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걔는 빼고(6)
7월 중순.
한낮의 찌는 태양이 목동을 달궜다.
마운드에 선 투수도, 타석에 선 타자도 굵은 땀방울을 뚝뚝 떨어트렸다.
8회 초.
조규찬은 또다시 마운드 위에 올랐다. 고작해야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하지만 그런 기색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은 여전히 힘이 있었다.
105구.
-뻐엉!!
“스트라잌!!!”
그가 오늘 자신에게 허용된 마지막 공을 스트라이크로 장식했다.
잠깐의 시간.
고개를 떨궈 마운드를 한 번 바라보고 홈플레이트 너머 포수부터 내야의 모든 야수와 저 너머 외야의 야수들까지 눈에 담은 조규찬이 마침내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1:0
여전히 바뀌지 않은 숫자.
-으드득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억울했다.
‘나에게는 아직 힘이 있었다. 나는 패배하지 않았다. 아직이다.’
하지만 고교야구가 정한 규칙이 조규찬을 마운드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그의 고교야구 인생 마지막 피칭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했다.
“수고했다.”
“잘 부탁한다.”
조규찬이 그 분한 마음을 그득 담아 경하고의 두 번째 투수인 이지민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새롭게 마운드에 올라온 이지민 역시 이번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정도는 너끈한 실력자였다. 어지간한 팀이라면 에이스 자리 꿰차기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경하고 최중찬 감독은 적어도 이지민의 몸은 온전한 상태로 결승전에 진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8회 1:0으로 지고 있었다. 똥오줌을 가릴 때가 아니다.
이미 불펜에서 30개가량 공을 던져 몸을 푼 이지민이 중앙고의 타자들을 상대했다.
-딱!!
바뀐 투수의 초구를 공략하라.
놀랍게도 조유진이 이지민의 초구를 건드렸다. 언제나처럼 타구는 뻗어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두들기다 보면 언젠가 열리기 마련일까? 절묘하게 3루 파울 라인을 따라 굴러간 타구가 그를 1루로 인도했다.
“세이프!!”
1루에 선 조유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세 걸음. 그리고 반. 그가 호시탐탐 도루의 기회를 노렸다.
-부웅!!
덕아웃의 사인은 이미 떨어졌다.
이어지는 1번 타자가 어이없는 공에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러주었다. 조유진은 이미 2루를 향해 출발한 상황.
공을 받은 정병철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오른무릎이 털썩 바닥을 찍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을 때 생긴 운동에너지에 코어의 힘이 더해졌다.
홈플레이트에서 2루까지 38.79m.
정병철의 손을 떠난 공이 마치 빨랫줄처럼 이루수 글러브에 정확하게 빨려 들어갔다.
-뻐엉!!!
“아웃!!!”
타고난 강한 어깨의 소유자만이 보여줄 수 있다는 앉아쏴.
정병철이 어째서 자신이 고교 No. 1 포수인지를 여실하게 증명했다.
포수의 호수비 덕분에 기세가 오른 탓일까?
이지민이 이어지는 1, 2번 타자를 삼진과 땅볼로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8회 말.
최수원이 또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
아직 언더 셔츠는 한 벌이 더 남아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 벌 챙기기를 잘한 것 같다. 세 벌만 챙겼더라면 경기 중에 찝찝하게 마운드에 올라왔든지, 아니면 경기 끝나고 샤워까지 한 다음 찝찝하게 집에 돌아갈 뻔했다.
상위 타순도 거의 다 지나고 이제는 가장 어려운 상대만을 남겨 놓은 상황.
타석에 정병철이 들어왔다.
지금까지 내가 던진 공은 총 97개.
5회에 있었던 그의 타격을 생각한다면 노리는 공은 명확했다.
속구.
그리고 5회에 그는 나의 속구를 건드리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당시 나의 속구는 그야말로 최고조. 내 최고 구속인 156km/h. 아니 어쩌면 157km/h를 찍었을지도 몰랐다. 빠른 구속은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다. 괜히 KBO 출신 메이저리거들이 MLB에 가서 빠른 공 못 쳐서 돌아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몇 차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확실히 힘이 빠졌다. 악력은 떨어졌고 하체도 좀 부실했다. 규혁 선배가 이 정도면 2.5kg은 더 들 수 있겠다며 1.25kg짜리 원판을 한 세트 더 사야겠다고 하던 걸 말렸던 게 조금은 후회됐다.
7회에도 티몬의 호수비가 아니었다면 노히트가 깨질 뻔했다. 그 순간 어찌나 녀석이 예뻐 보이던지 나도 모르게 멍게 녀석 꼬봉 짓 했던 걸 용서할 뻔했다.
사실 야구의 어려움은 매일매일 경기를 하는 데 있다.
가끔 사람들은 농구나 축구와 야구를 비교하곤 하는데, 내가 생각할 때 그건 단거리 달리기와 장거리 달리기를 비교하는 것과 흡사하다. 1시간 좀 넘는 시간을 빡세게 뛰고 사흘 쉬는 게임과 매일매일 3시간씩 뛰어야 하는 경기의 차이랄까? KBO에 복부에 지방층을 근육보다 두껍게 형성한 그 양반들까지 옹호하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 지방이 필요하다지만 솔직히 그건 선 넘었지······.
아무튼 매일매일 경기를 뛰는 대신에 한 경기 한 경기는 좀 쉬어갈 타임도 있고 잠깐잠깐 집중하고 다시 자세를 풀 수 있는 게 야구였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지명 타자로 뛰었으니 쉬어가는 시간도 꽤 길었고. 하지만 확실히 투수, 그것도 선발 투수는 달랐다. 괜히 휴식일이 있는 게 아니다.
초구.
코스는 제법 좋았다. 몸쪽 높은 코스로 들어가는 공.
-뻐엉!!
하지만 타자의 방망이가 나오지 않았다. 심판의 손도 올라오지 않았다.
방망이가 헛돌 만도 했고, 스트라이크 콜도 줄 법도 했는데 영 좋지 않았다.
1-0.
정병철이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장갑을 동여맸다.
설마 속구를 노리는 게 아닐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지쳤다고 해도 구속은 여전히 150을 넘어갈 거다. 슬라이더를 노리다가 칠 수 있는 공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 경기 내가 던진 속구의 비중은 80%를 넘어간다.
조유진이 미트를 펑펑 두들겼다.
이 찌는 더위, 저런 묵직한 장비를 차고 끊임없이 앉았다 일어나야 하는 녀석도 힘들긴 마찬가지일 거다. 하지만 조금 전에 그 상하체 분리 타법과 도루 실패를 봐서 그런가? 불쌍하다는 마음은 도무지 생기지 않는다.
두 번째.
비슷한 코스.
하지만 아주 조금 더 존 중앙 쪽으로 몰렸다.
-딱!!
정병철의 방망이가 공을 두들겼다.
높게 뜬 타구가 1루 내야 관중석을 두들겼다. 준결승이라서일까? 아니면 우리와 경하고의 경기여서일까? 제법 모여든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그 공을 집어 들고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거리가 있었지만, 체형부터 주변의 반응까지 미인이 분명했다.
응?
근데 저 사람?
***
“아싸!! 언니, 이거 제가 가져도 되는 거 맞죠?”
“어, 지나야. 맞아. 맞으니까 우리 진정하고 자리에 앉자.”
모자를 푹 눌러쓴 박은진이 순간 당황했다.
뭔가 최수원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게다가 제법 먼 거리라 표정이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박은진은 최수원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 씨······. 비웃은 건가?’
솔직히 지금 여기 왔다는 사실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타이밍에 인생 상담으로 대화를 돌린 것 자체가 고백 자체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러니 사실상 고백도 하기 전에 까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그러기엔 넌 아직 너무 젊어’라는 말을 할 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눈빛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확인만 하는 거야. 재주가 남들 세 배, 네 배면 운칠기삼도 이길 수 있다는 그 헛소리를 본인은 어떻게 해내는지 딱 그것만 보는 거야.’
그래서 그냥 몰래 잠깐 경기나 보고 가야지 생각했다. 전국 최강이라는 경하 고등학교를 상대로 자신의 말을 어떻게 관철하는지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어코 들러붙은 양지나가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와, 야구장 와보기를 잘했어요. 이게 그러니까 그 홈런볼이라는 건가?”
“어, 지나야 그런 거 아니야.”
***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본래 나는 아이돌을 매우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당연하다. 내가 만난 아이돌, 혹은 아이돌 출신이 대체 몇 명이었나. 하지만 난 그 아이돌이 되기 위해 힘쓰는 아이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날 밤, 내가 박은진에게 해줄 수 있던 것은 그저 힘내라는 격려뿐이었다.
물론 그 격려의 과정에서 어른이라면 해줄 수 있는 경험과 교훈으로 가득한 조언들도 들어가긴 했다. 그리고 그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에 감동했는지 다시 연습에 매진하는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아마 그녀도 나의 조언에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시간을 내서 나를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겠지.
그러니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나는 스타였다. 나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꿈과 희망을 품었다.
공을 움켜쥐었다.
볼카운트는 1-1.
조유진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 코스 존을 빠져나가는 슬라이더.
정병철이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뻐엉!!
볼카운트 2-1.
사실 8회쯤 되면 투수도 지치지만, 투수 못지않게 지치는 게 무거운 장비를 잔뜩 입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해야 하는 포수다. 괜히 포수가 공격력이 좀 떨어져도 이해해주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정병철은 여전히 강철 같았다. 역시 회귀 이전 소속팀이 마린스인 걸 빼면 약점이 없다는 평가를 들었던 타자답다.
네 번째.
비슷한 코스.
하지만 속구다.
-부웅!!
“스트라잌!!!”
그리고 이번에는 정병철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확실하다. 이 녀석 지금 나의 속구와 슬라이더를 구분하고 있다. 그게 나의 쿠세를 파악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타이밍으로 구분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운이 좋았던 것은 이번 공이 평소보다 많이 낮게 깔렸다는 점 정도다.
볼카운트 2-2.
머리를 굴렸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한여름의 열기가 정신을 혼미하게 했지만, 거기에 패배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몸이 나쁜 놈들이나 하는 건데 나는 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차피 난 타격도 감으로 했는데.
감이 왔다.
커브다.
그리고 조유진이 눈으로 물었다.
‘진짜? 이 타이밍에? 이 타이밍에 그걸 던지겠다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녀석의 걱정도 이해는 된다. 앞선 연습에서 존에 두 개나 넣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내 커브는 영 쓸만한 공이 못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 경기에서도 커브는 고작 두 개를 던져 모두 땅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하지만 그래도 느낌이 왔다.
이번에는 커브다. 그것도 존을 통과하는 커브라면 충분히 삼진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란 그렇게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행위다. 그렇기에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을 포기한다. 어차피 상대방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타격은 결국 타이밍이고 피칭은 그 타이밍을 뺏는 것이다.
상대방이 노리는 것은 속구.
그러니 완벽하게 타이밍을 뺏어 주겠다.
다섯 번째.
완벽하게 긁어낸 공이 나의 손을 떠나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생각이 났다.
아, 나 오늘 조규찬한테 홈런 쳤던 공이 커브였지?
***
너무나도 명확했다.
둥글게 돌아 나오는 팔과 손목. 손을 떠나는 순간 두둥실 떠오르는 궤적.
커브였다.
그것도 클래식한 슬로우 커브.
정병철이 시선이 그 공으로 향했다.
볼카운트는 2-2. 하나만 존에 들어가도 아웃이다. 몸의 타이밍은 이미 속구에 맞춰진 상황. 억지로 타이밍을 늦췄다.
역회전하며 높게 떠오른 공이 정상적인 공보다 더 가파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삐거덕거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확실히 장비를 착용하고 8이닝을, 그것도 이 무더위 속에서 뛰고 나면 컨디션은 정상일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방망이를 휘두를 힘 정도는 남아 있다.
멈췄던 몸이 다시 움직였다.
공이 떨어졌다.
계속.
계속.
-부웅!!
그리고 그렇게
뚝 떨어진 커브가 바닥을 크게 찍고 위로 크게 튀어 올랐다.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 상황.
정병철이 빠르게 일루를 향해 달렸다.
물론 그도 알고 있었다.
이 질주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가 달린 것은 그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뻐엉!!
“아웃!!”
1루 포스 아웃.
조유진은 언제나처럼 공을 흘리지 않았다. 그는 타자로도 주자로도 영 믿음직하지 않은 사내였지만 적어도 포수 마스크를 쓴 순간만큼은 철벽이었다.
경기가 계속 진행됐다.
한 번의 공격과 한 번의 수비.
그리고 마침내 최수원이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마치 지지난 경기의 이진우처럼.
단지 차이가 있었다면 이진우가 마운드를 내려올 당시 전광판의 숫자가 5:3. 그리고 아직 9회까지 5개의 빈칸이 남아 있었지만, 최수원이 마운드를 내려올 때에는 전광판의 숫자가 1:0 그리고 9개의 숫자가 모두 0으로 채워져 있다는 차이뿐이었다.
경하고의 V30 좌절.
그리고 투수 최수원이 커리어 최초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