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답답하면?(2)
마린스에서 백하민을 뽑을 당시 내부적으로는 참 말이 많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179cm에 77kg라는 그의 작은 사이즈였다. 물론 일반인을 기준으로 봤을 때는 충분히 큰 키였다. 하지만 KBO의 선발 투수들 평균 키는 185cm에 달한다.
“그 체격으로 153km/h라니 롱런은 절대 힘들 겁니다.”
이미 많은 선례가 존재했다.
구속에 사이즈는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다. 작은 몸을 쥐어짜내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내구성에 사이즈는 절대적인 조건에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하민에게는 반짝반짝 빛나는 무엇인가가 존재했다.
와인드업.
비교적 작은 체구의 극한을 뽑아내려는 듯한 와일드한 코킹. 그리고 반의 반걸음 더 끌고 나온 스트라이드. 번개처럼 휘몰아치는 코킹.
그리고 릴리즈까지 쾅!!!
타석에 선 마크 밀러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이번 드래프트 전체 27번.
그는 올해 1라운드 27번 슬롯머니인 290만 달러에 훨씬 못 미치는 267만 달러에 사인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1라운드는 1라운드. 분명 마크 밀러는 미국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을만한 유망주였다.
하지만 부족했다.
살짝 밀린 타이밍. 타구는 내야를 넘지 못했다.
-뻐엉!!
1루 포스 아웃.
자본주의의 나라 미국.
지금까지 U-18 경기는 모두 너튜브를 통해 중계됐다. 하지만 오늘 미국과 한국의 경기는 달랐다. 무려 ESPN. 물론 메인 방송이 아닌 ESPN-U 채널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전국으로 송출되는 방송 가운데 하나가 이번 경기의 특집 중계를 맡았다.
해설자는 전직 메이저리거인 매니 스미스.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만한 커리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메이저에서 17년을 뛰는 동안 2000안타에 250홈런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던 타자였다.
[와우, 백이라고 했던가요? 오늘 한국 팀의 투수. 아주 다이나믹 하네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공이 위력적입니다.]
[전 개인적으로 제가 어릴 적에 봤던 팀 린스컴 선수와 좀 비슷한 느낌인 것 같군요.]
[아, 듣고 보니 그런 면도 없잖아 있군요. 장발은 아니지만, 체격도 비슷하고 폼도 좀 비슷한 느낌입니다.]
[이거 이렇게 되면 다음 타석이 제법 기대가 되는 데요?]
두 번째 타석.
전미가 지켜보는 야구 천재 알렉산더 맥도웰이 타석에 들어왔다.
역대 최연소 골든스파이크 어워드 수상자.
드래프트 전체 1번.
본래 전체 1번에게 배정된 980만달러의 슬롯머니를 훌쩍 뛰어넘은 1210만 달러 계약의 주인공. 덕분에 캔자스시티 로얄스는 2라운드에 1픽으로 3라운드에나 지명받을 것으로 예측되던 이안 루이스를 픽하는 것으로 보너스 풀을 최대한 당겨 써야만 했다.
마운드의 백하민이 알렉산더 맥도웰을 바라봤다.
이미 한국에서 최수원이라는 규격 외의 재능과 충분 이상으로 붙어봤다. 그렇다면 과연 전미가 인정한 역대 최고의 재능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그 가장 강력한 상대 앞에서 백하민이 눈동자를 빛냈다.
권규종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규찬과 백하민.
두 선수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재능이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그가 선발 투수로 백하민을 선택한 것은 바로 저러한 부분 때문이었다. 권규종 감독은 자신이 프로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로맨티스트라 생각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그를 현대 야구의 과학적 방법이 아닌 구시대의 근성론을 신봉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 매도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직 성장할 여지가 구만리인 이 어린 청소년들의 세계에서는 현재의 실력만큼이나 저러한 부분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물론 미국 팀 타자 선발 가운데 다섯이 좌타자고 넷이 우타자라는 점도 그 결정에 영향을 좀 미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백하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알렉산더 맥도웰이 그를 지켜봤다.
초구.
몸쪽 높은 코스.
-뻐엉!!!
“스트라잌!!!”
깔끔하게 들어간 공.
백하민이 웃었다. 결과도 좋지만, 과정이 더 마음에 들었다. 정확하게 원하던 코스에 꽂힌 공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날카롭게 휘어들어가는 고속 슬라이더.
-딱!!
알렉산더 맥도웰의 배트가 따라 나왔다. 하지만 완벽하게 먹힌 타구가 파울 라인을 넘어갔다.
[하민 백!! 팀 린스컴을 닮은 한국의 투수가 알렉산더 맥도웰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볼카운트 0-2. 이제 타자에게는 너무나도 불리한 카운트입니다.]
[92마일 속구에 이은 86마일의 슬라이더인가요? 코스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고개를 한 번 갸웃한 알렉산더 맥도웰이 잠시 타임을 요청하고 타석 밖으로 나갔다. 장갑을 다시 동여매고 타석에 돌아와 헬멧을 고쳐 썼다. 그리고는 마운드의 백하민을 바라봤다.
마운드에 선 투수에게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세가 느껴졌다.
그 날카로운 기세에 알렉산더 맥도웰이 웃었다. 저 불꽃과 같은 마음이 오롯하게 자신에게 향한다는 것은 언제나 기꺼운 일이다. 그는 한국이라는 곳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저 최수원뿐만 아니라 이런 투수까지 감춰놓고 있었다니 말이다.
역동적인 자세.
마운드의 투수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볼카운트 0-2.
빠지는 공?
아니, 아니다.
바깥쪽 아슬아슬한 코스. 스트라이크 콜을 잡아주지 않으면 그런대로 상관없다는 곳이지만 그 마음 한편에는 삼구삼진이라는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의 감각이 백하민을 분석했다.
압도적인 동체시력.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정보를 처리하고, 그 처리된 정보에 맞게 움직일 수 있는 협응력. 오랜 훈련으로 완성된 그의 체형에 가장 어울리는 타격폼까지.
알렉산더 맥도웰이 움직였다.
마치 벼락처럼.
-딱!!!
그리하여 스윗스팟의 가장 먼 곳.
겨드랑이가 살짝 벌어졌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힘을 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92.8마일로 날아오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하여 100마일에 필적하는 속도로 공이 튕겨 나갔다.
낮은 타구각.
이루수인 박진경이 몸을 던졌지만 소용 없었다. 쏜살같은 타구가 내야를 뚫어냈다.
“쳇······.”
알렉산더 맥도웰이 1루까지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약 3.76초.
매우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타구의 속도도 그에 못지 않게 빨랐다. 도저히 2루까지 갈 시간이 나지 않았다.
아쉬운 단타.
공의 궤적을 완벽히 입력했다고 생각했는데, 볼 끝이 생각보다 밋밋했다. 마운드 위에서 보여주는 기세에 비해 구위는 그리 썩 좋지 못했다.
세 걸음 반. 그리고 거기서 묘하게 조금 더.
백하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뻐엉!!!
빠른 견제구. 하지만 어림 없었다.
알렉산더 맥도웰이 자신의 가슴팍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다시 세 걸음 반. 그리고 거기서 묘하게 조금 더.
이어지는 3번 타자.
세트 포지션.
백하민이 공을······
알렉산더 맥도웰이 달렸다.
완벽한 타이밍. 백하민의 밸런스가 아주 조금 흐트러졌다.
타석의 타자가 방망이를 크게 휘둘렀다.
-부웅!!!
포수 가운데 왼손잡이는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한 가지는 좌타자보다 우타자가 많다는 점이다. 도루 저지를 하기 위해 공을 뿌릴 때 아무래도 타석에 타자가 없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타석에 타자는 좌타자였다.
정병철이 특유의 무릎쏴로 공을 뿌렸다.
-뻐엉!!!
간발의 차이.
이루심이 양팔을 쫙 뻗었다.
“세이프!!”
1사 주자 2루.
경기가 계속됐다.
삼진.
그리고 적시타.
1회 말.
한국은 결국 미국에게 동점을 허용했다.
***
4회.
이미 미국팀의 마운드에는 잭 존슨을 대신하여 후안 마르티네즈라는 녀석이 올라와 있었다.
선발로 나왔던 잭 존슨은 3회에 나한테 장타 얻어 맞고 멘탈이 흔들리더니 정병철에게 적시타까지 두들겨 맞고 강판당했다.
후안 마르티네즈.
이름만 들으면 남미 쪽 녀석 같지만 그래 봬도 이민 3세대로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다. 이번 드래프트에서 샌드위치픽으로 전체 34번이랬던가? 아무튼간 잭 존슨보다 순번은 낮았지만, 오늘 컨디션이 괜찮은 건지 피칭은 훨씬 나았다.
평균 97마일에서 98마일 정도.
우리 타자들이 손도 못 쓰고 방망이를 붕붕 돌려대고 있었다. 뭐, 어제 중국을 상대로 그렇게 신나게 퍼 올렸는데 경기 끝나고 타격폼 교정 안 할 때부터 느낌이 싸하긴 했다.
메이저 타자들도 홈런 더비에 나가면 타격폼 흐트러져서 싫다는 판국에, 수준 낮은 중국 투수들 상대로 그렇게 신나게 방망이 붕붕 휘두른 고등학생들 타격폼이 본래 자기 폼을 유지하길 바라는 건 너무 큰 바람이겠지.
아마 감독님이나 코치님들도 특타를 고민했을 것 같다.
하지만 주말리그, 기껏해야 왕중왕전으로 이주 간 다섯 경기 정도만 경험해본 애들이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아홉 경기를 뛰어야 하는 강행군을 펼치는 상황에서 특타까지 시키는 건 오히려 독이라고 생각했겠지.
저기 덕아웃 구석에서는 백하민이 뚝뚝 흐르는 땀방울을 수건으로 닦아내고 언더 셔츠를 갈아입었다. 운동선수치고 얼굴도 매우 새하얀 편이었는데, 햇빛을 안 받은 몸은 정말 창백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하얬다.
사람은 원래 좀 가무잡잡해져야 근육도 태가 난다. 괜히 보디빌더들이 경기 전에 탄으로 몸을 거멓게 칠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였을까? 정말 몸이 빈약해 보였다. 아마 규혁 선배가 평소였다면 당장에 달려가 쇠를 들자고 재촉할만한 그런 몸으로 확실히 저만한 재능을 갖고 어째서 내가 회귀하기 전의 삶에서는 그런 커리어밖에 남기지 못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쪼유네 막창집에서 술 몇 잔 걸친 쪼유 녀석에게 들었던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3년 차인가에 팔꿈치가 터지고, 1년 재활하고 돌아와서 6개월 만에 어깨가 터졌다던가? 그리고 다시 1년 6개월 재활하고 돌아와서는 옆구리 부상. 그쯤 됐을 때 구속은 140 초반이었고 꾸역꾸역 불펜으로 뛰다가 쪼유보다 1년 일찍 은퇴했다고 들었다.
갈아입은 옷 위로 투수용 점퍼까지 다 걸친 백하민이 자기 자리 놔두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8월의 더운 날씨. 메이저리그처럼 덕아웃 냉방이 잘 되는 것도 아니라서 상당히 불쾌했다.
“수원아.”
“네.”
“네가 어제 했던 말 아직 유효하냐?”
응?
“아니, 왜, 어제 네가 그랬잖아. 대회 끝나고 바로 귀국 안 하고 뉴욕에 NBM센터 라는 곳에서 코칭 좀 받다가 귀국할 계획이라고. 관심 있으면 끼워주겠다며.”
확실히 내가 어제 그런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에이전시랑 영어로 통화를 좀 했는데, 갑자기 나한테 영어 되게 잘한다며 무슨 이야기한 건지 물어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NBM센터에 관해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리고 거기에 관심을 좀 보이는 것 같길래 설명을 좀 해주면서 슬쩍 권유도 한번 해봤다. 물론 그게 순수하게 백하민 녀석을 위해서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사실 대회 끝나고 다른 선수들은 모두 귀국하는데 막내 혼자 미국에 남는 것보다 대표팀 에이스가 미국의 피칭 스튜디오에서 레슨을 받고, 같은 방을 쓰던 막내도 함께 남는다는 그림이 더 보기 좋긴 했다.
물론 당시에는 가격을 듣더니 조금 난색을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역시 MLB 드래프트 상위라운드, 선진야구의 매콤한 맛을 직접 맛봤기 때문일까?
2:6
전광판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백하민의 눈망울이 쓸데없이 촉촉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