루. 그리고 안타 하나에 삼루까지. 여기서 추가점을 내서 점수를 더 벌리고 싶었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최수원에게 향했다.

오늘 한국팀의 선발 투수는 제법 괜찮은 녀석이었다.

녀석이 가장 괴로워했던 순간은 홈런을 두들겨 맞았던 앞선 두 번의 타석이 아닌, 볼넷을 내줬던 마지막 타석이었다. 멍청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알렉산더 맥도웰은 그런 투수를 좋아했다.

어찌 됐건 승리하는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이어지는 7회.

미국 팀의 세 번째 투수 토마스 버튼이 마운드로 올라갔다. 이미 직전 이닝에 1점을 내줬던 투수로 드래프트 3라운드 92번 출신이었다.

오늘 마운드에 올라간 미국 투수 가운데 속구의 구위는 가장 안 좋았지만, 슬라이더가 아주 기가 막힌 녀석이었다.

스카우트들이 평가하기를 슬라이더만 본다면 AA급에서도 유의미한 성적을 낼 수 있을 만한 브레이킹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미국팀의 감독이 오늘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

일본을 대표하는 변화구가 포크볼이라면 한국을 대표하는 변화구는 역시 슬라이더다.

80년대 이후로 한국 최고의 투수들 레퍼토리에는 슬라이더가 꼭 포함되어 있다. 뭐, 특별한 이유는 아니다. 일본에 포크볼 투수가 많은 이유가 그냥 현역 시절에 포크볼 던지던 투수들이 지도자가 됐으니 가르치는 공이 포크볼이 많은 것처럼, 한국 역시 현역 시절 슬라이더를 주 무기로 던졌던 투수가 많아서 자기들 제자에게도 슬라이더를 잘 가르치는 덕분이다.

투수와 타자는 서로에게 적응한다.

MLB에 진출한 일본 투수들의 포크볼에 메이저 타자들이 고전하는 이유는 생소한 구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슷한 의미에서 토마스 버튼이 던지는 슬라이더는 조규혁에게 매우 익숙한 구종이었다.

-딱!!

직전 이닝 번트를 성공시켰던 조규혁이었다.

전체적으로 수비 라인은 약간 전진 된 상황. 그의 방망이가 불을 뿜었다.

잡아당긴 타구가 유격수와 삼루수 사이를 지나갔다.

조규혁의 발이 조금만 빨랐더라면 이루도 충분히 노려봤음 직한 타구였다.

무사 주자 1루.

다음 타자는 박진경. 오늘 경기에서 여러모로 운이 따르지 않는 타자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미국의 감독이 또 한 번 움직였다.

로스터에 있는 총 여덟 명의 투수 가운데 네 번째.

바로 이틀 전에도 한차례 공을 던졌던 앤드류 윌슨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려라.

박진경은 그 오랜 격언을 실행에 옮겼다.

-딱!!

깔끔한 외야 플라이 아웃.

원 아웃 주자 1루. 이번에도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타석에 한국팀의 2번 타자. 강창욱이 올라옵니다. 앞선 타석에서 행운의 텍사스 안타를 기록했던 타자입니다.]

앤드류 윌슨이 공을 던졌다.

앞선 박진경과 달리 오늘 강창욱에게는 제법 행운이 따랐다. 하지만 그 행운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타자가 방망이로 공을 두들겼을 때 생길 수 있는 법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앤드류 윌슨이 94.7마일 속구로 삼진을 잡아냈다.

그리고 타석에 최수원이 올라왔다.

-뻐엉!!

-우우우우우우

앞선 이닝.

백하민이 알렉산더 맥도웰에게 고의 사구를 던질 때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거대한 야유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앞서 알렉산더 맥도웰을 고의사구로 내보낼 때 관중들이 보냈던 야유는 단순히 자국팀의 선수에게 고의사구를 했기 때문에 보낸 야유가 아니었다. 승부를 피하는 남자답지 못한 모습에는 야유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잭 워싱턴이 누구보다 큰 소리로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벌써 투수 가운데 넷을 사용한 미국팀의 감독은 오늘 경기에 패배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 인정해야 했다. 적어도 오늘 경기. 최수원은 알렉산더 맥도웰에 못지않은 괴물이라는 것을.

고의사구.

타석에 정병철이 올라왔다.

그의 얼굴은 좋지 못했다.

자신을 거르고 후속 타자를 상대하는 것이라면 또 몰라도, 선행 타자를 거르고 자신을 상대하는 상황은 그의 야구 인생에 최초였다. 그리고 그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분노는 냉정함을 잃게 만든다.

-딱!!!

하지만 냉정함이 사라진 자리에 파워를 채워주기도 한다.

정병철의 타구가 빨랫줄처럼 뻗어 우측 담장을 직격했다.

이루에 있던 조규혁이 달렸다.

삼루의 코치가 힘차게 팔을 돌렸다. 그가 삼루를 밟고 그대로 홈을 향해 쇄도했다. 그 시점에서 이미 최수원은 이루와 삼루 사이에 있었다. 단순히 속도의 차이가 아니었다. 스타트 타이밍의 차이. 결국 경험에서 나온 주루 센스다.

삼루 코치는 멈출 줄 모르는 선풍기처럼 팔을 돌렸다.

최수원 역시 삼루 베이스를 밟고 그대로 홈을 향해 쇄도했다.

2타점짜리 2루타.

정병철이 드디어 타석에서 밥값을 해냈다.

8:7.

외야에 서 있던 알렉산더 맥도웰이 인상을 찌푸렸다.

7회 초에 역전이라니.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고작 1점이다. 솔로포 한 방이면 동점. 앞선 선행 주자만 있다면 역전도 충분히 가능한 점수 차이다.

앤드류 윌슨이 이어지는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이제 남은 아웃 카운트는 여섯 개.

최수원이 공을 뿌렸다.

한 명만.

딱 한 명만 출루에 성공하면 알렉산더 맥도웰 자신에게도 차례가 돌아온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선 저 녀석이라면 절대 승부를 피해 가지 않을 것이다. 아니, 피해갈 수 없다. 녀석도 이미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번 경기의 주인공은 ‘우리’라는 것을. 결국 녀석이 마운드에 오른 것도 이 경기에 진정한 결판을 내기 위함이다.

8회 삼진 하나를 포함한 삼자범퇴.

그리고 9회.

정말 신이 존재했던 것일까?

오늘 경기 가장 많은 공을 지켜봤던 9번 타자 조지 테일러가 마침내 최수원에게서도 볼넷을 뽑아냈다. 게다가 최수원은 이어지는 1번 타자 마크 밀러에게 삼진을 잡아냈다.

투 아웃에 주자 1루.

마지막 1점을 둔 주연들의 정면 승부.

진정한 주인공이 등장하기에는 너무나도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알렉산더 맥도웰이 타석에 서서 멋들어지게 방망이를 치켜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투런 홈런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분명 마운드의 최수원이 던지는 97마일 속구는 훌륭했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두들길 수 있다. 적어도 이러한 상황에서 알렉산더 맥도웰은 무적이었다.

‘어?’

-뻐엉!!

어디까지나 투수가 상대를 해준다면이지만.

***

알렉산더 맥도웰의 타석.

덕아웃에서 고의사구 지시가 내려왔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이건 무조건 거르는 게 맞았다. 무슨 소년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한 경기에 홈런 2방에 장타를 뻥뻥 날리는 타자를 상대로 굳이 정면 승부를? 그런 멍청이는 백하민 하나면 족했다.

-우우우우우

어마어마한 야유가 울렸다. 뭐, 확실히 야유는 미국 애들이 맛깔나게 잘한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며 그러거나 말거나 깔끔한 고의 사구.

방망이를 내려놓은 알렉산더 맥도웰이 왠지 상처받은 표정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일루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투 아웃에 주자 1, 2루.

-딱!!

빗맞은 타구를 잡아낸 박진경이 가볍게 규혁 선배의 미트에 공을 뿌렸다.

“아웃!!!”

8:7

실로 깔끔한 대역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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