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50화 (50/305)

50화.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잊어라(2)

점수는 4:0

현재까지 행운의 안타 하나와 에러 하나. 그리고 고의사구 하나. 삼진은 무려 네 개.

백하민의 호소력 가득한 눈망울이 또 한 번 천남고의 덕아웃을 향했다.

“아, 미치겠네.”

천남고의 김 감독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지금 점수 차이가 몇 점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건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게 맞다. 만루라도 볼넷을 주라고 할 판국이다.

‘아니, 그건 만루니까 볼넷을 주라고 해야 하는 건가?’

7타석 6타수 6안타 6피홈런 1볼넷.

어디서 이런 성적을 거두는 투수라면 당장에 투수를 때려치우라고 해야 한다. 근데 그 투수가 1라운드 전체 1번을 경쟁할만한 투수네?

1점? 그래 내줘도 괜찮다.

근데 백하민이 홈런을 두들겨 맞고 멘탈이 바사삭······.

‘할 것 같지는 않은데.’

눈물이 좀 많고 여린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김 감독이 보는 마운드 위의 백하민은 차돌과 같은 녀석이었다. 어쩌면 녀석의 멘탈에 더 큰 상처를 주는 것은 피홈런이 아닌 승부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이 상황일지도 몰랐다.

녀석의 방에 걸려있는 여러 글귀들 가운데 가장 큰 글귀.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김 감독은 살면서 백하민보다 그 글귀에 어울리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백하민의 멘탈에 진정으로 안 좋은 것은 최수원과의 패배가 아닌 승부 자체를 피하게 만드는 자신의 지시일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 4:1······.

지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쓸데없이 커다란 녀석의 눈망울에 물기가 보이는 것은 아마 착각은 아닐 것이다.

훌륭한 감독이라면 여기서 절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김 감독은 스스로를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지금 여기 고교야구판이 아닌 저기 프로야구판을 기웃거리고 있었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는 좋은 어른이었다.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백하민의 눈동자에 다양한 감정이 춤을 췄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다른 좌석보다 4천원 비싼 특석. 투수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 자리에 앉은 이들이 가장 먼저 그것을 느꼈다.

“뭐야? 나 지금 뭔가 조금 섬뜩한 느낌인데?”

최수원이 웃었다.

하여간에 이 녀석은 너무 빤하다. 공 하나 정도는 볼넷 주는 척을 하고 기습적으로 타이밍을 가져가도 좋을 텐데 꼭 이렇게 티를 낸다. 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귀여웠다. 쥐뿔도 없는 녀석이 그러했다면 그저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았겠지만, 백하민 정도 되는 녀석이라면 에이스에 걸맞은 자존감이라고 칭해줘도 무방했다.

‘뭐, 그래봐야 비록 성적은 666이지만.’

마운드의 백하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빠른 공.

아니, 그보다 더 빠른 공. 아니 그보다 더욱 더 빠른 공.

활시위를 당기듯 극한으로 잡아당긴 몸이 일순간에 튕겨 나갔다. 어마어마한 전진 에너지. 하체에서 시작된 힘이 손끝에 집약된 그 순간. 저 먼 곳까지 끌고 나온 공이 그의 손에서 폭발하듯 뻗어 나왔다.

이번 경기에서,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력적일지 모르는 속구였다.

특석에 자리 잡은 스카우트들의 스피드건에 찍힌 숫자는 미세하게 달랐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그 숫자가 적어도 153은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타석의 최수원이 움직였다.

투수 최수원은 자신이 던지는 공을 각종 속구, 커브, 슬라이더 등등 각종 그립을 통한 구종으로 구분했다. 하지만 타자 최수원은 달랐다.

떨어지는 공인가? 아니다. 특유의 탑스핀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스플리터라면 백스핀으로 떨어지는 공이지만 백하민의 레퍼토리에 스플리터는 없다.

그렇다면 꺾이는 공인가? 역시 아니다. 백하민이 던지는 꺾이는 공은 슬라이더와 고속슬라이더 두 가지 뿐. 지금 저 공에는 슬라이더 특유의 회전이 보이지 않았다.

속구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0.18초.

날아오는 공이 무엇인지를 파악했으니 이제 움직일 시간이었다. 공의 움직임을 보고 그 궤적을 유추했다. 살짝 들렸던 왼 다리를 강하게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작은 동작에 몸의 무게 중심이 완벽하게 이동했다. 그 중심 이동에 강력한 몸통의 회전이 더해진다. 어퍼 스윙. 하지만 마치 골프의 스윙처럼 크게 퍼 올리는 스윙은 아니다. 살짝, 아주 살짝.

강하게 날아오는 속구의 궤적에 스윙의 궤적을 겹쳤다.

접점은 몸통보다 살짝 앞쪽. 방망이에 실린 힘이 가장 극대화된 시점이었다.

백하민의 손을 떠난 공이 홈플레이트에 가까이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0.36초.

-딱!!!!!!

약 34도의 타구각.

180km/h가 넘는 타구 속도. 높게 떠오른 공이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쏜살같이 담장을 넘어갔다.

홈런.

타구를 바라보는 백하민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동시에 천남고의 김감독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미쳤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괴물이랑 승부하는 걸 허락한 걸까.

최수원이 여유롭게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았다.

백하민의 시선이 담장을 넘어간 타구에서 그라운드를 돌고 있는 최수원에게 옮겨갔다. 차라리 뽐내는 자세로 그라운드를 돌고 있었다면 기분이 조금은 괜찮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라운드를 도는 최수원의 모습은 그저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것처럼 담담했다.

이어지는 조규혁이 삼구삼진으로 물러났다.

그가 느끼기에 백하민의 공은 지금까지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공 가운데 가장 날카로웠다.

경기가 계속됐다.

***

5회.

105개의 공을 던진 안병영이 마운드를 내려왔다.

“고생했다.”

“······.”

안병영은 이진우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쥐고 있던 야구공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가 내미는 야구공을 이진우가 받아들었다. 공은 뜨거웠다. 그것이 7월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꺼지지 않은 안병영의 뜨거운 마음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광판의 점수는 5:1.

여러 가지로 좋지 못했다.

오늘 중앙고의 타격이 문제일까? 아니면 백하민의 피칭이 터무니 없는 것일까. 이진우가 생각할 때는 후자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3회 초 최수원의 홈런 이후 2이닝 동안 백하민은 여섯 개의 아웃 카운트 가운데 무려 네 개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날 그가 최수원에게 했던 이야기도 모두 진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야구 커리어 마지막이 권역 우승으로 마무리된 것이 매우 흡족했었다. 그렇기에 3차전에서 삼진으로 자신의 등판을 마무리 지은 것은 흡족함을 넘은 완벽한 마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무대는 사족일까?

이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이토록 영광스러운 무대가 어찌 사족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분명 먼 훗날 누군가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일 것이다.

청룡기 결승전. 6천 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그 최수원을 대신하여 등판했던 안병영의 공을 넘겨받아 백하민과 맞대결을 펼쳤노라고.

그러려면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피칭을 해야겠지.

그는 이미 불펜에서 35개나 공을 던졌다.

며칠을 쉬어 쨍쨍한 몸이 한여름은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다.

페이스를 조절해서 길게 던지겠다는 욕망은 없었다.

등을 돌려 내야수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유진을 바라봤다. 조유진이 자신의 미트를 펑펑 두들기며 그에게 용기를 북돋웠다.

이진우는 0.2이닝 동안 4개의 피안타와 한 개의 볼넷을 내주며 2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덕아웃으로 돌아온 그에게 최수원이 시원한 이온 음료 하나를 건넸다.

전광판의 점수는 7:1

-부웅!!

“스트라잌!! 아웃!!”

원아웃.

최수원의 세 번째 타석.

그리고 백하민의 마지막 기회가 돌아왔다.

백하민의 시선은 덕아웃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미 감독에게는 허락을 받은 이후였다.

오늘 경기에서도 백하민은 증명했다.

그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을 그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경기를 지켜보던 이들 가운데 특석에 앉은 어느 스카우트 하나가 침을 꼴깍 삼켰다.

더운 날씨. 땀은 줄줄 흘러내려 티셔츠를 적셨지만 이해할 수 없는 한기가 그의 솜털을 일으켰다.

고작 고등학생들의 공놀이가 대체 왜 이런 긴장감을 선사하는 것인가.

그는 그 이유를 알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야구는 그저 공놀이에 불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저 자리에 선 아이들에게 야구란 십몇 년에 불과한 인생을 통째로 바쳐온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와 타석에 선 저 두 선수는 그런 모든 선수들의 정점이었다.

지금 저 자리는 누군가는 노력이, 누군가는 재능이, 또 누군가는 행운이.

혹은 노력이나 재능, 행운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부족했기에 올라올 수 없었던 자리였다.

마운드의 투수가 타자를 바라봤다.

타석의 타자가 투수를 바라봤다.

초구.

투수의 빠른공이 홈플레이트의 경계를 절묘하게 스쳤다. 어떻게 보면 존에서 빠진 공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뻐엉!!

“스트라잌!!!”

하지만 구심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타자는 그것에 유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와 왼손으로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오른손으로 배트를 두 번 강하게 꾹 쥐고 홈플레이트를 한번 톡 두들긴 뒤 자세를 바로 잡는다.

볼카운트 0-1.

투수의 팔목이 살짝 돌아갔다. 아니, 어쩌면 그저 그가 그렇게 느낀 것뿐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 순간 그것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은 오직 타석에 선 타자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공의 회전까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투수 백하민을 전반기 왕중왕전 최우수 투수로 만들어줬던 바로 그 고속 슬라이더였다.

이번에도 역시 코스는 절묘했다.

극한까지 올라간 집중력. 분명 지금 마운드의 투수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실력의 한계점 너머를 질주하고 있었다.

타자의 방망이가 멈춰 섰다.

-뻐엉!!

잠깐의 망설임.

구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볼카운트 1-1

투수 역시 아쉬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까끌한 실밥을 정확하게 움켜쥐었다. 지금 타석에 선 타자는 절대 고교레벨의 타자가 아니었다. 프로 최정상급. 아니, 어쩌면 그 이상. 실투를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정쩡한 코스의 공은 아무리 빠른 공이라도 모조리 담장 밖으로 넘겨 버리는 괴물이다.

세 번째.

백하민의 신경이 미친 듯이 폭주했다. 어마어마한 집중력. 과장을 조금 보태 0.1mm 단위까지도 몸을 통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같은 폼에 같은 릴리즈 포인트. 그리고 비슷한 강도의 힘.

몸쪽 높은 코스. 매우 잘 제구된 공이 빠르게 들어갔다. 이번에도 역시 매우 아슬아슬한 코스. 아마도 모든 공의 구속과 구위, 로케이션이 이렇게만 형성된다면 메이저리거도 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분명 백하민이 앞으로 추구해야 할 가장 완벽한 공에 가까웠다.

그리고 최수원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딱!!

폭발적인 스윙.

양팔이 몸통에 붙은 채 허리가 살짝 뒤로 빠졌다. 평소 그의 스윙이 강한 전진력에 몸통의 회전력을 적당히 더한 스윙이었다면 지금의 스윙은 거의 대부분의 힘을 몸통의 회전력에 의지했다고 볼 수 있었다.

높게 떠오른 타구가 허공을 쭉쭉 뻗어나갔다.

마운드의 백하민이 허탈하게 웃었다.

속이 후련해질 정도로 잘 던진 공이 저렇게 어설픈 자세로 두들긴 배트에 맞고 날아가는데 대체 웃는 것 말고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타석의 최수원이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빠르게 1루를 향해 질주했다.

백하민은 모른다. 아니,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모른다. 전성기의 최수원은 이러한 폼으로도 시티필드에서 비거리 141미터짜리 대형 홈런을 뻥뻥 날렸다는 것을. 또한 그 당시의 최수원은 193cm에 120kg의 괴물이었다는 것도.

천남고의 좌익수가 최선을 다해 담장으로 달렸다.

애당초 꽤 깊숙한 곳까지 외야 후진 수비를 하던 상태이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안양천에서 불어오는 목동의 바람이 외야에서 내야를 향해 불어왔다.

날아가던 타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타악

가벼운 점핑 캐치.

홈런을 훔쳤다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웠다. 그저 담장을 맞고 떨어질 타구를 글러브로 잡아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가 글러브를 낀 손을 번쩍 들었다.

1루를 지나 2루 베이스 근처까지 달려온 최수원이 가볍게 혀를 찼다. 으레 당연히 담장을 넘어가겠거니 생각했던 백하민이 그 뜻밖의 행운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6회 초 7:1.

점수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중앙고의 아이들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것은 천남고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콜드게임이 없는 청룡기 결승전.

그렇게 9회 말은 찾아오지 않았다.

***

“정말 괜찮겠지?”

“신이 아닌 이상 미래는 모르는 일이죠. 하지만 적어도 스카우트팀은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지금 팀의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올바른 선택은 아니다. 현재 이 팀은 총체적 난국으로 즉시전력감 몇 명 들어온다고 우승을 경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정병철은 오랜 시간 팀의 가장 큰 문제였던 포수 부분을 해결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인재였다. 전체 1픽급 포수라는 것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청룡기 결승전을 직관한 스카우트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이야기할 만큼 백하민이 보여준 모습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으며 그 성장세라는 것은 눈이 부셨다.

그렇기에 정병철 거르고 백하민.

2026 드래프트까지 이제 삼 주.

부산 마린스가 자신들의 드래프트 전략을 확정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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