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잊어라(3)
사실 이게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금만 살아봐도 안다. 세상일이라는 그것이 다 그렇다. 최선을 다했다고 항상 좋은 결과가 나올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야구처럼 상호 간에 경쟁하는 게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상대방이라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고, 이게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해서 분한 마음이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우승을 코앞에서 놓치는 것은 그것이 프로야구건 메이저리그건 아니면 고교야구건 화가 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9회 초.
나는 1루에 멍하게 서서 덕아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덕아웃. 4.1이닝 동안 5실점을 한 멍게는 화를 내고 있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물론 멍게가 화를 내는 것 자체가 보기 드물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분노의 방향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인 경우는 단언컨대 멍게 자신도 태어나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 분명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 2.1이닝 동안 6실점을 한 진우 선배는 울고 있었다. 이미 3차전에서 4이닝 동안 3실점을 하고도 눈물을 보였던 선배였지만 지금 흘리는 그 눈물은 의미가 참으로 크게 달라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심지어 이번 눈물은 전염성도 얼마나 강한지 그 주변 아이들을 모두 훌쩍이게 했다.
참으로 얄궂게도 마지막 공격을 담당했던 규혁 선배는 삼진을 당했던 그 모습 그대로 타석에 굳어 있었다. 그것은 우승을 확정지은 직후 마운드로 달려 나온 천남고의 아이들과 너무나도 크게 대비됐다. 사실 여기서 규혁 선배가 한 방을 쳤다고 경기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과에 영향을 주기에 2점은 너무 작았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규혁 선배를 위로하러 갈 수가 없었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지난 2차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함으로써 그 말을 깨트렸던 백원고의 에이스 한민준은 역설적으로 이어지는 3차전에서 그 말이 넘어설 수 없는 진실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준결승에서 홈런과 노히트 노런으로 그 말을 완벽하게 깨트렸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천남고에게 패배했다.
13:1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원래 야구라는 것은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려야 하는 운동이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던가. 야구란 패배를 관리하는 게임이라고.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멍게가 화를 냈던 것처럼, 진우 선배가 엉엉 울었던 것처럼, 규혁 선배가 타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한참이나 1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스카우트 지미 팔머가 뺨을 부르르 떨었다.
백이라고 했던가? 오늘 경기 마운드에 섰던 투수 역시 훌륭했다. 아마 NFHS 소속의 선수였다면 적어도 드래프트 2라운드 정도는 너끈하지 않았을까? 물론 오늘 경기가 그의 모든 경기 가운데 가장 훌륭했던 경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고작 고등학생이 당장 AA에서 뛰어도 괜찮을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공 때문만이 아니었다. 올드스쿨인 지미 팔머가 보기에 홈런을 두들겨 맞고도 덤벼들 수 있는 그 정신이야말로 선발 투수가 갖춰야 할 가장 큰 자질이었다. 그래, 그에게는 분명 승리를 만끽할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지미 팔머가 집중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덕아웃에서 튀어나온 선수들로 시끌벅적한 마운드 너머, 그의 시선이 꽂힌 쪽은 1루 못 박힌 것처럼 서 있는 한 청년이었다,
사실 오늘 경기에서 그 타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야구라는 스포츠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그가 살면서 직접 눈으로 본 타자 가운데 가장 대단했던, 약을 먹고 신에 도전했던 사나이 배리 본즈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월드 시리즈 위너로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디 그것이 배리 본즈의 문제인가. 오늘 저 타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승리를 만끽하는 대신 패배를 곱씹어야 하는 이유는 그저 그의 동료들이 그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미 팔머가 자신의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
회사에서는 그 빌어먹을 태블릿인지 뭔지로 써서 전송하라고 이야기했지만 다 죽어가는 노인에게 신기술이란 어울리지 않았다.
Suwon Choi(OF)
Hit : 50~65(?)
Power : 70(?)
Run : ??
Fielding : ??
Arm : ??
Hit 부분에는 이미 55~70(?)이라는 숫자에 줄이 몇 줄 벅벅 그어져 있었고, 그 뒤편으로 작게 50~65(?)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지미 팔머가 다시 그 55~65(?)라는 숫자에 줄을 벅벅 그었다.
잠깐의 고민.
아니, Hit만이 아니다. 최수원이라는 선수 자체를 다시 평가해야 했다.
Suwon Choi(DH)
Hit : 70
Power : 65
Run : 50~60(?)
메이저에서 충분히 통할 재능.
‘200만 달러······.’
과연 가능할까?
지미 팔머가 자신의 견해를 메모장에 휘갈겼다. 그리고 서둘러 스마트폰을 펼쳐 사진을 찍고 전송을 했다. 태평양 너머에 있는 자신의 보스에게.
***
2025년의 끝을 논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고작 8월 초순. 계절적으로는 아직 가을도 찾아오지 않은 시기였다. 당연하게도 고교야구 역시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3학년들의 야구는 이미 끝이 났다.
이진우가 자신의 책상 위에 붙어 있던 표어들을 뜯어냈다. 집이 먼 사람들의 경우 졸업할 때까지 기숙사를 사용해도 괜찮다지만 그의 집은 버스로 15분. 충분히 통학이 가능한 거리였다.
-水滴穿石
-승리는 가장 끈기 있게 노력하는 사람에게 간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표어를 뜯어낸 자리에는 딱딱하게 굳어 있던 풀이 자국을 남겼다. 이진우가 손끝으로 그 자리를 쓸어냈다.
지난 2년 반. 자신은 얼마나 강해졌을까. 아니, 충분히 강해지긴 한 것일까? 그렇다면 부족했던 것은 하고자 하는 노력일까, 아니면 재능일까.
이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다 끝난 일인데 괜히 감상에 젖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평생을 달려온 야구를 접는 애들이 부지기수인 마당에 그래도 자신은 가장 화려한 곳에서 마지막 무대를 불태우지 않았던가.
미련이 남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자신을 강하게 만들고자 했던 모든 것을 부딪쳐 봤기에 후회는 덜하다.
함께 방을 쓰는 후배들이 그런 그를 보며 어렵게 입을 뗐다.
“선배님, 굳이 방 빼실 필요 없이 졸업할 때까지 계속 계셔도······.”
“맞아요. 선배님.”
진우가 피식 웃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 하기는. 됐어 짜식들아. 갈 사람은 빨리 가야 남는 사람도 속이 편하지.”
“진우 선배님······.”
“그리고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너희 밤에 코도 너무 골고 냄새도 엄청 나거든? 나도 이제 공부에 올인해야 하는데 엄마가 깨끗하게 청소해준 방에서 좀 해보자.”
거대한 트렁크 하나.
그리고 배낭 두 개.
후배들이 자진해서 가방과 트렁크를 들었다. 그냥 그러지 말고 방에 있으라고 할까 했는데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마당인데 이 정도 호의는 받아도 괜찮겠지.
건물 자체에 사내 냄새가 진득하게 배어있는 작은 기숙사.
그리고 이제 고작 열여덟 살. 그 가운데 육분지 일을 살아온 공간을 떠나는 진우의 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 앞에 안병영이 방문을 열고 나와 그 나름의 배웅을 했다.
“가냐?”
“어. 넌 진짜 남아 있으려고?”
“어.”
그 선언이 사뭇 당당하여 과연 마지막까지 안병영답구나 싶었다.
“새끼가. 마지막까지 애들 고생시키기는.”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가라. 쓸데없이 길게 인사할 필요 없잖아. 어차피 학교에서 계속 볼 건데.”
“그래.”
누군가와 인사하고, 또 인사하고, 또 인사했다. 이미 나가기로 결정이 난 이후 밥까지 한번 잘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뭐 그리 할 말들이 많은지.
“선배, 자주 놀러 오세요. 공부만 하면 몸 굳으니까 가끔 아침 운동도 나오시고요.”
“그래.”
그리고 그 긴 인사의 마지막.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 하나 보였다.
최수원.
“뭐야? 넌 여기 어쩐 일이야.”
“그냥 쪼유랑 볼 일이 좀 있어서요.”
“그래, 유진이랑 잘 지내는 거 보기 좋더라.”
“잘 지내기는요. 그냥 지내는 거죠. 수능 준비하신다면서요?”
“그래야지. 내가 안병영도 아니고. 드래프트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부족하잖냐.”
“아니, 드래프트는 병영 선배도 뭐······.”
“그래도 걘 대학은 갈 수 있겠지.”
참으로 특이한 녀석이었다.
붙임성 없는 천재의 전형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 팀의 중심으로 스며들어와 모두를 이끌었다. 이진우는 자신이 운동계치고 매우 좋은 성격이라 자부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1년 선배인 김정훈과 화해를 하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헌데 이 까칠하기 그지없는 녀석은 안병영조차도 수용했다. 물론 본인들끼리는 반성문이니 뭐니 하고 있었지만, 애당초 그런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선배, 미안해요.”
“미안? 뭐가?”
“그냥요. 약속 못 지켰잖아요.”
“약속? 아······.”
정말로 잊고 있었다.
진우 자신이 녀석에게 감사를 표했을 때, 녀석이 했던 그의 마지막을 전국 최강으로 끝나게 해주겠다던 이야기.
괜찮았다. 아니 괜찮음을 넘어서 고마웠다.
하지만 미안하지 않은 일에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이 건방진 후배에게 이진우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 뭐, 미안할 필요까진 없지만. 그래도 정 미안하면 내 부탁이나 하나 들어주라.”
“부탁이요?”
“어, 우승 좀 해줘. 이왕이면 전국대회로. 아니, 그걸 넘어서 아예 경하 고등학교처럼 왕조를 만들어 버리면 더 좋고.”
“어······.”
녀석의 얼굴에 곤란함이 깃들었다.
처음이었다. 항상 자신만만한 이 녀석이 곤란해하다니. 그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렇게 곤란해하게 둘 수는 없었다. 이진우가 그냥 실없는 농담이었노라 말하려는 그 순간.
“네, 뭐. 해보죠. 왕조. 쪼유 녀석만 내년까지 어떻게 사람 만들고 1학년 애들 좀 굴리고, 새로 들어 올 애 중에 쓸만한 투수 한둘만 있으면 어떻게 될 겁니다.”
실로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녀석을 바라보며 이진우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오른손을 내미는 것뿐이었다.
“수고해라.”
“······.”
한 번의 악수.
그가 기숙사 입구까지 따라온 아이들에게 가방을 받아들었다. 차까지 짐을 실어주겠다는 것을 만류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기숙사 정문만큼은 홀로 넘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이진우가 마침내 기숙사의 정문을 열었다.
기숙사 바로 앞에는 아버지의 구형 SUV가 서 있었다.
철없던 시절에는 저 낡은 차가 어찌나 부끄럽던지.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차가 낡은 이유가 모두 재능 없는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지금은 그 철없던 시절이 불과 2년 전이라는 사실이 더 부끄러웠다.
“짐은 다 잘 챙겼고?”
“네, 아버지.”
“그래, 짐은 이리 주고 앞에 타라. 엄마가 오늘 저녁은 너 좋아하는 소불고기 재어 놓았다더라.”
“아뇨, 괜찮아요. 제가 실을게요.”
아버지의 낡은 SUV에 짐을 싣고 삭아가는 가죽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젠가 아버지의 차를 꼭 바꿔드리겠노라고.
출발하기 직전.
아버지가 진우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수고했다.”
“······.”
아버지의 두꺼운 손이 흐느끼는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이진우 인생의 프롤로그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