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말은 텍사스로 사람은 뉴욕으로(1)
은퇴하는 3학년들과는 상관없이 2025년 고교야구의 8월은 여전히 바빴다.
우선 전국 4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봉황대기가 있었고 3학년들이 앞으로 야구를 계속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하는 2026 드래프트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WBSC U-18 야구 월드컵.
국제야구연맹에서 주최하는 18세 미만 야구 월드컵도 있었다.
“이번에 오타니룰은 어떻게 될 예정이래?”
“이번 대회는 적용이 안 될 거라고 합니다.”
“그래? 쯧, 하여간 WBSC도 어지간히 좀 하지. MLB랑 각 세워서 좋을 게 뭐라고.”
WBSC.
국제야구연맹은 축구로 치자면 FIFA와 같은 존재다. 하지만 FIFA가 축구계에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기관이라면 WBSC는 MLB. 아니, NPB나 KBO보다도 그 규모 면에서 적었다. 결국 힘은 돈에서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대회가 월드컵인 것에 반해 야구의 경우 WBSC에서 주최하는 국제대회인 프리미어12의 자금 규모는 MLB는 물론이거니와 NPB나 KBO에 비해서도 초라하다. 심지어 MLB에서 주최하는 국제대회인 WBC 쪽이 프리미어12보다 몇 배나 클 지경이다.
“걔들 생각이야 저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베이스볼5니 뭐니 하는 이상한 종목이나 개발하고 있겠죠. 아무튼간 최수원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 지금 선수단 전체를 걔한테 어떻게 맞춰야 하나 고민해야하는 판국에.”
“아니, 그래도 2학년인데 그 정도까지는······.”
“2학년? 이봐 김 코치. 세상에 어느 2학년이 리그에서 배리 본즈 놀이를 하고 있나? 걘 지금 고교리그에서 뛰면 안 되는 아이야. 루키리그에 만약 그런 애가 있잖아? 장담하는데 양키스 아닌 이상에서야 싱글A 건너뛰고 바로 더블A에서 시험해본다. 그것도 이번 왕중왕전 기준 말고, 주말리그에서 뛰는 거 보자마자.”
“그 정도까지 보십니까?”
“지금 그 정도까지 안 보는 게 이상하지. 투수로는 노히트. 타자로는 홈런왕인데.”
“하지만 투수로는 그 한 경기 보여준 게 전부고. 그 이전 경기는 그 정도까지는······. 아직 제구도 좀 문제가 있고요.”
“156km/h를 던지는 열일곱 살이야. 걔 지금 프로필이 190에 83kg이지?”
“그게 듣기로는 최근에 좀 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권규종 감독이 태블릿을 들어 최근 최수원의 경기 장면을 다시 살폈다.
“그러네. 확실히 좀 단단해졌네. 근데 그래봤자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90언더야. 장담하는데 얘 딱 20kg만 증량하잖아? 160 너끈히 찍는다. 게다가 제구? 100마일을 던지는 데 로케이션이 무슨 문제야. 그냥 뻥뻥 가운데에만 던져도 어지간한 타자들은 제대로 치지도 못할 텐데.”
“그러면 혹시 에이스로도 최수원을 생각 중이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내가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최수원이가 20kg 증량해서 160 던질 때 이야기고. 지금 투수로의 완성도는 백하민이나 조규찬 쪽이 훨씬 낫지. 뭐 다행히 좌완이랑 우완이니까 상대 팀 봐가면서 써 먹어보자고.”
“네, 알겠습니다.”
잠깐의 침묵.
-타다닥. 잠시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만이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내야수 쪽이 조금 애매하군.”
“내야수쪽이요? 경하고 박진경이랑 최영재. 천남고에 강정구. 광일고에 한주경. 이렇게 넷 생각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근데 조규혁이 좀 애매해서 말이야.”
“중앙고 조규혁라면······. 최근에 좀 두각을 드러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좀 부족하지 않을까요?”
“최수원이가 이번에 대표팀은 처음이잖아.”
“네, 중학생 때는 아무래도 체격 문제가······.”
“체격은 무슨······. 기록 보니까 충분히 나갈만했는데 그냥 지역 배분에서 밀린 거지.”
“하하······.”
권규종 감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대한민국에 협회 붙은 거 치고 제대로 돌아가는 건 양궁 정도밖에 없다는 것은 상식이라지만 그래도 이만한 인재가 고작 그런 장난질 때문에 일찍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중앙고와 같은 낙후된 학교에 들어가게 만든 것은 명백히 선을 넘은 짓이다.
“최영재 빼고 조규혁이 넣자고.”
“네?”
“뭘 그리 놀래?”
“하지만 영재는 작년부터 경하고에 주축으로······.”
“경하고가 뭐? 그래, 작년이랑 올해 경하고가 잘 나간 건 알겠어. 그래서 이번에 경하고에서 넷이나 뽑잖아. 왜? 경하고 감독 눈치 보여? 이번에 프로팀에 수석코치로 간다고 그래서?”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감독님. 그냥 실적 보고 말씀드리는 거죠. 실적. 게다가 경하고 애들 중학교 때부터 대표 생활 같이했고 호흡도 잘 맞으니까요.”
엄밀하게 실적만 따져도 잠깐 반짝한 조규혁과 2년간 꾸준히 성적을 보여준 최영재 가운데 당연히 최영재를 뽑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어디 이 바닥이 실적만으로 돌아가는 바닥이던가.
“그래, 호흡. 그래서 조규혁이 넣자는 거지. 경하고야 최영재 빠져도 넷이잖아. 근데 수원이는 뭐 중학교 대표도 한 적 없고 여기 오면 아는 얼굴 하나 없는 거잖아. 게다가 주변은 죄다 형들일 텐데 말이야. 아는 얼굴 하나는 넣어줘야지.”
“하지만······.”
“게다가 조규혁 정도면 아예 말도 안 되는 인선은 아니잖아. 그래도 하반기 천남고 포함된 서울 B권역 OPS 2위에 이번 왕중왕전도 3홈런으로 홈런왕이고. 타율이야 조금 그렇다고 해도 고교야구 선수가 고작 2개월 만에 홈런을 4개나 때렸는데 뽑아줄 만하지.”
U-18 선수 선발 권한의 최종 결정권은 감독이 갖는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의미이며 현실에서는 그 결정권이라는 것을 온전히 혼자 가질 수는 없다. 당장 성인 대표팀만 보더라도 각 프로팀들간의 미필 선수를 배려해야 하는 것처럼 U-18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U-18감독은 현역 고교야구 감독이 담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연하게도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자기 팀 선수들을 더 많이 데려가려고 한다. 물론 대놓고 그리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과정에서 각 학교별로 적절한 숫자의 선수들이 배정되고 조율이 됐다. 하지만 권규종 감독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현역 고교야구의 감독이 아닌 야인의 신분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오랜 관례가 깨진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 2008년 이후 대한민국은 단 한 번도 U-18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까지만 했다면 굳이 이런 식으로 현역 고교야구 감독이 아닌 야인을 U-18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인 대표팀에 비해서 U-18 대표팀의 화제성은 매우 부족했으니까.
문제는 지난 2022년 이후 WBSC 랭킹에서 한국이 일본과 미국은 물론이거니와 대만에게까지 쭉 밀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원인으로 U-18에서의 저조한 성적이 이유로 지목되어 언론을 탔다는 부분이었다.
“최 코치. 마음은 잘 알겠어. 나도 그랬었으니까. 근데 지금 여론 알잖아. 우리 여기서 우승 못 하잖아? 보통 일 아니다. 솔직히 우승이 어려울 것 같으면 나도 이런 말까지는 안 해요. 근데 내가 보기엔 그냥 우리 우승하는 법 간단해. 애들 관리 잘해서 그냥 다들 자기 기량 발휘만 하게 해주면 돼. 내 말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듣지?”
“네.”
***
조규혁이 싱글벙글 웃으며 짐을 쌌다.
“팬티는 넉 장만 가져가면 되겠지? 거기도 세탁기는 있을 거 아니야.”
“아, 맞다. 그리고 여권. 나 사진이 올해 초에 찍은 거긴 한데. 그래도 여권용 사진은 이마도 까고 귀도 양쪽 다 나오고 그래야 한다던데. 새로 찍어야 하나?”
국가대표.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달고 국가를 대표해서 뛰는 선수다. 비록 진짜 국가대표가 아닌 연령별 대표라지만 당장 몇 달 전에 야구를 그만둬야 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했고, 지금도 역시 프로에 과연 드래프트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처지에 연령별 대표라니.
그래, 드래프트. 사실 단순히 연령별 대표로 뽑힌 것 때문에 이렇게 싱글벙글한 것은 아니었다. 연령별 대표로 뽑혔다는 것은 적어도 이번 시즌 고등학생들 가운데 20명 안에 드는 기량이라는 의미였다. 뭐 포지션 별로 할당이 있을 테니 20명을 넘어갈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30명, 아니 적어도 50명 안에는 들어간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말인즉 100명을 뽑는 드래프트에 무조건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옆에 앉아서 조규혁의 옷을 개어주던 조유진이 한 마디를 끼어들었다.
“근데 어차피 선배님은 머리가 빡빡머리라서 사진을 어떻게 찍어도 이마랑 양쪽 귀랑 다 나올 것 같은데요.”
“아, 그런가? 그러면 필름 가져가서 인화만 해달라고 해야겠다.”
“근데 선배님 여권 온라인으론 안됩니까? 요즘 그런 거 많던데요.”
“어, 나도 알아봤는데 그거 재발급만 된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내일 수원이랑 같이 갈라고.”
“진짜 부럽습니다. 국가대표에 공짜로 해외여행까지.”
“인마, 너도 열심히 해. 그러면 혹시 아냐? 너도 공짜로 해외여행 갈 찬스가 생길지?”
조유진의 얼굴이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U-18대회는 2년에 한 번이잖습니까.”
“U-18만 대회냐? U-23도 있고······. 게다가 국가대표도 있잖아.”
“구, 국가대표요?”
“뭘 그리 놀라? 못 될 것도 없지. 솔직히 석 달 전만 하더라도 내가 U-18 대표 뽑힐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냐. 안 그래?”
“그건 선배님이 워낙에 포텐셜이 있으셨으니까······.”
“포텐셜은 개뿔. 최수원 아니었으면 여전히 단타나 노리고 있었겠지. 아무튼 너도 남은 기간 열심히 하면 또 모른다.”
확실히 그 말처럼 조유진 역시 조규혁만큼은 아니었지만 최수원과 타격 연습을 시작한 이후 미묘하게 성적이 괜찮아지기는 했다.
“그럴까요?”
“그래, 인마. 넌 운 좋은 줄 알아. 난 고작 3개월 수원이랑 붙어서 연습했지만 넌 앞으로 1년은 더 할 거 아니야.”
“뭔가 선배님 말씀 들으니까 희망이 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 희망으로 봉황대기 파이팅이다.”
“아······.”
조유진은 그제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돌아오는 봉황대기에는 3학년들도, 최수원도 없다는 것을.
***
야구의 본고장 미국.
하지만 미국에서 야구가 가장 인기 있는 지역은 그리 많지 않다. 당장 미국 서부에서 가장 큰 자금력을 자랑하는 LA다저스만 하더라도 구단 인기 순위에서 레이커스에게 살짝 밀리는 판국이었으니까.
하지만 뉴욕은 달랐다.
세계 최고의 구단인 뉴욕 양키스는 단 한 번도 뉴욕의 구단 인기 순위에서 밀려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야구의 도시.
그리고 그 도시에는 NFL 팀인 뉴욕 자이언츠보다 인기가 있는 구단이 하나 더 존재했다. 물론 그 팀은 당연히 닉스는 아니었다.
“젠장······. 200만 달러로는 이거 도저히 견적이 안 나오는데?”
“그 정도인가요? 그래도 200만 달러면 작년 기준 국제 유망주 3번째 기록이잖아요. 그 오타니 쇼헤이도 231만달러밖에 못 받았고요.”
“그거야 특별한 경우였으니까. 게다가 다른 애들이 바보도 아니고. 이 정도 평가면 최소 크리스티안급 포텐셜이야. 물론 포지션이 좀 애매하기는 한데······.”
“그러면 어쩌죠? 후안에게 꽤 오래 공을 들이셨잖아요.”
“일단 아직 시간이 꽤 남았으니 고민을 좀 해보자고.”
뉴욕에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스포츠 구단.
뉴욕 메츠의 단장 조슈아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