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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62화 (62/305)

62화. 답답하면?(4)

오늘 경기가 있기 전 규혁은 자신의 자리를 걱정했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이번 대회에서 그의 성적은 워낙에 엉망이었으니까.

“선배, 지금 내야 볼 줄 아는 사람 몇 명이나 왔다고요. 선배가 일루에서 수비로 삽을 푸지 않는 이상 기회는 충분할 거예요.”

그것은 수원 나름의 격려였다. 사실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수원이 어른의 시선으로 팀이 돌아가는 꼴을 보자면 다른 코치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조규혁을 선발한 것이 분명했으니 어지간한 실수가 있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기회가 갈 것이다.

하지만 아직 어린 규혁의 시야에는 그런 어른의 사정 따위는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멍청이.’

부정적인 감정들이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일루에서 수비로 삽을 푸지 않는 이상 기회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 수비까지 삽을 퍼버린 지금은 대체 어찌해야 할까.

마운드의 후안 마르티네즈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3회 투 아웃 상황에서 올라와서 이제 1.1이닝을 끝낸 상황. 그의 몸은 이미 충분히 풀려 있었다.

-부웅!!

99마일.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공이 포수의 미트를 꿰뚫었다.

“스트라잌!!”

살짝 가운데로 몰린 감은 있었지만 괜찮았다. 오늘 한국팀 타자들의 약점은 빠른 공이었다. 물론 미국의 타자라고 100마일에 가까운 공을 뻥뻥 쳐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무기력하지는 않았다.

-딱!!!

빗맞은 타구가 힘없이 파울 라인 밖을 벗어났다. 배트가 늦었다. 코스를 읽어도 반응이 늦다. 99.7마일의 속구에는 그런 힘이 담겨 있었다.

순식간에 볼카운트 0-2.

후안 마르티네즈의 시선이 3루 쪽 덕아웃을 슬쩍 스쳤다. 특별히 눈여겨보려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한 명의 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최수원.

이번 대회. 누구나 대회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알렉산더 맥도웰을 제치고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마치 배리 본즈의 재림처럼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 대표팀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으니, 오늘의 선발이었던 잭 존슨조차도 1피홈런 1피안타로 물러나야만 했다.

앞선 잭 존슨의 희생으로 알 수 있었다. 한국팀의 다른 타자들은 모두 95마일 이상의 속구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저 최수원만큼은 다르다. 저 타자 앞에 주자를 쌓아두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세 번째.

후안 마르티네즈가 자신의 99마일짜리 속구를 다시 한번 뽐냈다.

규혁의 시선이 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양손으로 잡은 배트. 후안 마르티네즈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번트?’

투스트라이크 이후 번트라니.

설사 파울이 된다고 해도 Bunt after two strikes(쓰리 번트)로 아웃이다. 그렇기에 번트를 두 번 실패하면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강공으로 전환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무엇보다 현대 야구에서 번트란 그 생산성 자체를 의심받고 있다. 규혁의 선택에 당황한 것은 다른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지금까지 해온 야구에서는 쉽사리 보기 힘든 선택. 덕분에 그들의 반응이 미세하게나마 늦었다.

무서웠다.

그래, 100마일에 가까운 공에 번트를 대는 것은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일 것이다.

규혁의 방망이가 100마일짜리 공을 부드럽게 –툭!! 받아냈다.

일루 쪽 파울 라인을 따라 구르는 공.

규혁의 거대한 몸이 어울리지 않게 1루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반응이 조금 늦었던 미국팀의 일루수가 공을 줍기 위해 달려 나왔다. 후안 마르티네즈 역시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일루로 커버를 달려갔다.

-뻐엉!!

“세이프!!”

달려오는 사이 규혁의 머리에서 벗겨진 헬멧이 저 멀리 구르고 있었다.

세이프.

조규혁이 마치 홈런이라도 친 것처럼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

“뭐야? 누가 보면 홈런이라도 친 줄?”

“냅둬라. 저렇게라도 어필 해야지. 오늘 지가 벌인 짓이 있는데. 안 그러냐?”

“하긴, 어떻게 그런 공을 놓치냐? 솔직히 영재였으면 한쪽 눈 감고도 받았겠다.”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규혁 선배가 있을 때는 그래도 눈치라도 본다고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던 놈들이 저 멀리 있다고 아주 대놓고 씹어대는 꼴이 참으로 같잖다.

타석에 1번 타자인 박진경이 올라갔고 대기 타석에는 2번 타자인 강창욱이 올라갔다. 그 바로 다음 차례가 나였던 만큼 나도 이제 슬슬 준비할 타이밍이었다.

“읏쌰!! 오래간만에 밥상도 차려졌겠다. 기분 좋게 할 일 좀 해볼까?”

사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였다. 어차피 나한테 욕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못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솔직히 홈런 하나에 2루타 하나 쳤는데 1타점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여기가 대전 피닉스도 아니고.

두 타석 연속 출루에 실패한 놈들 주제에 규혁 선배의 번트를 비웃던 두 녀석의 입이 멈췄다. 뭐, 나를 바라보는 눈꼬리가 상당히 사나워지긴 했지만, 특별히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이 바닥이 짬밥도 중요하긴 중요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력도 중요하다. 솔직히 지금 팀에서 나에게 뭐라 말할 수 있는 건 백하민, 조규찬, 정병철 정도가 전부다. 뭐 굳이 하나 더 끼워주자면 박진경 정도?

-딱!!!

말하기 무섭게 박진경이 98마일짜리 속구를 두들겼다.

제법 빠른 타구.

중국의 투수들을 두들기는 동안 스윙이 퍼진 것은 박진경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역시 그 수정도 가장 빠르다. 확실히 어깨 빼면 나무랄 곳이 없는 야수답다.

[잘 맞은 타구!! 유격수 방면!! 아!! 조지 테일러!! 조지 테일러가 놀라운 수비로 타구를 잡아냅니다!!]

하지만 운이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절대 잡아낼 수 없었을 법한 타구가 조지 테일러의 글러브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타구를 잡는 과정에서 조지 테일러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점, 그리고 박진경의 발이 매우 빨랐다는 점 정도였다.

바닥을 한 바퀴 구른 조지 테일러가 글러브에 있던 공을 그대로 2루에 토스했다.

“아웃!!”

선행 주자 포스 아웃.

벤트 레그 슬라이딩으로 이루수의 송구를 방해한 규혁 선배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엉덩이의 흙을 털어냈다.

“수고했어요.”

“수고는 무슨······. 내가 조금만 더 빨랐어도 우리가 1점 더 얻는 거였는데.”

“네?”

“그렇잖아. 2루건 3루건 밟고 서 있기만 했으면 어차피 네가 홈런으로 싹 불러들여 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우리 이기려면 여기서 점수 좀 좁혀야 하는 거고. 그러려면 창욱이도 출루해야 할 텐데.”

“이거 조금 부담스러워해야 하는 말입니까?”

“왜? 부담스러워?”

“아뇨. 선비는 자기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데 저도 슬슬 선배한테 목숨을 걸어야 하나 싶은데요?”

“목숨은 됐고. 가서 한 방 멋지게 치고 와. 저기 마르티네즈인가 저 녀석도 슬금슬금 네 눈치는 보는 것 같더라.”

규혁 선배가 내 등을 한번 툭 두들기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아까 1루에서 송구 에러 하고 죽상이길래 걱정했는데, 그래도 좀 야구 같은 야구를 해서 그런가 나쁘지 않아 보인다.

원 아웃 주자 1루. 점수는 2:7

강창욱이 타석에서 방망이를 휘둘렀다.

-뻐엉!!

“스트라잌!!”

확실히 나도 마운드에 섰을 때마다 느끼지만 속구는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타자들이 그 속구에 익숙하지 않다면 더더욱. 실제로 KBO를 평정했던 수많은 타자도 메이저에 진출해서 가장 애를 먹은 것이 95마일 이상의 속구였다.

그것은 그들의 타고난 재능이 그만큼 차이가 컸다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어린 시절에 95마일 이상의 속구를 많이 접했던 선수와 그렇지 못한 선수 간의 차이라고 봄이 타당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강창욱은 조건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그의 모교는 경하 고등학교와 함께 경남지역을 양분하는 명문고인 경부 고등학교였으며 그가 3년 내내 상대해야 했던 투수는 최고 150의 속구를 던지는 좌완투수 조규찬이었으니까.

-딱!!

살짝 먹힌 타구가 유격수의 키를 넘어갔다.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에 떨어지는 행운의 텍사스성 안타.

일루에 있던 박진경은 이루에, 타자인 강창욱은 일루에 무사히 안착했다.

나의 차례였다.

***

1사 주자 1, 2루.

그것은 어쩌면 후안 마르티네즈가 가장 맞이하고 싶지 않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이 잠시 덕아웃을 향했다. 차라리 주자가 2, 3루였다면 선택은 쉬웠다. 만루를 채우고 다음 타자에게서 병살을 노리면 그만이니까. 물론 그다음 타자 역시 정병철이라는 만만치 않은 타자였지만 그 위험성을 비유해보자면 정병철이 늑대쯤 된다면 최수원은 굶주린 사자가 아닌 굶주린 드래곤이다. 장르가 완전히 다르다.

덕아웃에서는 후안 마르티네즈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하지 않았다. 다만 볼넷을 줘도 상관없으니 최대한 까다로운 승부를 하라고 요구했다.

“젠장.”

5점 차이.

아직은 여유로운 점수 차이였다. 여기서 10점을 더 벌리면 그 즉시 경기는 종료되고 5점만 더 벌어져도 7회에 경기가 끝이 난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점수 차이가 전혀 여유롭지 않게 느껴졌다.

타석에 그가 올라왔다. 왼손으로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배트를 두 번 강하게 꾹 쥐고 홈플레이트를 한번 톡 두들긴 뒤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괴물 알렉산더 맥도웰에게 뒤지지 않는 분위기가 풍겼다.

“젠장.”

후안 마르티네즈가 다시 한번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멍청한 몇몇 녀석들은 알렉산더 맥도웰이 얼마나 괴물 같은 놈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의 친형은 대학리그에서 이미 알렉산더 맥도웰을 상대했었다. 그리고 후안 마르티네즈가 태어나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그 형은 시즌 내내 알렉산더 맥도웰에게 삼진을 단 하나도 뽑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타석에 선 저 스완이라는 녀석은 알렉산더 맥도웰이 호승심을 불태우는 괴물이다.

볼넷을 감수하더라도 최대한 까다로운 승부?

그렇다면 그냥 애초에 존 안쪽으로는 공을 안 주겠다는 마인드로 던지겠다.

바깥쪽 높은 코스.

존에서 살짝 빠지는 곳을 향하여, 그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을 때려 박았다.

그리고 야구공이 그의 손을 떠나는 순간 직감했다.

‘아······.’

망했구나.

복판을 노리고 던져도 상하좌우로 빠져대는 공이다. 바깥쪽 높은 코스 살짝 빠지는 곳을 노리고 던진 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포수의 손이 닿지 않는 더 먼 바깥쪽 더 높은 곳이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던진 공은 바깥쪽 꽉 찬 높은 코스로 공이 빨려들어 갔다. 평소였다면 매우 만족했을 완벽한 코스.

최수원이 벼락처럼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우중간 매우 높게 떠오른 타구.

중견수 알렉산더 맥도웰이 빠르게 타구를 추적했다. 그리 크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렇게 완벽한 코스로 들어간 공을 완벽하게 때려내는 것은 현역 메이저리그 올스타가 와도 무리다.

40야드를 4.5초에 주파하는 터무니 없는 주력.

그 속도 그대로 담장을 밟고 하늘 높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쭉 뻗은 손의 끄트머리. 그보다 조금 더 솟구친 글러브의 끝. 야구공이 마치 글러브를 놀리는 것처럼 –톡. 끝을 스쳐 갔다.

홈런.

쓰리런 홈런이었다.

5:7

최수원이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마치 조규혁이 번트를 성공시킨 것처럼.

***

이어지는 5회. 그리고 6회.

백하민은 삼진을 하나도 잡지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꾸역꾸역 추가점을 내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한국은 두 번째 바뀐 미국의 투수를 상대로 1점을 추가로 뽑아내며 마침내 1점 차까지 점수를 따라잡았다.

그리하여 6회. 투 아웃에 주자 1, 3루.

방금 안타를 허용한 백하민이 자신의 미련과 아쉬움을 가득 담은 공을 새롭게 마운드에 올라오는 투수에게 건넸다.

“수고했어요. 형.”

“······.”

최수원의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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