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괴물 신인(1)
WBSC 2025 U-18 Baseball World Cup
이번 대회에 칼을 갈고 나선 것은 한국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경우 바로 직전 대회인 2023 U-18 월드컵에서 크게 낭패를 경험했다.
전전 대회였던 2022년 플로리다주 브레이든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디펜딩 챔피언 미국은 2023 대회에서 B조 4위로 슈퍼라운드 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물론 미국이 언제나 메달을 땄던 것은 아니다. 1981년 대회가 시작된 이래 서른번의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두 번이나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2004년과 2010년의 경기가 그 두 번이었다. 하지만 그 두 번을 포함한 서른번의 대회 가운데 조별 예선에서 떨어진 것은 2023 대회가 처음이었다. 스스로 야구의 종주국을 자랑하는 미국으로써는 매우 크게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물론 미국은 WBSC에서 주최하는 대회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크게 이슈가 안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자극적인 기사를 찾는 기자들은 존재하는 법이었고, 자본주의 그 자체인 미국은 더더욱 그러하였다.
-20명의 대표 가운데 3라운드 이내 드래프트는 조나단 토마스 단 한 사람뿐!!
-미국의 야구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일본, 한국, 대만, 쿠바는 물론 네덜란드에게까지 패배한 미국 야구의 현주소.
사실 드래프트 상위라운드 선수가 WBSC U-18월드컵에 나오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WBSC에서 주최하는 가장 큰 대회인 프리미어12에 40인 이내 선수 차출 금지까지 걸어댈 정도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요상한 분위기 덕분이었을까?
가장 먼저 칼을 뽑고 나선 것은 현재 미국 전체에 가장 널리 이름을 알리고 있는 알렉산더 맥도웰이었다.
10대 초반부터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그는 고작 15살의 나이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전문 대학에 입학했다. 15년 전 브라이스 하퍼보다 1년 빠른 행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성급하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고작 만 16세의 나이에 아마추어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골든 스파이크 어워드를 수상. 그 결과 보통이라면 아직 고등학교 11학년에 재학해야 하는 나이인 17세하고 3일. 그는 켄자스시티 로얄스에 전체 1번으로 드래프트 됐다.
본래라면 한참 리그가 진행 중인 이 시점에 U-18 대회 따위가 화제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려 알렉산더 맥도웰이었다. 현재 모든 아마추어 가운데 가장 화제를 몰고 다니는 사나이.
ESPN을 비롯한 각종 언론의 메인에 U-18대회 관련된 기사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바로 직전 2023년 대회에서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던 것이 또 한 번 부각됐다.
그리고 알렉산더 맥도웰의 참전 소식에 자극을 받아서일까? 아니면 직전 대회 조별리그 탈락 뉴스가 그들을 자극해서일까?
알렉산더 맥도웰을 제외하고 드래프트 1라운드 가운데 U-18의 대상이 되는 선수의 숫자는 총 열하나. 그 가운데 무려 다섯 명이 이번 U-18 대회에 참전을 알렸다. 나머지 선수들 역시 대부분이 3라운드 이내. 3라운드 밖에서 뽑혀온 선수는 팀의 두 번째 포수인 체이스 엘렌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1981년 이후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U-18 야구 월드컵 가운데 최강의 전력인 셈이었다.
“네? 우승이 목표냐고요?”
기자의 질문에 알렉산더 맥도웰이 웃었다.
“세상에 저녁밥 먹는 걸 목표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건 목표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예정이라고 하는 거죠. 뭐, 굳이 이번 대회에 목표를 잡아보자면 무패 정도 되겠군요.”
야구란 3번을 싸워 한 번을 이기고, 한 번을 지고, 나머지 한 번에서 승패가 결정 나는 게임이라는 말이 있다. 적어도 같은 수준의 리그를 뛰는 팀이라면 3할의 승률은 나오는 것이 정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 맥도웰의 이야기를 비웃는 기자는 없었다. 마치 1992년의 드림팀이 금메달을 말할 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
뉴욕주의 올버니.
메이저 스포츠팀은 하나도 없는 작은 도시로 회귀 전의 나는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던 곳이었다. 뭐, 뉴욕주의 주도라고는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별다른 특색 없는 딱 그저 그런 중소도시였다.
국제대회라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U-18. 벌떼와 같은 기자들이 공항을 통과하는 우리를 반기는 일 따위는 없었다. 아, 사실 그건 대부분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는데, 때마침 우리와 같은 시간에 도착한 대만팀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녀석들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국제대회 위상에 어울리는 기자들이 따라 붙었다.
“쟤들은 무슨 기자들을 저렇게 달고 다녀?”
“쟤들은 우승할 가능성 있는 국제대회가 딱 연령 별 대표밖에 없잖아.”
누군가의 질문에 정병철이 짧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U-18이나 U-23 정도는 대만도 간간이 우승한다지만 성인팀 단위로 오면 솔직히 수준 차이가 제법 난다. NPB가 AAA~AAAA급. KBO가 AA~AAA급이라면 쟤들은 기껏해야 상위싱글 A급이다.
감독님이 적당히 기자 몇 명을 상대하고 미리 마중 나와있던 버스에 몸을 실었다. 사람은 스물세 명인데 세줄짜리 좌석 버스가 아니라 네줄짜리 좌석 버스였다. 비행기만 이코노미석인 게 아니라 버스까지 이코노미석 수준이다. 게다가 털털거리기는 얼마나 또 털털거리는지 솔직히 학교에서 대절하는 버스 가운데 꽝을 뽑아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싶은 수준의 버스였다.
“와, 수원아. 저기 좀 봐봐.”
옆에 앉은 규혁 선배가 지나가는 건물을 바라보며 좋아했다.
솔직히 아무리 봐도 그냥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벽돌 건물이었다. 하지만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이라고 했으니 이해해줘야겠지.
“세상에······.”
아,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속마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도착한 숙소가 내가 미국에 생활 할 때 마이너리거들의 눈물 젖은 빵을 대표하던 바로 그 2층짜리 모텔이었다.
“자자, 다들 내리고. 방 배정은 미리 이야기한 대로 쓰면 된다. 일단 짐 풀고 이따가 밥 먹을 때까지는 좀 쉬어라. 괜히 길도 모르는 데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내 방 찾아오고. 알겠어?”
“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건물이 그래도 비교적 새로 지어진 건물이라는 점이었다. 침대 시트도 얼룩 같은 건 없이 빳빳했고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걱정했는데 방 좋은데? 역시 미국인가? 내가 창가 쪽 침대 쓴다?”
“네.”
나의 룸메이트는 백하민.
내심 규혁 선배와 같은 방을 썼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 보통 투수는 투수끼리, 타자는 타자끼리 같은 방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것을 생각해볼 때 아무래도 감독님은 나를 투수로도 활용해 볼 요량인 듯싶었다.
-똑똑
한참 짐을 풀고 잠시 굳은 몸을 풀어볼까 하는 찰나에 누군가가 문을 두들기더니 벌컥 문을 열었다. 아니, 안에 반응도 안 들을 거면서 대체 노크는 왜 하는 걸까?
“코치님?”
“짐은 다 풀었구나. 잘됐다. 고려일보에서 인터뷰 나왔는데 팀의 막내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다고 하더라.”
“네.”
고려일보라면 지연이가 근무하는 회사다.
뭐, 본래의 역사대로라면 지금 즈음 회사를 때려치우고 공중파 방송국에 입사 준비를 할 시기일 것이다. 물론 정병철이 부산 마린스 대신 서울 엘리츠를 가고 규혁 선배가 창원 블레이즈에 입단하는 상황에서 지연이라고 이전 삶과 똑같게 움직이라는 법은 없긴 했다.
“안녕하세요.”
“오, 최수원 선수 반갑습니다. 고려일보 이영주 기자입니다. 이야기는 참 많이 들었어요.”
“네?”
“아, 후배 하나가 최수원 선수 팬이라서요. 저희 신문 보면 최수원 선수 기사 제법 많이 내보내는 편인데. 그게 다 그 녀석 때문입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어휴, 감사는 앞으로 저희가 해야죠. 그 기사들이며 사진들이며 나중에 여기저기 잔뜩 인용될 것 같던데요.”
서로 간단하게 인사를 끝내고 고려일보의 기자가 의례적인 질문들을 몇 가지 던져왔다. 대표팀의 유일한 2학년으로 소감은 어떠한 가부터 시작된 질문들에 그냥 적당히 정석적으로 대답해주었다.
“국제대회는 처음일 텐데 컨디션은 좀 어떤 가요? 많이 긴장되고 그러지는 않나요?”
“나쁘지 않습니다. 딱히 더 긴장되고 그런 것도 없고요. 다만 버스가 조금 더 좋은 버스면 좋았겠다. 뭐 그 정도?”
“하하하, 그렇군요. 아, 참. 이번에 U-18 대회에 참가한 최연소 선수인 알렉산더 맥도웰 선수가 미국팀의 우승은 저녁 식사를 하는 것과 같은 일이고 목표를 굳이 잡자면 무패우승을 목표라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혹시 특별히 할 말이 있을까요?”
“알렉산더 맥도웰이요?”
“이번에 MLB 드래프트 전체 1픽으로 뽑힌 선수입니다.”
“아, 저도 누군지는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냥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할만한 선수인가를 잠깐 떠올리느라요. 근데 혹시 맥도웰 선수 요즘 다이어트 중이랍니까? 다이어트도 저녁 굶어가면서 하는 것보다 삼시세끼 적당히 챙겨 먹으면서 운동하는 게 더 좋을 텐데요.”
나의 대답에 이영주 기자가 크게 웃었다.
그리고 특별한 것 없던 인터뷰는 그렇게 끝이 났다.
***
WBSC U-18 월드컵은 총 12개의 국가가 2개 조로 나뉘어 오프닝 라운드를 펼치고 거기서 3등까지를 가려낸 후 다시 슈퍼라운드를 펼친다. 그리고 오프닝 라운드와 슈퍼라운드 성적을 결산하여 마지막 결승전과 3, 4위전을 치르는데 결국 4위 이내는 리그전. 그리고 마지막 순위결정전은 단판 토너먼트의 성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번 대회의 경우 A조에 한국, 미국, 일본, 쿠바, 중국, 호주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B조가 대만, 캐나다, 이탈리아, 멕시코, 니카라과, 네덜란드로 편성된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지옥의 조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우리의 첫 상대는 호주.
감독님이 우리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비록 호주 야구의 수준이 우리보다 조금 낮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최근에 아주 많이 올라왔다. 특히 호주 리그도 최상위 팀은 KBO 1군 팀에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이야. 그리고 저기 저 애들도 모두가 내년부터 호주 리그에서 바로 뛸 애들이다. 특히 오늘 선발로 나오는 투수는 피츠버그랑 120만 달러에 계약한 선수로 이 경기 끝나면 호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곧바로 미국에서 야구 할 녀석이다. 그러니까 절대 방심하지 말고. 확실하게 승리 가져오자.”
“네!!!”
선두타자 헛스윙 삼진.
두 번째 타자 중전 안타.
그리고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오늘 호주팀 마운드에 선 투수의 얼굴은 내 기억에 없었다.
마운드의 투수가 첫 번째 공을 던졌다.
바깥 코스 꽉 찬 속구. 좋은 공이었다.
과연 피츠버그와 120만 달러에 계약했다고 하더니 그럴만한 유망주의 공이었다.
-딱!!
물론 좋고 나쁨은 언제나 상대적인 법이었고, 아쉽게도 오늘 호주팀의 선발이 던지는 공은 나에게는 치기 딱 좋은 공이었다.
1회 초. 2점 홈런.
여유롭게 그라운드를 돌아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2:0.
홈런보다 나은 안타가 존재하는가.
뭐,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호주의 선발 투수에게는 홈런보다 나은 안타 따윈 없었다. 1회 초 나에게 홈런을 맞은 그는 뒤이어 올라온 정병철에게 백투백 홈런을 헌납했다.
경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오늘 우리 팀은 선발로 백원고의 한민준을 내보냈다. 지난 하반기 왕중왕전에서 2라운드에서 노히트를 한 덕분에 3라운드에서 우리에게 공 하나 던져 보지 못하고 탈락했던 바로 그 한민준이었다.
7회 13:0 콜드게임.
우리가 당연히 이겨야 할 팀을 가볍게 제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