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59화 (59/305)

59화. 답답하면?(1)

경기가 끝난 늦은 저녁.

“야, 저기 팔푼이 온다. 팔푼이.”

“조용히 좀 말해라. 들리겠다.”

“들리면 뭐 어때. 내가 뭐 없는 이야기 했냐?”

12타수 1안타.

조규혁이 지난 세 번의 경기에서 받은 성적표였다. 5번에서 시작했던 타순은 어느새 8번까지 떨어졌다.

“솔직히 대회 하나 반짝했다고 데리고 오는 게 말이 되냐? 아무리 최수원이랑 친하다고 그래도 말이야.”

“야, 말조심해. 코치님이 그거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했잖아.”

“에휴, 영재만 불쌍하지 뭐. 지역 예선은 좆빠지게 다 참가해놓고 정작 미국은 애먼 인간이 왔는데 심지어 그 인간이 제대로 하지도 못하네?”

조규혁이 조용히 자기 몫의 음식을 챙겨서 식당 구석으로 걸어갔다.

저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단순히 부진 때문에 생긴 피해의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들의 저 눈빛과 태도가 저들의 말을 유추하게 만들었다.

“선배.”

“어, 왔어?”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모여들었다.

그의 재능이 빛났던 것은 단순히 중앙고등학교라는 범재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국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들. 아니 어쩌면 그것을 넘어 세계 단위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들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빛나는 재능이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멎었다.

아니, 수군거림은 여전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규혁 자신의 부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이 눈부신 재능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실제로 최근 미국 언론에도 최수원과 알렉산더 맥도웰에 관한 이야기가 제법 높은 빈도로 나오고 있었다. 단순히 U-18대회 만이었다면 아무리 대회가 열리는 곳이 미국이더라도 굳이 이렇게까지 집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옆에 이미 알렉산더 맥도웰이라는 전미를 강타한 재능이 있었다.

“뭐에요? 선배답지 않게 왜 그렇게 조금만 시킨 거예요?”

“어? 아니 속이 좀 별로라서.”

잠깐의 고민.

속 시원하게 지금 마음을 털어놓을까?

물론 수원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고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건 말이라도 하면 마음이라도 좀 편해지는 법이다.

“어?”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야, 잠깐만 저거?”

아이들의 시선이 TV로 향했다.

식당의 TV에서는 ESPN의 인기 야구쇼 오늘의 야구가 방송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방송되는 코너는 오늘의 야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너중 하나인 야구의 과학이었다.

전직 메이저리거가 선수의 플레이를 대화면으로 보여주고 그것을 분석해주는 이 코너는 복잡한 매커니즘을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주는 것으로 인기가 높았는데 그 대화면 속에 익숙한 체형의 동양인이 올라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최수원에게 몰려들었다.

“수원아. 저거 너 아니야?”

최수원이 빵을 우물우물 씹으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맞네요. 에이전시가 뭐 제안 온 거 있다고 하더니 저거였나 보네.”

“에이전시?”

“아, 네. 얼마 전에 미국 쪽 에이전시랑 계약했어요. 원래라면 딱히 할 일이 없었을 텐데, 이번 대회가 미국에서 열리는 바람에 일 좀 하는가 본데요?”

“수원이 너 미국 가는 거야?”

“에이, 그거야 모르죠. 그냥 이런 계약은 일단 다 해 놓고 보는 거라서요.”

메이저리그.

보통 아이라면 흥분하기 딱 좋은 소재에도 그저 오늘 식사 메뉴가 뭐 어떻더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그 모습이 참으로 최수원다웠다.

TV에서는 푸짐한 체격의 전직 메이저리거가 뭐라뭐라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그 복잡한 영어 가운데 조규혁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라고는 와우, 판타스틱, 언빌리버블. 같은 단어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여기에 모인 선수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규혁은 지금 자신과 함께 밥을 먹는 이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를 또 한 번 실감했다. 그리고 그에게 1:1로 코칭을 받은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운인지도 함께 실감했다.

징징거리고 싶은 마음이 한순간에 싹 사라졌다. 자신이 이 녀석에게 꾸준하게 원포인트 레슨을 받은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새삼 실감한 탓이었다. 커다란 행운에 질시가 따르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고작 그것조차 이겨내지 못해 징징거린다면 그것은 얼마나 꼴불견인가.

“선배 더 먹으려고요?”

“어. 이거 맛이 제법 괜찮네.”

***

1회 초.

미국 대표팀의 마운드에 잭 존슨이 섰다. 100마일을 던지는 좌완투수로 이번 드래프트 전체 17번. 이번 대표팀에 합류한 여섯 명의 1라운드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시선이 한국팀 덕아웃에 앉아 있는 최수원에게 향했다.

잭 존슨 또래의 선수라면 알렉산더 맥도웰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알렉산더 맥도웰과 함께 여기저기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또 다른 천재.

‘쳇.’

잭 존슨은 그것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그와 함께 이번 대회에 참가한 1라운드들이라면 대부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렉산더 맥도웰은 어린 시절부터 이름난 야구 천재였지만 그들과 제대로 붙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9학년을 끝내고 훌쩍 대학으로 떠나버린 탓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내심 알렉산더 맥도웰이 그만한 여론의 집중을 받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심지어 저 최수원이라는 녀석은 그것보다 더 심했다. 알렉산더 맥도웰은 그래도 대학리그의 우수한 투수들을 상대로 자신을 증명했다.

하지만 저 녀석은 기껏해야 호주나 중국, 일본. 자신들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상대들에게 홈런 몇 방 쳤을 뿐이다, 헌데 언론은 세기의 천재니 뭐니. 그 타격폼이 완벽에 가깝다느니 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타석에 한국팀의 첫 번째 타자 박진경이 올라왔다.

초구.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 157km/h의 공이 날아들었다.

박진경이 황급히 뒤로 몸을 피했다.

-뻐엉!!!

손에서 살짝 공이 빠졌다.

박진경이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얼굴이 살짝 붉게 상기된 것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두 번째.

바깥쪽 낮은 코스.

-부웅!!!

박진경의 방망이가 따라나왔다.

“스트라잌!!!”

이번에도 제구가 조금 아쉬웠다. 가운데로 많이 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진경의 방망이는 헛돌았다. 전광판에는 99.3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159.8km/h. 박진경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0.02초도 되지 않는 작은 차이였지만 그 작은 차이는 실로 거대했다.

세 번째. 파울.

그리고 네 번째.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변화구는 없었다.

박진경이 혀를 내둘렀다.

“야, 어제랑은 완전 차원이 달라.”

“당연하지. 138이랑 160이랑 어디 같냐? 그런 거 말고 뭐 도움 될만한 말은 없어?”

“나한테 던진 건 전부 속구였어. 타이밍은 그제 그 나카무라라는 놈보다 반박자 빠른 느낌이야. 차라리 일본이랑 하고 오늘 얘들 바로 만났으면 더 나았겠다 싶더라. 어제 느린 공에 몸이 너무 맞춰진 느낌이야.”

이어지는 한국 대표팀의 2번 타자 강창욱이 별반 도움이 안되는 조언을 듣고 타석에 들어왔다.

그리고 드래프트 1라운드 17번.

계약금만 450만 달러. 마운드의 잭 존슨이 자신의 몸값에 걸맞은 위력을 뽐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삼구삼진.

권규종 감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잭 존슨의 공은 분명 위력적이었다. 159km/h는 이 아이들로서는 태어나 처음 경험해보는 구속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너무 무기력했다.

타석에 최수원이 들어갔다.

***

내 바로 앞의 타순이었던 강창욱이 별반 도움이 안되는 말을 해주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공이 졸라 빠르다는 소리는 굳이 듣지 않더라도 저기 전광판에 찍힌 98.7이라는 숫자만으로 충분했다.

마운드의 잭 존슨이 거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 물론 잭 존슨이라는 투수가 처음은 아니었다. 회귀 직전까지도 녀석은 꾸역꾸역 메이저에서 버티던 투수였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것은 저 거만한 표정이었다. 내가 타석에 섰을 때 녀석이 보일 수 있는 표정은 잔뜩 긴장했지만 긴장하지 않은 척 애쓰는 표정 뿐이었으니까.

녀석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그 자세가 매우 정직했다.

‘나 지금 공 던진다. 구종은 속구야.’

분명 99마일짜리 속구면 회귀 이전 녀석이 던지던 공보다 3마일 이상 빠른 공이었다. 하지만 회귀 이전 서른다섯의 녀석과 지금의 녀석 가운데 누가 더 위협적인 투수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3마일 더 느린 공을 던지던 회귀 이전의 녀석이라고 확신했다.

회귀 이전의 녀석의 레퍼토리는 포심 대신 커터를 기본으로 삼고, 중간중간 쓸만한 오프스피드 피치를 섞어주는 방식이었다.

어째서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가 던지는 99마일짜리 속구로는 2030년대의 빅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했으니까.

-딱!!!

‘나 잡아 드십쇼.’ 하고 한복판으로 날아드는 99마일짜리 속구를 완벽하게 잡아당겼다. 지켜 볼 필요도 없었다. 가볍게 1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담장을 향해 달려가던 좌익수가 멈춰섰다. 어딘가에 하이라이트 필름에 나오는 수비처럼 담장이라도 밟고 뛰어올라 훔쳐낼 만한 타구가 아니었다. 고작 U-18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빽빽한 외야의 최상단. 누군가가 야구공을 높게 치켜들었다.

양쪽 2.0의 내 시력으로 판단할 때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로 보였다. 야구 선수란 적어도 어린 아이들에게는 꿈과 희망이 돼야 한다. KBO에 있던 시절에 배운 건 아니었다. MLB에서 뛸 당시 1년에 2번씩 하던 구단 자체 교육에서 꼭 하던 말이었다.

녀석을 향해 번쩍 오른손을 들어 주었다.

홈런볼을 주워든 아이가 자지러지듯이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 메이저리거는커녕 아직 프로도 못 된 애송이지만 녀석에게는 아주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만약 녀석이 물건을 잘 정리해두는 습관이 있어 몇 년 정도 공을 잘 보관한다면 추억 이상의 무언가가 될 것이고.

“나이스 배팅.”

정병철이 오른손을 높게 들었다.

-짝!!

가벼운 하이파이브.

“뭐 힌트라도 있어?”

“글쎄요. 공은 빠른데 커맨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아요. 게다가 대충 얼굴 보니까 딱히 멘탈도 단단한 편 아닌 것 같고. 시원하게 방망이 돌려보시면 될 것 같은데요?”

“그래?”

나의 조언처럼 잭 존슨은 구위나 구속에 비해 멘탈이 그리 단단한 투수가 아니었다. 그만한 공을 갖고도 마무리를 뛰지 못하고 오프너로만 뛰었던 것은 두들겨 맞은 직후 수습이 안되던 저 멘탈 때문이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그렇게 수습이 안된 멘탈로 던지는 공조차 오늘 정병철은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슬슬 이럴 때가 된 것도 있긴 했지만 역시 어제 중국전이 독이 된 것 같았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정병철이 시원하게 방망이를 돌리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1회 말 미국의 공격.

오늘 미국전 권규종 감독의 선택은 백하민.

홀로 순정 만화 그림체로 그려진 것 같은 남자가 마운드 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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