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답답하면?(3)
내가 KBO를 떠나 메이저에 막 발을 디뎠을 당시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 사이 영을 다투는 투수들의 공이 터무니없다는 부분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들이 던지는 공이 터무니없을 거라는 것은 각오를 한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정작 내가 가장 크게 충격을 받았던 부분은 중하위권 투수들이 던지는 공이었다.
타격 사이클 좀 내려갔을 때, 상대 팀 4, 5 선발들을 상대로 내리 다섯 경기를 무안타 1볼넷 하고 나니까 와, 그건 진짜 정신이 아찔했었다. 한국 있을 당시에는 그래도 타격 사이클이 좀 내려갈라치면 하위권 투수들 쥐어패면서 타격감을 다시 찾았었는데 여기선 그게 불가능했다.
뭐 결국 개인 타격 코치 고용하고 최신기술 좀 도입하는 걸로 해결하긴 했지만, 아무튼 문화 충격이었다.
당시에 내 개인 타격 코치인 잭슨이 말하기를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애당초 KBO의 그 최정상급이라는 투수들이 결국 메이저에서 mop-up으로 뛰던 투수들이잖아. 도저히 그 위로 올라갈 가능성은 보이지 않아서 포기하고 가는 애들. 솔직히 메이저에서 뛰는 애들 중에서 걔들보다 못하는 애들은 없을걸?”
그러니까 결국 내가 느꼈던 빅리그의 진짜 무서움은 최정상의 몇몇 잘하는 애들이 아니라, 밑바닥에 깔리는 애들도 KBO 올스타급 이상이라는. 그러니까 내가 컨디션 안 좋을 때 쥐어 팰만한 애들이 없다는 데서 오는 막막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마 백하민이 지금 받은 충격도 비슷하지 않을까?
오늘 녀석이 두들겨 맞은 것은 상위 타순의 드래프트 1라운드들도 아니었다.
1회와 2회 그리고 3회.
총 3이닝 동안 6실점.
그리고 한국팀은 그 가운데 2회에만 4실점을 했다.
사실 그가 던진 공들은 좀 안일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공은 아니었다. 물론 왕중왕전 결승전 경기에서 나에게 던졌던 것처럼은 물론이거니와 오늘 경기에서 알렉산더 맥도웰에게 던졌던 첫 번째 공처럼 깔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이 정도로 던졌다면, 설사 상대가 전국 최강인 경하고라고 해도 어지간하면 대부분 붕붕 방망이를 휘둘렀을 것이다. 150을 오가는 속구는 한국을 기준으로 했을 때 보기 드문 속구고 제구가 조금 몰리거나 혹은 실투가 나온다고 해도 충분히 통했을 테니까.
하지만 미국 대표팀은 달랐다.
2회 말에 7번, 8번, 9번.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팀에서 가장 방망이를 못 휘두르는 세 명의 타자들에게 백하민은 각각 뜬금없는 이루타, 살짝 몰린 초구에 적시 안타, 그리고 공만 여덟 개를 보여주는 볼넷을 허용했다.
“하위 타선한테 두들겨 맞으니까 진짜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 들더라.”
“하위 타순이라고 그래도 걔들도 3라운드랑 2라운드. 그리고 2, 3라운드 사이에 샌드위치 픽이잖아요.”
“그래, 나도 알아. 올 한 해에만 이런 애들이 한 백 명 정도 쏟아졌다는 뜻이지.”
“에이, 그 정도까진 아닐걸요? 미국 드래프트는 대학 2학년 끝내고 나오는 애들이 더 많아서 한 서른 명에서 마흔 명 정도?”
“마흔 명이라······. 그것도 어째 별로 위로는 안 되는 것 같은데?”
-뻐엉!!
“스트라잌!! 아웃!!”
아무래도 오늘 미국팀은 어떻게든 우리를 이길 생각인 듯싶었다. 하긴 얘들은 내일 경기가 호주전이었으니 오늘 전력을 다 쏟아부어도 괜찮다. 반면 우리의 내일 경기 상대는 쿠바. 지금까지 U-18 대회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국가였다.
백하민이 글러브를 들고 일어섰다.
“이렇게 된 거 오늘 경기라도 꼭 이기자.”
“뭐 그런 당연한 말씀을. 전 항상 이길 생각이었어요.”
“하여간 동생이라는 놈이 귀여운 구석이 없네. 한 마디를 안 져요.”
“하민이 형 파이팅!!”
“늦었다. 인제 와서 그래봤자 하나도 안 귀엽거든?”
4회 말 미국팀의 타선은 9번부터.
앞서 공을 여덟 개나 던지고 볼넷으로 내보냈던 조지 테일러가 타석에 들어왔다.
***
긴 이닝을 이끌어 가야 하는 선발 투수가 항상 전력으로 공을 던질 수는 없다. 그렇기에 완급조절은 선발에게는 아주 중요한 능력 중 하나다. 그래서 백하민이 오늘 미국 팀의 하위타선에게 완급조절을 했느냐를 묻는다면 답은 뻔하다.
‘그럴 리가······.’
물론 이전 전국대회 준결승전에서 최수원을 상대했을 때나, 오늘 알렉산더 맥도웰을 상대로 던졌을 때처럼 좋은 공이었는가를 묻는다면 그것까진 아니었다. 그건 백하민 본인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까지 됐던 것에 가까웠으니까.
조지 테일러가 백하민의 공을 골라냈다.
이번 드래프트에 CBB(Competitive Balance Round B). 2라운드와 3라운드 사이의 샌드위치픽 71번으로 지목된 그는 전형적인 OPS히터였다. 선구안이 좋고, 실투를 놓치지 않고 장타로 연결시킬만한 갭파워도 갖췄다.
-딱!!
바로 지금처럼.
이번에도 나쁜 공은 아니었다. 바깥쪽 낮은 코스. 제법 괜찮게 제구된 속구를 조지 테일러가 그대로 잡아당겼다.
내야를 살짝 뚫어내는 안타.
[조지 테일러. 오늘 한국의 투수를 상대로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데 이건 사실 투수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쉽겠어요. 이 정도는 잡아줄 법도 한데 말이죠.]
[하하, 그게 또 학생들 경기의 재미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빅리거들 만큼 완성된 수비가 나올 수가 없으니까요.]
[사실 오늘 한국팀 투수 정말 괜찮았거든요. 지금 6실점에 4자책인데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는 에러만 없었어도 3점 이상 안 내줄 수 있는 경기가 아니었을까? 뭐 그렇습니다. 특히 저기 1루에 Jo? 저 친구의 포구가 참 아쉬웠어요.]
[이거 스미스 해설위원님께서는 오늘 저 한국 투수가 참 마음에 드는 모양이신데요?]
[네, 제가 만약 구단의 스카우트라면 당장 국제유망주 계약으로 데리고 오고 싶은 투수입니다. 사이즈가 좀 작기는 한데 느낌이 아주 좋아요.]
조금 아쉬운 수비였을 뿐 에러는 아니었다.
백하민이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도 무려 여섯 개나 공을 던졌다. 나쁜 결과였다.
[자, 타석에 1번 타자 마크 밀러 선수가 들어옵니다. 4회, 벌써 세 번째 타석입니다. 첫 타석에서는 내야땅볼. 두 번째 타석에서는 2루 주자를 3루로 보내는 외야 뜬공을 기록했던 마크 밀러 선수. 과연 세 번째 타석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타자의 성적이 유의미하게 좋아지는 세 번째 타순.
앞선 두 번의 타석을 통하여 마크 밀러는 백하민에 대하여 어느 정도 파악했다. 속구와 슬라이더. 그리고 고속 슬라이더.
-부웅!!
“스트라잌!!!”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 오늘 마크 밀러 선수, 저 슬라이더에 상당히 고전을 하고 있습니다.]
[슬라이더의 움직임이 상당히 좋습니다. 게다가 각이 큰 80마일가량의 슬라이더와 각이 좀 작은 86마일의 슬라이더. 그리고 92마일의 속구 조합은 상당히 괜찮거든요. 저 투수 오프스피드피치 하나만 장착하면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딱
마크 밀러가 백하민의 두 번째 공을 두들겼다.
바깥으로 날카롭게 빠져나가는 고속슬라이더였다.
그리고 그 결과 힘없는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 완전히 먹힌 타구. 유격수 잡아서 이루수에게 이루수는 다시 일루로. 6-4-3 더블 아웃입니다.]
백하민이 어느새 맺혀있던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냈다.
지금까지가 방심할 수 없는 난적이었다면 이제는 너무 긴장해선 안 되는 강적의 차례였다.
1회 말 첫 타석에는 안타.
그리고 2회 말 두 번째 타석에서는 석 점짜리 홈런을 쳐냈던 미국 최고의 유망주 알렉산더 맥도웰이 타석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긴장감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안중에는 백하민 자신은 없을 수도 있었다. 조금 전 대기 타석에서도 그 시선이 향한 곳은 덕아웃에 앉아 있던 최수원이었으니까.
백하민의 생각은 옳았다.
그는 이미 알렉산더 맥도웰의 안중에 존재하지 않았다.
‘1홈런에 1안타. 음······, 내께 단타이긴 했지만 그래도 난 수비도 하고 있고, 게다가 도루도 하나 했으니까······. 아니야. 괜히 그런 사소한 것까지 다 넣으면 추할 뿐이야. 순수하게 타격으로 이겨야 진짜지.’
백하민이 공을 움켜쥐었다.
그는 또래 가운데 최고의 투수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가끔 그런 적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가끔이 아닐지도 모른다. 상대하는 타자들이 아닌, 그와 ‘맞대결’하는 선발 투수를 더 신경 쓰게 되는 일.
“하민 선수, 모레 결승전에서 조규찬 선수랑 선발 맞대결인데 각오 한말씀 부탁드릴게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런 인터뷰를 할 때의 하민은 분명 경하고의 타자들은 안중에 두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의 알렉산더 맥도웰을 욕할 수 없었다.
그저······, 그저 분할 뿐이었다.
‘나를 봐라!!’
선발 투수의 상대는 상대 팀의 선발 투수가 아니다.
타자의 상대는 상대팀의 타자가 아니다.
백하민이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그득 담아서 공을 뿌렸다.
언제나 그렇듯.
그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으로.
-따악!!!!
알렉산더 맥도웰이 시원하게 그 공을 퍼 올렸다.
깔끔하기 짝이 없는 스윙. 높게 뜬 타구가 저 먼 곳. 중앙 펜스의 전광판을 직격했다.
[알렉산더 맥도웰!! 초구를 잡아당겨 그대로 담장을 넘겨버렸습니다!!!]
[하,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스윙입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지금 저 한국의 투수도 절대 나쁜 실력이 아니거든요. 아마 드래프트에 나왔다면 2라운드? 운이 좋으면 CBA(Competitive Balance Round A)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실력자에요. 이건 그냥 알렉산더 맥도웰의 배트가 터무니없는 것뿐입니다.]
[과연 알렉산더 맥도웰!! 망했을 때의 기대치가 MVP 컨텐더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알렉산더 맥도웰이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리고 3루 베이스를 밟을 때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우쭐한 표정이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뭐랄까? 나는 1홈런에 1안타고 자기는 2홈런에 1안타니까 자기가 이기고 있다. 뭐 그런 표정이랄까?
하지만 그 표정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알렉산더 맥도웰의 뒤편.
나를 향해 그 묘한 표정을 짓는 알렉산더 맥도웰의 뒷통수를 바라보던 백하민의 얼굴이었다. 평소에도 쓸데없이 촉촉한 눈망울은 이제는 아예 축축한 수준으로 톡 하고 건드리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았다. 사실 예쁜 여자라도 저런 눈으로 바라보면 좀 짜증이 날 것 같은데 예쁜 남자 놈이 마운드에서 저런 눈망울을 하고 있으니 보통 짜증나는 게 아니다.
감독님이 코치님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영주는?”
“준비됐습니다.”
“말하면 언제든지 투입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라고 해.”
“지금 안 올리시고요?”
“공은 나쁘지 않았어. 한 타석만 더 지켜보자고.”
감독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한국팀의 누가 오늘 백하민보다 더 잘 던질 수 있을까? 긁히는 날의 조규찬이나 한민준 혹은 나 정도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수준의 차이다. 이미 패스트볼 혁명이 15년 이상 진행 중인 미국과 이제 막 그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한국의 차이.
마운드의 에이스가 미국팀의 3번 타자를 상대로 내야 팝플라이를 끌어냈다.
이닝 종료.
마운드에는 후안 마르티네즈가 올라왔다.
그리고 타석.
오늘 타석에서는 2타수 무안타. 필드에서는 에러 하나를 기록한 규혁 선배가 방망이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