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말은 텍사스로 사람은 뉴욕으로(2)
에이전시는 매우 중요하다.
회귀 전의 나는 에이전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KBO는 그 특성상 미국과 같은 형태의 에이전시가 자리 잡지를 못했다. 덕분에 나는 포스팅으로 미국에 진출할 적에 그냥 적당히 말 잘하고 마음에 드는 에이전시를 선택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최악의 실수 중 하나였다.
물론 그렇다고 내 에이전시였던 잭이 사기꾼 같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제법 능력도 있었으며 인망도 있는 편이라 많은 선수들이 그를 따랐다.
심지어 유망주 시절에 계약해서 FA까지 끝내고 다시 코치까지 하는 기간동안 꾸준히 계약을 유지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와는 맞지 않았다.
그는 중하위부터 중상위까지의 선수들을 케어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구단과의 협상 역시 그쪽으로는 도가 텄다.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물론 중위권 선수의 사정을 잘 헤아리고 적절한 수준의 팀과 협상력을 갖춘 에이전시가 꼭 나쁜 에이전시는 아니다. 하지만 레디메이드와 오더메이드를 파는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중위권 선수들이 레디메이드 제품이라면 나는 오더메이드 제품이나 다름 없었다. 여러 팀의 사정들을 두루두루 살펴가며 협상을 해야 하는 선수가 아닌, 오히려 팀에서 나에게 맞춰야 하는 리그 최고 수준의 선수다.
하지만 그는 그런 협상을 해내지 못했고 나 역시 그것을 그저 시장이 좋지 않았던 탓이라 치부해버렸다. 또한, 선수의 케어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내가 에이전시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는 없다는 점이었는데 그건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제임스 코퍼레이션의 테드 박이 처음 명함을 주고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통보했다.
“넌 이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운동에나 집중해라.”
대화가 아닌 통보. 그것도 실로 퉁명스러운 통보였다.
아마 열여섯 살의 나였다면 나도 이제 다 컸다고. 괜히 크게 반발할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저건 아버지 나름의 애정 표현이었고, 이럴 때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내가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밝히고 지원을 받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위해 더 좋은 일이라는 것을.
“에이스급 투수를 보유한 에이전시면 좋겠어요. 계약조건이 좋고 영업력이 좋아서 FA 다될 때 낚아채는 그런 에이전시 말고요. 에이전시 자체적으로 체육관을 운용하는 곳이면 더 좋아요. 물론 동네 체육관 말고 좀 제대로 된 곳으로요. 그게 아니라면 NBM센터 쪽이랑 연계가 잘 된 에이전시로 알아봐주셔도 좋아요.”
“NBM 센터?”
“네, 제가 본래 미국에 가면 피칭을 배우고 싶던 곳이에요.”
“유명한 곳이냐?”
사실 NBM센터는 유명한 곳이라기보다는 유명해질 곳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현재에도 바이오매카닉 피칭이론을 적용한 센터나 스튜디오는 많았다. 게다가 그들이 사용하는 고가의 기기 역시 그 브랜드나 미세한 성능 차이는 존재할지라도 그 편차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센터들 사이에는 엄연한 수준차이가 존재했다.
결국 사람이었다.
바이오매카닉 피칭 이론도, 그 수많은 고가의 장비들도 결국 도구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 그 자체다.
NBM센터를 창립한 워싱턴 형제는 콜롬비아 대학의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아마존에서 레벨 7까지 올라갔던 재원이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한 인재는 흔하지만 능력까지 입증한 인재는 흔하지 않았다. 구글, 월마트를 비롯하여 각종 글로벌 기업에서 그들 형제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뜬금없게도 바이오매카닉 피칭에 관련된 센터를 창업했다.
그들이 NBM 센터를 열고 그들의 이론을 주변에 전파할 때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었다. 물론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들이기는 했지만 세상은 때때로 이야기의 내용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신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그들이 빛을 보는 것은 몇 년 뒤 콜롬비아대학의 투수진들이 NCAA division 1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이후부터였다. 정확히 몇 년 뒤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미국에 갔을 때 NBM센터는 이미 리그의 주류로 올라서 있었다.
“아직은 그렇게까지 유명한 곳은 아니에요.”
“모든 유명세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돈이 문제라면 내가 충분히 도와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최고로 구해도 괜찮다.”
“애플도 처음에는 차고에 모인 세 명의 괴짜였어요.”
“하지만 차고에 모인 모든 괴짜들이 스티브잡스가 되는 건 아니지.”
내가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봤다.
“하지만 차고에 모인 모든 괴짜들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스티브잡스가 될 거라 믿고 차고를 빌려주셨죠.”
“······.”
‘제가 미래를 보고 와서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고 그렇기에 논리로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어디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 논리뿐이라던가?
“알았다. 일단 한 번 생각을 좀 해보자꾸나.”
**
이진우가 기숙사를 떠났다. 그 외에도 두 명이 더 기숙사를 나갔다. 하지만 안병영은 기숙사를 나가지 않았다. 3학년들은 이제 거의 훈련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훈련에 참가했고 저녁 늦게까지 쉐도우피칭으로 자신의 폼을 가다듬었다. 덕분에 최수원이 알려준 폼은 점점 몸에 익어갔다.
‘지금이라면······.’
어쩌면 지금 다시 천남고를 상대한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몇몇 친구들이 그에게 충고를 했다.
그래도 4등급은 나와야 인서울 학교를 노려볼 수 있고, 6등급은 나와야 쓸만한 대학을 갈 수 있다고. 지금이라도 바짝 각잡고 암기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아니, 난 프로에 갈 거야.”
친구들은 안병영을 비웃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적어도 앞에서 대놓고는 비웃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은 1, 2년 전에 포기했던 꿈을 아직도 꾸고 있구나. 어정쩡한 재능이라는 것이 저토록 무서운 것이로구나. 그렇게 여겼을 뿐이다.
“그래, 어쩌면 너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진우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격려했다.
아마 녀석이라면 안병영 자신의 각오를 알아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애늙은이 같은 녀석은 쓸데없이 남의 속마음을 잘 읽는 재주가 있었으니까.
최수원과 조규혁의 미국행이 결정 났다.
U-18 야구 월드컵 대표.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규혁이나 자신이나 처지가 별 반 다를것이 없었는데 이제는 너무 크게 벌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안병영은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조규혁이 고작 몇 달만에 그렇게 바뀔 수 있었다. 안병영 자신이라고 그러지 못하라는 법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갔다.
최수원이 미국의 에이전시를 누구 고용하네 마네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드래프트에 관한 각종 루머들이 선수들 사이에 나돌았다. 그 루머들 가운데는 심지어 조규혁을 1라운더로 생각하는 팀이 있다는 루머도 있었다.
그때마다 안병영은 수건을 휘둘렀다.
-퍼엉!!
수건이 공기를 때리는 소리가 참으로 좋았다. 드래프트 날이 성큼 다가왔다.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기대를 했다고 해도 역시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빳빳한 새 언더웨어와 완벽하게 세탁된 유니폼.
안병영은 항상 꿈꿨었다. 드래프트 날 딱 저렇게 입고 소곡동의 특급호텔로 가는 것을. 하지만 지금 중앙고에서 그런 자격을 얻은 것은 조규혁 뿐이었다.
“단톡에 1라운더라는 소문도 돌던데 결과 잘 나왔으면 좋겠다.”
“1라운더는 무슨······. 잘해야 4라운드지. 병영이 너도 좋은 결과 나올거다.”
“그랬으면 좋겠네.”
조규혁이 감독님의 차를 타고 출발했다.
안병영 역시 희망의 끈을 아직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드래프트로 뽑히는 선수의 숫자는 최대 110명. 그 가운데 오늘 소곡동 호텔로 초대받은 선수의 숫자는 40명에 불과했다. 여전히 70자리는 남아 있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야구를 하는 고교생들 가운데 적어도 수백 명이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은 채, 책상 위의 컴퓨터 모니터로 현장 중계를 지켜봤다. 안병영 역시 그와 같았다.
기숙사 방 안에는 오직 안병영뿐이었다.
그와 함께 방을 쓰는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리를 피했다. 이진우가 함께 해주겠노라 이야기했지만 거절했다. 이진우가 홀로 기숙사 문밖을 나갔던 것처럼 안병영 역시 홀로 이 순간을 감내하고 싶었다.
“아, 저기 백하민 선수가 보입니다. 이번 드래프트 전체 1번으로 아주 유력한 선수죠?”
“네, 사실상 천남고 백하민, 경하고 조규찬. 그리고 정병철의 삼파전이라고 봐도 무방할겁니다.”
“물론 야구는 언제나 의외성 투성이고, 이런 자리일수록 생각지도 못했던 선수가 깜짝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하반기 왕중왕전에서 노히트를 기록했던 백원고 3학년 한민준 선수도 어떻게 보면 참 좋은 선수거든요.”
“아, 백하민 선수, 카메라를 보면서 웃네요. 참 보통 멘탈이 아니에요. 사실 프로 선수들도 경기라면 몰라도 이런 자리에서는 긴장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기 다른 선수들 딱딱하게 굳어있는 모습과 참 대조적입니다.”
“드래프트 순서에 이런 부분도 영향을 줄까요?”
“하하, 글쎄요. 하지만 6툴이라는 아주 오래된 말도 있고, 백하민 선수는 그 여섯 번째 툴까지 갖춘 선수이니 저런 성격까지 더해서 참 스타성이 있긴 하죠.”
모니터 속에 비치는 아이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 함께 시합을 뛰었던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멀게 느껴졌다. 심지어 한 시간 전 그와 이야기를 나눴던 조규혁조차도 말이다.
드래프트 전체 1번.
작년의 꼴찌였던 마린스의 단장이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긴 자기 소개. 꼴찌에 대한 변. 내년에는 첫 번째를 양보하겠다는 의례적인 인사.
모니터 왼쪽의 채팅방에 글이 순식간에 폭주했다.
─사직수원: 전가놈 미쳤네. 내년엔 무적권 꼴찌해서 최수원 데리고 와야지.
─again1982: 최수원 안경 안 낌?
“지명하겠습니다. 서울 천남고 투수 백. 하. 민.”
놀란 표정은 없었다.
조금 더 길어진 곱슬머리를 찰랑거리며 백하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드래프트가 이어졌다. 누구나 예상할만한 선수들이 상위픽으로 쭉쭉 사라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조규혁은 그 스스로의 예상처럼 4라운드 전체 4번으로 창원 블레이즈에 지명이 됐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일어나 인사를 하는 모습이 참으로 어설펐다.
그리고 슬슬 소곡동 호텔에 없는 선수들의 이름이 불리기 시작했다. 호명된 선수의 자료 화면이 점점 더 빈약해졌고 그 만큼 모니터 속 화면이 점점 더 빠르게 전환이 됐다.
5라운드, 6라운드, 7라운드, 8라운드.
새하얗게 질린 안병영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스카우트들이 중앙고를 다녀갔다. 드래프트로 이 바쁜 와중에 말이다. 물론 최수원을 보기 위해 왔겠지. 하지만 그 중에 누군가. 단 하나라도 자신을 목격 했다면. 그렇다면······.
9라운드.
10라운드.
그리고 마지막 11라운드.
안병영이 마침내 고개를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